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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리뷰대회당선작] 천 개의 방향으로 질주하라 & 돈 맛보다 공부 맛 & 청년 셋이 인도한 길 끝에 나의 스승님도 계시더라 & 우리에겐 더 많은 길이 그려진 삶의 지도가 필요하다

by 북드라망 2021. 6. 11.

천 개의 방향으로 질주하라
-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를 읽고


- 3등 이정희 


이상의 시 ‘오감도’의 한 장면. 13인의 아해가 무섭다고 하며 도로를 질주한다.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지만 뚫린 골목도 괜찮다. 제1의 아해부터 제13의 아해까지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확산되고 전염된다. 13인의 아해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자본주의화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저자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기쁨을 느꼈고 소비의 즐거움에 빠지면서 야간근무 시간 연장으로 자신의 신체를 몰아넣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준 것은 ‘나’인가, ‘돈’인가. 자본의 달콤한 맛에 길들여져 몸을 혹사하던 저자는 자본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한다. 그럼 저자는 왜 자본을 향해 달려가야 했나? 데이트를 하려면 돈을 써야하고(쇼핑, 맛집) 거액의 대출을 끼고 32평 아파트를 산 후 빚을 갚아야 하며, 미래의 안위를 보장해 줄 보험금을 위해 지금 보험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렇게 보니 자본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자본에 쫓기는 모양새다.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바쳐 돈을 벌지만 그 돈은 다시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쓰인다. 
  


자본주의는 돈을 버는 것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 전체가 자본주의화 되었다. 사고방식도 생활패턴도 인간관계도 경제성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내재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길에서 서로 앞서기 위해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승진)에 올라가고 더 큰 힘을 가지고 싶어 앞만 보고 달렸다. 사냥감을 포위하고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냥꾼처럼 자본은 사람들을 일방통행 길에 한 줄로 세워버린다. 다른 길은 없어보이는 이 곳에서 저자는 문득 질주를 멈추고 생각했다. 진짜 이 길밖에 없나?

무기를 들고 사방으로 튀어라
13인의 아해 중 한 명이었던 저자는 질주를 멈추고 몸을 틀었다. 다른 방향으로 뛴다. 저자가 방향을 틀 수 있었던 것은 책과 글쓰기라는 무기(전쟁기계)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쌍둥이 조카들이 3살쯤 되었을 때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면 이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달렸다. 나는 허둥지둥 두 조카를 잡기 위해 뛰었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달리는 아기들을 동시에 잡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렇다! 자본의 일방통행 길에서 도주하는 방법은 바로 각자의 방향으로 몸을 틀고 가는 것이다. 한 방향이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자신만의 무기(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로 도주로를 확보하고 자신의 속도로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주고 있다. 

리좀 ? 도주의 기술
쫓기는 사람이 도주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이당의 모토 중 하나가 떠올랐다. 일상에서 혁명하기. 혁명은 어떤 선언이나 다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부드럽게, 일상에서 하루하루 줄기를 뻗어나가다 보면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혁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덩굴이라는 리좀의 형태로 일상은 바뀌고 자본으로부터의 도주에도 성공할 수 있다. 저자 또한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일상이 모여 도주에 성공한 것이리라. 
  
13인의 아해가 낯설지 않다. 나도 저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 몸을 틀 것인가. 앞만 보고 달리던 발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른다. 자신의 삶을 구하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의 도주로를 생각해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이 수련의 과정이고 혁명의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책과 글쓰기를 어떻게 삶에 스며들게 할지 고민한다. 고민과 결심이 아닌 실천으로 옮겨 나의 도주로를 만들어가야겠다.

 


돈 맛보다 공부 맛

 

- 3등 박현정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는 직장인 청년이 쓴 책이다. 공부와 담을 쌓고 돈 버는 게 중요했던 청년이 어렵다고 소문난 『천 개의 고원』 철학 책을 풀어 읽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나와 학벌이 비슷한 청년이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해서 저자가 된 것은 마치 나의 일처럼 다가왔다. 나는 『천 개의 고원』 내용과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는 재미있게 잘 읽혔다. 『천 개의 고원』에 있는 난해한 암호 같은 철학개념들을 자신의 일상들과 잘 엮어놓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철학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변해가는 청년의 일상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공부하기 전 청년에게는 직장, 아파트, 결혼, 각종보험가입은 든든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들이었다. 부모님의 이혼, 낮은 학벌은 남들을 의식하고 비교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취업을 해서 돈을 먼저 버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 부러움과 칭찬을 받을 때는 돈이 생계수단을 넘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힘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맛에 야근을 하며 노동력을 돈에 팔았다. 결국 과로와 과음, 야식과 폭식의 일상은 청년을 응급실로 보냈다. 안정적인 직장, 반복되는 업무, 야간근무는 지루함과 권태로움도 주었다. 청년은 소위 꿈의 직장을 다녔지만 신체는 병들어 가고 있었다. 돈의 맛 때문이었다.
  


나도 한때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다’는 말처럼 살았다. 돈 때문에 결혼하고 돈 때문에 이혼도 했다. 스위트 홈을 꿈꾸다가 남편의 외도와 부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9년 전 그때 공부공간과 접속 하였다. 넘어진 사람은 일어설 때 돌을 줍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다. 당시 인생을 바닥 쳤다고 생각했던 내가 공부공간에서 주워들었던 무기는 공부라는 돌이었다. 피폐해진 나는 돈만 버는 직장보다는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공동체에 있고 싶었다. 공부로 치유 받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 청년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집안의 압력에 의해 수유너머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뜬금없이 공부공간과 접속한 것이다. 이곳의 특이점은 백수들이 많고 선생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며 공부로 밥벌이를 하는 현장이었다. 청년은 직장 다니고 주말에는 공부를 했다. 그러다 청년은 고열과 기침으로 병원신세를 졌다. 식욕도, 의욕도, 아무런 감정이 없이 멍한 상태였다. 
  
그때 청년은 가방 속에 있던 『천 개의 고원』책을 만났다. 청년은 책 옮긴이의 ‘부디 기쁘게 살아 달라’는 메시지에 뭉클해졌다. 청년은 『천 개의 고원』 문장을 풀어 읽으며 일상과 연결하는 공부를 하였다. 청년은 여태 자본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 자신을 맞추고 수동적이고 맹목적으로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조건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기보다는 돈을 중심에 두고 움직이게 했던 것이었다. 돈이 삶을 윤택하게 하고 질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청년에게 돈의 맛은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밥맛과도 같았다. 청년은 이제 밥 앞에서 숟가락을 막 들지 않는다. 욕망의 밥 맛 앞에서 밥숟가락을 조절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글쓰기공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이다. 이 실천 속에서 여러 스승을 만났고, 벗을 사귀게 되었다. 무엇보다 공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감이당과 접속, 『천 개의 고원』과의 만남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을 안겨주었다.”
— 고영주지음,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 북드라망, 19쪽 

 

청년은 생산과 소비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피로와 허기를 느끼며 살았다. 그동안 돈을 과잉섭취 해 오던 청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극한의 다이어트가 아니라 쾌락에 포획되지 않는 절제와 밥 한 숟가락 덜 먹는 것이 실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년은 피로하면 쉬고, 배가 고프면 즐겁게 밥을 먹어야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부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게 하는 기쁨이다. 욕망을 과잉섭취하게 하는 쾌락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제 청년은 돈 맛으로 살지 않는다. 글쓰기공부 맛으로 산다. 
  
나는 9년 동안 공부라는 돌을 주워들고 무엇을 했을까? 나도 찌들은 사회생활을 청산하고 공부하며 살고 싶어 공부공동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공부보다는 공동체 일을 쫓으며 산 것 같다. 그것이 부끄럽다. 나도 이제 살맛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 이 책은 공부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 맛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청년 셋이 인도한 길 끝에 나의 스승님도 계시더라

 

 

- 3등 윤명주 


나 역시 청년기에 우울증을 앓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던져진 23세. 4학년이던 해,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져 취직하기란 정말이지 하늘에서 별 따기였고, 취직을 해봤자 그저 따박따박 입금되는 상징적인 숫자에나 만족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전공이니, 하고 싶은 일이니, 꿈이니 하는 말은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엄마 찬스로 어렵사리 취직을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그날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다닌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출근하는 길에 버스 종점까지 내처 가버리거나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맘에 드는 곳을 찍어 무작정 시외버스에 올랐다. 당연히 회사에 연락은 하지 않았다. 몇 군데 회사에 취직하고 그만두는 무책임한 일을 반복하다가 엄마 표현대로 사람 구실하는 일은 아예 접고 세상을 떠돌게 됐다.

애초에 결심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즉흥적으로 저지른 여정이었고, 생각 없이 떠난 길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은 그 여정이 1년 가까이 이어졌다는 것.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을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낯선 지역에서 잠을 자고, 처음 가본 고장에서 밥을 먹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 이야기를 했고, 하기 싫으면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정상 제주도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남해 땅끝마을까지 갔다. 땅끝마을에 도착해 그곳이 땅끝이라는 표지판 하나를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뭘 찾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스물 넘었는데 백 살 산 것처럼 인생이 허무하고 지겨워. 그 시절 늘 하던 말 그대로, 여정의 끝조차 허무했다.

연암은 우울증을 앓으면서 저자에 나가 분뇨 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온갖 부류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기이한 인생에 귀를 기울였고 그 과정을 『방경각외전』에 담았다. 나는 연암처럼 책이라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방황한 시절이 있었기에 청년기에 한 번쯤 거쳐야 할 시간을 그나마 건강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체 청년기에 그런 방황 한 번 못해본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청년, 연암을 만나다』에도 인생의 의미에 골몰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이래도 저래도 좋다면, 이 삶은 너무 허무한 게 아닌가?’하는 나의 질문은 너무나 무색해졌다. 거기엔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살겠다는 강력한 전제가 있었다. 그것은 ‘내’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었다.”(163쪽)라고 했다. 이 문장에 격하게 공감했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나’, 가정,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다가 세상에 던져져 온몸으로 풍파를 견뎌내며 통과하는 시기. 말 그대로 현타가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에 내 자리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사회의 첫 발이 그렇게 허무할 줄은 나 또한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스무살 무렵의 내게는 세상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나’라는 존재만 보였다. 나와 사회, 더 나아가 국가와 우주 속의 ‘나’라는 존재와 관계를 보기 보다는 오로지 독보적인 존재인 ‘나’만 가득했던 것. 청년이라서 가질 수 있는 오만한 생각이었던 셈이다.

그 시절에 나도 책 속의 ‘청년’들처럼 연암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랬더라면 나도 “‘예에 맞게 산다는 것’은 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거리낄 것 없는 무한의 세계로 나를 들여놓는 일이다(p. 70)”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름’의 세계에는 ‘진짜’란 없다. 각자가 가진 ‘맛’과 ‘멋’이 있을 뿐이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비슷해지려 할 필요도 없고, ‘진짜’를 욕망하지 않아도 된다(67쪽)”고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고.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로 청년기를 뽑는 서글픈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혹시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당치 않지만 여전히 궁금한 건 사실이다.

비록 책의 화자인 청년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고 해도 별 걱정은 안 한다. 요새 청년들만큼 허덕이며 사는 세대가 없고, 금수저니 흙수저니 날 때부터 왠지 길이 정해져있는 사회가 된지도 오래지만 이들에게는 연암이라는 스승과 그를 함께 읽어나가는 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얘기가 가능한 것이다. “비주류의 길에서 우정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비주류로 살 수 있는 것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비주류로, ‘친구’로 산다는 것은 아주 다른 존재 방식이다. 나는 욕심 때문에 종종 이 길을 저버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연암의 삶을 떠올리려 한다. 그를 보면 누구 것을 빼앗지 않아도 되고, 누가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아도 되는 그 길이 즐거운 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문제는 40대인 나다. 평온한 삶이라는 틀에 갇혀 세계관을 확장시켜나갈 계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책을 통해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세 명 청년들의 이야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연암이라는 스승 앞에 멱살 잡혀 끌려온 기분이지만, 괜찮다. 나이를 떠나 영원한 청년이었던 연암은 중년을 앞둔 내게도 세계관을 확장시켜줄 본보기가 될테니.

 

 


우리에겐 더 많은 길이 그려진 삶의 지도가 필요하다

 

- 3등 유수빈 


당신의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우선 살면서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기는 할까. 이전까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온전한 선택을 상상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돌아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경로를 이탈할 것인가 성공적으로 완주할 것인가, 이 정도의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을 해왔다. 아예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길을 택하는 건 용기 있고 특별한 몇몇에게만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모토로 삼았던 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성향을 타고났고, 그렇게 모범생이 됐다. 별 의심 없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꽤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며 살고 있다.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엄청나게 굴곡이 있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다. 어쩌다 보니 세상이 요구하는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게 돼 그렇게 사는 중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하기보다 잃어야 할 것을 먼저 걱정하게 됐다. 어쩌면 잃을 게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오면 두렵다. 이렇게 사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인지 고민 없이 살았던 것에 대한 대가로 이젠 내가 원했는지도 모르게 얻게 된 것들을 혹시나 잃지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한다. 서글픈 일이다. 우리의 삶은 자동 항로를 따라 날아가는 비행기가 아니다. 삶의 길이라는 것도 언제나 항로를 바꿀 수 있다. 이건 너무 당연한 건데, 이제야 새삼스레 삶의 경로 변경 가능성을 고민해본다.

‘동양고전을 읽으며 살아왔던 대로 살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신체를 바꾸게 된’(49쪽, 김고은 편, 「내 길을 찾아 삼만리」) 저자의 경험이 보여준다. 우리는 선택에 따라 자신이 살던 방식을 바꾸고, 그간의 자신을 달라지게 하고, 신체마저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저자는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동양고전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겸손하게도 특별한 건 없다고 덧붙이지만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삶의 태도는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 인지하고, 순응하는 태도야말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시작이니까.

‘다른 이십대의 탄생’. 처음에 책 제목을 보고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결국 이십대라는 세대를 규정하는 책인가하고 불편해했다. 세대론이 그 세대 속에 속하는 개개인의 개성을 지워버리고, 세대라는 큰 틀 속에서 개인들을 뭉뚱그려 규정한다는 점에서 반발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내 우려는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그간 이십대 담론에서 유일한 청년의 모습인 양 비춰진 수도권 대학생이라는 ‘상상가능한 청년의 모습’ 바깥의 개인들의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있었고 그래서 좋았다.

“질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습관과 일상이듯이 질문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 역시 습관과 일상”(99-100쪽)이라고 저자 김지원은 말한다. 질문을 품고 그에 맞는 실천을 하는 삶은 피곤하다. 대부분의 일상은 질문 없이 살 때 오히려 물 흐르듯 흘러간다고 느끼기 쉽다. 질문들은 발부리에 걸리는 돌처럼 안온한 일상에 턱턱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질문을 참고, 모르는 척하고, 잊는 것 또한 피곤한 일”(100쪽)이다. 어차피 피곤하다면 자신의 삶을 관통할 질문을 찾아 던지는 게 자신을 위한 게 아닐까. 저자는 일상에서 ‘무엇을 위해’보다 ‘왜’라는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질문을 가지고 살 것인가. 이 책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책을 펼치는 정도의 노력으로 세 사람의 삶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대안학교나 인문학 공동체라는 낯선 삶의 방식을 접하게 된 게 이 독서 경험을 통한 수확이다. 나와는 다른 삶을 더 많이, 더 깊이 볼 수 있다면 타인의 삶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또 다른 삶의 경로를 생각해볼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대다수가 걷는 주류의 삶이 아닌 이런 삶도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다양한 갈래의 길이 그려진 지도가 더 필요하다. 그 길을 따라 걷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다른 길을 따라 찍힌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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