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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 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1. 3. 2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 지은이 인터뷰

 


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끝까지 읽기 어려운 책으로 손꼽히는 고전 중 하나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되셨고, 게다가 사랑(!)까지 하게 되셨나요(사랑하니까 이 책으로 책까지 쓰신 거라 생각합니다. 흠흠.)?

운명입니다! 처음 책을 손에 들었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요. 할 일이 따로 없던 어느 날 책의 두께만 보고 ‘오! 세월 보내기 좋겠군!’ 했습니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면서 대반전이 일어났어요. 그때부터 정말 아주 많은 시간을 오롯이 이 책을 읽는데 보내게 되었거든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을 먹는 소설이었습니다. ^^
    

시간이 잘 흐르게 하는 책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요? 알 만한 인물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속에서 고생도 좀 하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들어있겠지요. 독자는 따로 머리 쓸 필요 없이 문장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연처럼 보였던 세련된 신사는 초라한 하녀의 식탁에서 조연이 되고 맙니다. 살롱의 어릿광대는 어느새 회화의 거장이 되어 있지요. 진정한 사랑을 맹세했던 소녀는 거짓말쟁이임이 밝혀지고, 아무런 재주 없이 태어난 소년은 절차탁마를 통해 걸작을 완성해 냅니다. 프루스트는 겨우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한 입을 갖고서 만 갈래로 뻗어나가는 기억의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스쳐 보내는 순간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너는 또 저런 사람이야!’라며 상대방을 향해 쉽게 내리는 판단들, 그 너머에 얼마나 다채로운 진실들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병풍을 열듯 쫘악 펼쳐 보여주었지요. 

 

저는 그 스케일과 깊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삶에는 중요한 일이 따로 없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인생은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저 흘려보내도 좋을 무의미한 시간이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눈물이 났는데, 무한한 시간 속을 걸어가는 작은 제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루스트 덕분에 ‘통과해버린 과거’와 ‘흘려보내고 있는 지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2. 책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무엇이고, ‘되찾은 시간’은 또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작가’의 길과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시간이 무슨 분실물이라도 된다는 걸까요? 잃어버리기도 하고 찾을 수도 있다니요. 프루스트는 타임머신이라도 발명했던 걸까요? 과거로 날아가 오욕에 찬 나날은 지워버리고 영광의 그날은 영원히 붙잡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프루스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이란 단적으로 말해 그냥 흘러가고 있는 지금, 흘러가버린 과거를 뜻합니다. 여기까지는 상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프루스트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되찾는다’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시간 되찾기’를 반성 즉 되돌아본다의 의미로 씁니다. 그런데 이 되돌아보기에는 독특한 장치가 필요합니다. 바로 ‘무의지적 기억’입니다. 무의지적 기억이란 우연히 맛보게 된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처럼 예측 밖의 계기로 불쑥 떠올리게 되는 지나간 인상을 말합니다. 

 

프루스트는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 순간들, 부정하고 싶은 시절들, 바로 거기에 인생의 온갖 비밀이 있다고 보았어요. 왜냐하면 기억하려고 애쓰고 잊으려고 몸부림치는 과거란 옳고 그름에 따라 이미 다 판단되어버린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에는 정말이지 셀 수 없이 많은 진실이 있거든요. 가져야만 하는 물건, 이루어야만 하는 업적, 지켜야만 하는 관계 등으로 인생을 바라보다가는 내 삶이 품은 다채로운 의미를 찾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의지로는 복구할 수 없는, 내가 의미 없다고 폐기해버린 과거의 장면을 화두 삼아 인생을 다시 통찰하는 일이 됩니다.  
프루스트는 작품 안에서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음악, 회화, 소설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예술은 음이나 빛처럼 감각을 다루기 때문이지요. 대상을 선과 악에 따라 나누지 않고 매번 다르게 바라볼 길을 내는 겁니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이 중에서도 소설을 시간 되찾기에 최고로 적합한 형식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해석이 바뀌고 또 바뀌는 과정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글밖에 없으니까요. 글이란 한없이 고쳐 쓸 수 있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작가야말로 유한한 과거를 무한한 이야기의 밭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3. 선생님께서는 난해하기로 이름 높은 카프카 작품을 다룬 책을 내셨고, 또 역시 독서가들의 에베레스트 느낌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도 책을 쓰셨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작가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저는 마조히스트거든요.^^;; 카프카의 작품은 의식과 욕망의 어두운 밑바닥으로 계속 내려갑니다. 반면 프루스트는 거대하게 높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맨 마지막 장면에서 프루스트는 “시간의 무한한 깊이를 내려다보았다”라고도 씁니다. 이 높이를 지탱하는 것은 우정과 연애, 정치와 예술을 둘러싼 고원들입니다. 그 사이사이로 온갖 번민의 골짜기가 펼쳐져 있지요. 
카프카와 프루스트는 글쓰기의 기법에서도 완전히 다릅니다. 카프카는 어떤 비유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독일어 사전의 제1정의로만 글을 쓴다고 했을 정도로 한 단어의 익숙한 껍데기를 붙들고서 그것이 얼마나 바스라지기 쉬운 외피인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전을 다 동원합니다. 동의어와 반의어 사전을 비롯 법학 사전, 종교학 사전, 물리학 사전, 더 들어가면 발자크 사전, 괴테 사전 등. 각 분야나 한 작가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말의 용법을 가리지 않고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어휘수로만 따져도 극소와 극대입니다. 게다가 카프카는 출판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며 완성에 어떤 열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다르지요. 수만 번 퇴고하고 끝까지 고쳐서 3천 페이지가 넘는 걸작 한 편을 완성해 냅니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밤의 철학가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밤에만 글 쓸 수 있었습니다. 밤이야말로 환하게 자신을 드러내던 낮의 진실을 의심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도 프루스트도 보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우리 욕망의 어두운 골목길, 누구나 헤매고 있는 몽상과 착각의 어지러운 길에 애써 머물면서 더 음미해볼 이야기란 어디 또 없을까 하고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저는 꼭 있어야만 하는 진리란 없다고 말하는 카프카와 프루스트에게서 똑같이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와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사실 저는 가끔씩 프루스트 작품 속 인물들을 불러 놓고 베스트 인물상 같은 것을 주곤 합니다.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는 자애의 화신인 작중 여러 어머니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고요. 카프카에 관한 책 쓰기가 어려웠을 때에는 재능 없음에 속상해하던 마르셀에 빙의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심해지던 2020년 여름에는 어리석은 스완 씨를 많이 떠올렸어요. 프루스트의 인물들은 마치 그리스 신들처럼 야심, 허영, 탐욕, 순수 등 다양한 덕들을 가졌지요. 이들은 자기 덕 때문에 팔자가 피기도 하고 운명이 꼬이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생을 합니다. 인물들은 제가 기쁠 때 혹은 슬플 때 가끔씩 저에게 찾아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돌아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저의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제 처지나 감정이 달라질 때마다 시상식을 여는데도 늘 후보에 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념의 화신 샤를뤼스 씨입니다. 샤를뤼스 씨는 대단히 독특한 인물인데요. 그에게는 자의식이나 타의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샤를뤼스 씨는 사회적 도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어떤 승리, 어떤 타락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욕망에만 집중하니까요. 프루스트는 샤를뤼스 씨를 통해 어떤 인간적 가치에도 휘둘리지 않는 존재를 창조해냈습니다. 샤를뤼스 씨와 비교하면 제가 하는 일상의 번민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프루스트는 샤를뤼스 씨를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았으니까요. 주인공 마르셀이 어떤 글을 쓰게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번민은 초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숙고하면서 안고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5. 선생님의 책을 읽을 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세요.

프루스트의 말에 따르면, 책은 하나의 안경입니다. 독자는 이 안경을 쓰고 자기 인생을 돌아보지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책이라도 주인은 독자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감히 주인이신 독자 여러분께 말씀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책을 다시 내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풀려지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프루스트를 사랑하시는 여러분과 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되찾으러 함께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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