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혐오를 멈추는 처방 ―늙음과 병과 죽음에 대한 공부
어떤 특정한 약에 몸을 길들인 노인들도 많다. 물약으로 된 종합감기약(판콜 또는 판피린)을 감기와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복용하거나, 박카스의 경우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노인들의 최애품이다. 한 할머니는 액상 멀미약을 매주 10병씩 사 가는데 사실 이 모든 약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다. 카페인에 중독된 것이다. 이밖에 우황청심원이나 물약으로 된 소화제 등도 매주 사 가는 노인들이 있다. 이런저런 증상들 때문에 먹기 시작한 약들이겠지만 이미 습관성이 되어 버렸다. (……)
왜 이렇게 노인들이 병원과 약국에 출근하듯 가게 되었을까? 노화로 인해 전반적으로 몸의 기능이 퇴화하고 면역력도 낮아지기 때문에 불편하고 아플 가능성이 증가한다. 하지만 대증요법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의학 아래에서는 노화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노화가 조금이라도 불편을 준다면 모두 증상이고 질병이 된다. 의료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노화를 불편이나 혐오로 보는 시대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니 누구나 노인이 되면 병자가 된다. 덕분에 고령화된 사회에서는 병자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나라의 의료 및 복지 제도도 이에 따라 정비된다.
(……)
노인들의 약물 오남용을 걱정하는 한편 약국에 오는 노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한 방향일 때가 많다. 소통이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들의 말을 듣지만 어디까지나 서비스 매너에 불과할 때가 많다. 내가 이런 태도를 갖게 된 데에는 분명 일부 고집불통 노인들도 한몫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에게 늙음에 대한 낯섦이 있고 그 낯섦 뒤에는 늙음을 싫어하는 내가 있다
(김정선, 「9장: 노인과 박카스」,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 북드라망, 2021, 130~132쪽)
21세기를 표현하는 많은 단어가 있겠지만, 누가 꼽든 ‘혐오’는 그 앞자리에 있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혐오’라니. 지난 수십 년을 살면서 이토록 이 말을 많이 듣고 쓰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다. 뭐든 더 강하고 더 진한 쪽으로 휩쓸려 가면서, ‘싫음’도 그냥 ‘싫다’ 정도로는 그칠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우리는.
만약 개인별 ‘혐오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역시 앞순위에 대부분 ‘노인’이 있을 것이다. 수십 년 전, 내가 어릴 때는 ‘노인’ 하면 ‘공경’이나 ‘지혜’ 같은 단어가 먼저 연상되었는데, 언젠가부터 ‘노인’에 연관되는 단어는 모조리 부정어뿐이다. 물론 일부 노인들의 행동이 눈살 찌푸려지는 것이었음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늙음’은 피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은 것이 된 세태와 함께 온 감정이 아닐까. 더 이상 ‘지혜’는 ‘돈’보다 환영받는 덕목이 아니며, ‘인자한 주름’보다는 ‘팽팽한 피부’가 환영받는다.
하지만 생로병사를 멈출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태어난 이상 ‘늙음’과 ‘병’과 ‘죽음’에 대해 공부해야만 한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 산다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현직 약사인 저자가 약국에서 만난 노인과 또 다시 함께 살게 된 엄마와 갱년기에 접어든 자신을 보면서 ‘3단 콤보’로 눈앞에 나타난 ‘늚음’에 내린 처방 역시 이것이다. “인생의 봄과 여름이 지나는 것이” 더 이상 “슬픔이나 상실이 아니”길 바라면서 ‘젊음’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욕망의 배치를 위한 공부해 가고 싶다고. ‘늙음’에 대한 다른 눈을 갖고 싶다며 말이다. 공부하지 않는 노년을 맞이한다면 우리도 역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우리 또한 어느 세대를 혐오하고 있지 않을까. 혐오를 끝내는 길도 늙음과 병과 죽음에 대한 공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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