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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러시아적 영성, 죄를 거쳐 예수로

by 북드라망 2020. 11. 5.

러시아적 영성, 죄를 거쳐 예수로



도스토옙스키, 꼰대가 되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하 『까라마조프』)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내 마음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 맨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것은 까라마조프 가의 셋째, 성스러운 알료샤다. 그가 알고 지냈던 꼬마 일류샤의 장례를 치르며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라는 낭만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부활에의 확신에 차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아니, 세계적인 대문호가 그려낸 서사시의 마지막이 무슨 연출된 교회 부흥회 광고마냥 서술되는 게 내겐 큰 충격이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천성이 냉소적이라 혹시 감동을 느껴야 할 포인트를 못 느끼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암시가 숨겨져 있는 걸까? 혹은 더 이상 신자가 아니라서 부활의 절절한 기쁨에 동감할 수 없는 걸까? 그런데 교회를 다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완독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책 자체가 기독교 서점에서 넘쳐나는 눈물과 감동의 종교 소설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계속 내 발목을 잡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러시아!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 세계 문학을 주름잡은 러시아 문학 작가들의 애국심은 얼핏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책을 읽다보면 대체 그놈의 러시아적, 슬라브주의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강조되어서 독자로서는 짜증이 날 지경이다. 러시아는 슬라브족의 나라다. ‘슬라브’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Slave, 비천한 노예들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담겨있다. 다분히 서구 유럽 중심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절대 주눅 드는 법이 없다. 결국 그들의 철학을 담아낸 문학이 인류를 사로잡았으니, 결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던 셈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젊은 시절 서구 유럽에 감화된 자유주의자였으나, 인생에서 몇 번의 사건을 겪으며 정통 슬라브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선다. 자유주의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진보 정신 아니던가? 슬라브주의는 완전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민족주의, 국수주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적 전향을 생각해보면 도스토옙스키가 말년으로 갈수록 ‘꼰대’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 모두 중년에서 노년기에 생산되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 썼던 작품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표 작품 목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슬라브주의에 흠뻑 취한 말년의 작품들이 그를 세계적인 대문호로 만든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심지어 그의 평전에서는 그가 외국에서 체류할 때 “러시아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이 그를 괴롭게 했다”고까지 말한다. 이 정도면 꼰대 우익이라고 봐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도스토옙스키의 러시아주의는 어떻게 세계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은 무엇을 품고 있는가?



보편적 죄에 대한 공산주의


『까라마조프』를 처음 읽고 왜 내겐 감동의 여운이 아니라 황당함이 밀려오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러시아를 모르면 읽기가 안 되겠구나.” 러시아도 그냥 단순히 러시아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대체 러시아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고 무슨 철학을 내재화했는지를 찾아내야 『까라마조프』에 대한 공부가 지속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것저것 찾아 읽었고, 꽤 소득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러시아를 탐구해 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까라마조프』라는 중심축을 기반으로 확장시켜 봄직한 영역들이 아주 많이 보였다. 이 글에서의 시작점은 바로 작가 도스토옙스키다.

   

도스토옙스키의 평전은 많고 많아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그의 삶은 한 권의 책을 빽빽이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로 가득하다. 황제의 농간으로 처형장에서 거의 죽다 살아난 이야기, 시베리아에서의 유형 생활, 평생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과 일기, 삼각관계와 불륜에 엄청난 나이차를 넘나드는 열렬한 연애담들, 도스토옙스키의 명성만큼 유명한 어린 아내 안나까지. 그의 평전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집어 들었던 책은 E.H.카가 쓴 평전이었고, 이 선택은 정말 행운이었다. 카의 평전을 읽고 나서야 나는 『까라마조프』의 묘미를 감지할 수 있는 회로를 새롭게 만들어낸 느낌이었으니까.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영국 출신의 역사가다. 사실 그의 전공은 러시아 혁명사였고, 실제로 1917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이름 있는 역사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써낸 도스토옙스키 평전은 정말 탁월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카는 영국인임에도, 아니 영국인이기에 도스토옙스키가 가진 러시아적 정신을 제대로 간파하고 거기에 주목했던 것 같다. 카의 평전을 읽으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요약할 수 있다. 


그(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에게 '우리 모두는 이 땅 위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의 죄를, 보편적인 세계의 죄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죄를 지닌다'고 말한다. (...) 서구 신학에서 속죄는 예민한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도 없거니와 불쾌한 형태로 제시된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타인의 죄 때문에 받는 수난이 모든 기독교인의 특권이 된다. 보편적인 죄에 대한 이 같은 개별적 참여감은 보통의 서구인에게는 허황된 주장으로 보이겠지만 러시아인의 성격에는 깊이 담겨 있고 어쩌면 러시아인의 뿌리 깊은 집단 본능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 평전』, E.H.카, 열린책들, 351쪽)

   

카가 설명하는 러시아적 본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죄의 공산주의. 나는 이 표현만큼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슬로건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에 서구 기독교와 러시아 기독교가 가진 죄와 구원의 다른 지점들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주기도문의 이 기도처럼 인간은 아담과 이브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항상 악에 쉽게 휩쓸릴 수 있는 취약한 존재다. 답이 없는 인간은 어떻게 구원의 방법을 찾을 것인가? 속죄의 방법은 기독교 종파별로 세부사항은 좀 다르겠으나,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신)의 은총과 보혈로 사함(사면)을 받는 것이다. 구원은 완전히 외부적이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능동성은 철저하게 제약되어 있다. 모든 길은 예수(신)로 통한다. 그 외에는 답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는 속죄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방식의 해석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원죄 개념 자체는 서구 유럽과 동일한 시각에서 출발하지만, 구원의 방식이 다르다. 카가 묘사했듯이, 이것은 “보편적인 죄에 대한 개별적인 참여감”이다. 

   

러시아에서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한다. 일단 피고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든지 간에, 배심원들은 기본적으로 ‘저 사람의 죄는 바로 나의 죄다. 나 역시 죄인이다’라는 자책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배심원들은 범죄자를 위해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이런 러시아적 참회(?)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재판이 거의 무죄로 판결난다고 카는 설명한다. ‘러시아’하면 푸틴의 보톡스 맞은 얼굴과 보드카, 시베리아와 흰 눈 정도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러알못’인 나로서는 카의 말을 진심으로 믿어야 하는 건지 뭔지 헷갈린다. 이 정도면 러시아는 성자의 나라가 아닌가? 그동안 미디어로 본 러시아의 표면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놀랍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서구 유럽인의 시각에서 이 같은 러시아 정신이 정말 황당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일까? 서구 철학의 역사는 한 마디로 주체 확립의 역사다. 어떻게 주체를 외부와 구분 지을 것인가? 주체적 이성으로 세계를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체와 분리, 객관성은 서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이다. 사실 이를 위해 서구인들은 이제껏 투쟁한 것이 아닌가? 그들의 사상적, 물리적 혁명은 모두 이런 맥락 위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의 교실 풍경이 하나 떠오른다. 지금처럼 교사의 체벌에 예민하지 않은 풍조 속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숙제를 안 해온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 시에 반 전체가 모두 거대한 주걱으로 얻어맞는 체벌을 받곤 했다. 워낙 조용하고 눈에 안 띄는 학생이었지만, 그 때만큼은 정말 거대한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고 퍽퍽 소리를 내며 순서대로 우리를 때리는 선생님의 뒷통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곤 했었다. ‘숙제를 안 해온 건 저 아이인데 왜 내가 지금 벌을 받지?’ 이런 비합리적인 체벌 방식은 마치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 사회처럼 서로를 감시하며 증오하게 만드는 학교의 뿌리 깊은 폐습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체벌 방식을 완전히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 것처럼, 서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살인자의 죄가 내 죄가 되는가? 나는 그 사건에 아무 개입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죄를 저지를 시간에 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나는 그를 모르고 그 역시 나를 모르는데! 무엇보다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개체인데!” 서구의 눈에 슬라브의 공동체적 죄의식은 정말 기이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발견한 슬라브의 정신은 바로 이것이다. 19세기 혼돈의 러시아, 썩을 대로 썩어 스러져가는 이 추운 대국에는 어떤 전환점이 도래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러시아를 개혁할 방법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서구 유럽의 민주주의 정신을, 또 누군가는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정신을 어서 러시아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톨릭과 종교 정신의 부활을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카톨릭까지 이 모두가 전부 같은 선상의 것이었다. 바로 니힐리즘, 허무주의다. 절대적 가치에 얽매인 사람들은 어떤 이념으로서만, 혹은 신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가 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로를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사상의 완전한 실현이나 내세에 대한 약속 없이, 그 무엇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이 순간에 분출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상의 전향 이후 그는 남은 평생을 이 허무주의와 싸우는데 바친다. 그가 어두운 세상과 펜으로 대결하며 답안지로 제시한 것이 바로 러시아적 기독교 정신이었다. 『까라마조프』는 그의 철학이 진하게 농축된 최후의 작품이다. 



까라마조프, 예수가 되는 길

   

카의 친절한 해설 덕분에 그제야 『까라마조프』가 다시금 읽히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오버스럽고 갑작스럽다고 여겼던 장면, 바로 드미뜨리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기꺼이 뒤집어쓰는 그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둘째 이반 형님도 살인죄에 가담한 것 아니냐, 나는 당신들이 생각으로만 저지르고 있는 죄악을 행동으로 옮긴 것일 뿐이라던 넷째의 변론도 서서히 이해가 갔다. 이전에는 인간이 가진 극도의 모순과 말도 안 되는 걸 우기는 능력을 이렇게 묘사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누가 범인일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살인죄에 그 아들들이 모두 가담했다는 설정이, 그것도 실제적인 중상모략이 아니라 ‘마음으로 염원한’ 바로 그 심리적 증오가 그들 모두의 죄라는 도스또옙스키의 사건 전개 방식이 서구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다시 보였다. 

   

넷째는 말한다. “왜 제가 살인을 저지른 바로 그 날에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집을 비웠던 거죠?” 참 어이없는 질문이다. 만약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바로 “니가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잡아서 살인을 저지른 걸 왜 남 탓을 하니?”하고 단번에 반박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기가 막힌 타이밍’을 만들어내는데 그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했다고 넷째는 꼬집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이 죄에서, 또 이 사건에서 완전무결한 자냐고. 칼을 들고 아버지의 숨통을 끊은 것은 넷째이지만, 넷째가 칼을 들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보인 증오와 적대감이 있었다. 더 독특한 부분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신의 존재 여부에 따라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될지 토론하는 장면들이다. 『까라마조프』는 연애와 치정극으로 치달아 가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철학적인 질문들을 캐릭터들의 입을 통해 주고받는 사색적인 장면 또한 잊지 않는다. 이 장면들의 제목은 “현명한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흥미롭다”다. 넷째는 둘째 이반 형처럼 현명한 사람과의 철학적 토론에서 지적 경험을 하고 난 뒤 실제로 자신만의 실험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실험이 폐륜적 살인이라는 극단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질문을 더 섬세하게 다듬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죄에 대한 개별적 참여감” 같은 러시아적 정신은 어떤 효과를 안겨다줄까? 결국 기독교 문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원죄의식의 다른 버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죄의 공산주의”같은 카의 해석은 나로 하여금 더 진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죄의식의 무거운 굴레의 범위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더 넓어진 것, 그 이상의 어떤 가능성을 더 발견해 낼 수 있는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일에, 즉 사람의, 세계의, 개개인의 모든 죄에 대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우리 은둔 생활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일에 대하여, 세계의 보편적 죄악뿐 아니라 이 지상의 만인들에 대하여, 각각의 개인들에 대하여 분명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까라마조프』, 상권, 286쪽

   

윗 문장의 한글 번역에서 중요해 보이는 것은 “죄인임을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보편적 죄악 앞에서 누구나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구절의 영역본을 찾아보면 더 넓은 해석의 통로가 열린다. “but that he is responsible to all men for all and everything, for all human sins”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죄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responsible for"이라는 동사구다. 스스로 책임을 떠안기, 이것이야말로 거대하고 세습적인 인류의 죄악에 대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Responsible, 이 단어는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영문판 번역자가 임의로 차용한 단어 역시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논할 때, 서구의 연구자들은 이 Responsibility에 대한 수많은 연구 논문을 쓰며 그를 분석한다. 왜? 왜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기존의 서구 시각으로는 러시아 특유의 서로에 대한 책임감, 공동체적 정신이 상당히 낯설다. 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예 러시아어로 따로 지칭될 정도다. -Sobornost(소보르노스트), 러시아어로 공동체를 뜻하는 이 말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근거한 권위적 집단 정신 혹은 기독교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개인주의, 이 둘과 완전히 구분되는 러시아 정교만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 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유지하며, 공동체 생활의 공동선을 이루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협동 정신을 뜻한다.

   

Responsible은 Respond(응답하다)라는 동사에 -able이라는 접미어가 붙은 것으로 원래 뜻은 “응답할 만한, 응답할 수 있는, 응답해주는”의 뜻을 가지고, 동사구로서는 for과 함께 책임을 지다라는 관용어로 으레 쓰인다. “응답”과 “책임”, 서로 결이 달라 보이는 이 단어들이 어떻게 조합될 수 있었을까? 결국 책임을 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내가 당면한 눈앞의 모든 조건과 사건, 사람에 응답한다는 뜻이 아닐까? Responsibility, 즉 소보르노스트적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쉬운 예가 하나 있다. 바로 예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전 신약, 특히 요한복음을 즐겨 읽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과 죄에 누구보다도 가장 격렬하게 응답했던 사람,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 죽음으로서 기꺼이 응한 사람이 바로 예수이며, 그의 러시아적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복음서는 단연 요한복음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해석하는 죄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내려오는 선천적 원죄보다는 사건에 끊임없이 연결된 당사자로서의 죄로 새롭게 정의된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벌어졌던 모든 일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올 일들까지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지금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 때문이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가 가장 큰 탓이로소이다-고백기도문 중)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능동적인 죄인’임을 자각하는 순간 자기 구원의 길이 열린다. 왜냐? 내가 사건의 원인이 되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됨을 알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인간에게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던져주지만, 삶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었다. 드미뜨리와 이반은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한다. “나는 삶을, 세상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그들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들이 목도한 세상은 쓰러져가는 러시아와 영원한 고통으로 점철된 인류역사였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특징을 가리키는 ‘까라마조프적 습성’은 결국 까라마조프적 힘으로 승화된다. 따라서 러시아적 영성은 악을 품고 태어난 인간이 예수를 만나 죄를 싹 물리치는 변증법적 구원의 과정을 믿지 않는다. 죄는 스스로 예수의 길을 실천할 수 있는, 즉 기꺼이 남의 죄에 응답하는 과정으로서의 죄가 된다. 이걸 알기만 한다면 누구나 예수의 제자가 되고 결국 예수가 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거쳐 비로소 예수가 된다. 



다시 읽는 『까라마조프』

   

왜 러시아 기독교인가?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종교가 왜 그렇게 궁금할까? 우선 엄마가 생각난다. 기독교적 신체 그 자체인 엄마는 언제나 내게 연구대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엄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엄마가 가진 강한 배타성, 그 원천인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나는 정말 궁금했다. 이 궁금증은 확대되어 맥아리 없는 눈빛에 전도를 위한 마음 없는 매너를 장착한 신천지 전도사 사촌 오빠에게 옮겨가고, 이는 대학 시절 무수히 많이 만났던 사이비를 추종하는 내 또래 젊은이들에 대한 단상마저 불러낸다. 결론적으로 난 인간의 믿음이 항상 궁금했다.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궁금증에 다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아니 우리 자체를 이루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만이 아니다. 사건의 인과, 단어의 해석, 형이상학적 물음, 사물을 보는 방식...이 모든 것을 토대로 인간은 나름의 믿음 체계를 구축한 채 물질 세계에 발을 디디며 살아간다. 하여 가장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야말로 가장 훌륭한 안내자다. 카에게서 건네받은 안경을 도구삼아 다시 『까라마조프』 게로 돌아간다. 고일대로 고여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비전과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근대 종교를 『까라마조프』를 통해 만난다. 가장 생생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장착한 채. 교회에서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기독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의 새로운 부흥이나 신자로의 회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에 담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원리를 터득함으로써 교리와 사제에 얽히지 않는 원초적인 마음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내게 있어서 기독교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천국 소망을 꿈꾸며 신을 바라본다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다시 말해 인간 그 자체를 알아보겠다는 의미다. 죄의 인간이 고귀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수천 년을 거쳐 함께 만들어낸 길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성실한 자비심인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직 본 적이 없는 보다 높은 형태의 기독교에 대한 보증일 것이다.”(『도스토옙스키 평전』, E.H.카, 열린책들, 352쪽)


글_오찬영(『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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