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카프카 읽기 - 주체도 목적도 없이, 그리고 ...

올 해 여름의 카프카 읽기

- 주체도 목적도 없이, 그리고...



여름 내내, 가을로 접어든 지금까지, 나는 카프카 속에서 내내 헤매고 있다. 여전히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붙잡으려고 하면 스르륵 빠져나가고, 고개를 들어 보면 엉뚱한 곳에 가서 둥둥 떠 있다. 아예 보이지 않아서 매번 방문을 열어보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지치고, 얼마나 왔는지 살펴보면 고작 열 몇 페이지 남짓인 경우가 많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렇게 저렇게 변화를 겪곤 하는데, 그러던 중에 문득, 어쩌면 이게 진짜, 카프카가 의도한 바대로의 ‘읽기’인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카프카의 작품들을 읽어가다 보면 요제프K나 칼 로스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온갖 고난을 겪고, 결국엔 대개 죽고 마는 혹은 죽을 것 같은 그 주인공들을 통해서 ‘카프카’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을 말하려고나 하는 것일까? 어쩌면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에겐 ‘이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물 유형’에 대한 질문은 대개 소설의 독자가, 읽고 있는 그 소설에 던지기 가장 쉬운 질문이다. 이른바 ‘근대 소설’은 대개 개별적인 어떤 ‘인물’을 통해 시대의 보편성을 드러내고자 하니 말이다. 이를테면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인물, 또는 안나 카레니나 같은 인물, 장 발장과 코제트 같은 인물들, 심지어 어느 선생 집의 고양이 같은 (인)물物들 등등. 그런데 대개 그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근본적으로 ‘표상적’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 ‘인물’은 자신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다. 독자는 ‘인물’로 부터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읽고, 어느 조직의 본성을 읽기도 하며, 인간 존재의 속성을 읽기도 한다. 그것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모델’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인물들의 ‘용광로’다.


그런데 카프카의 ‘인물들’은 어쩐지 그런 식의 모델링을 비켜간다. 그들은 이른바 ‘근대소설’이 (여전히) 신주단지 모시듯하는 인물의 ‘개성’과 ‘자아’에 무관심하다. 『소송』의 K, 『성』의 K, 『실종자』의 카알 로스만 등등 이들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진정한 나’도 없고, ‘남들과 다른 나’도 없다. 차라리 이들의 운동은 개성의 해체, 자아의 분열로 향하는 듯 보인다. 요약하자면 ‘주체의 해체’다. 이 심지어 이 인물들은 시대든, 민중이든, 하다못해 어떤 ‘세대’든, 그 어떤 것도 ‘대변’하지 않는다. 차라리 어떤 장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가까운 거리를 그저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표상’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짐승’에 가까운 느낌이다. 카프카의 작품들에선 오히려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되기’를 한다. 노래하는 쥐, 연구하는 개, 원숭이, 인간 같은 벌레……. 그렇게 짐승 같은 인간들과, 인간 같은 짐승들이 뒤엉키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그게 문제다. 어쩌면 읽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카프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변용’을 유도했던 게 아닐까? 책이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그의 말이 지시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카프카의 작품은 독자의 자리(position)를 없앤다. 거기엔 비평의 자리도, 감상의 자리도 없다. 끊임없이 위치를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자리, 무한한 이동의 자리만 있다. 내면의 바다가 깨진다는 건 바로 그 고정적 질서의 해체다. 애매한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 소설이 발신하는 미묘한 신호에 따라 제 몸, 정서의 리듬을 변조시키는 것, 그게 카프카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그는 제 글을 통해 독자가 마주하는 세계 전체를 낯설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설어져서 의식 전체가 일신하는 사태를 일으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가령 나는 『소송』의 성당 장면에서 신부가 ‘요제프 카!’를 외칠 때, 책상 밑으로 숨어들어가고 싶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어느 때고 국가로부터 ‘호명’될지도 모른다는 ‘군필자’의 공포가 새삼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카프카의 작품들에 도전해 왔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 도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엔 어째서 그렇게 매번 실패만 해왔는지 생각해 보면, 그때는 지금보다 무엇이든 ‘얻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컷 던 것 같다. 그게 의미일 수도 있고, 교훈일 수도 있고, 어떤 모티프일 수도 있는데, 여하간 카프카의 옷자락이라도, 무엇이 되었든 한 손에 꼭 쥐고 싶었던 셈이다. 이제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런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마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카프카를 읽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잘 주파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저 하나의 ‘변조기’로서, 작품이 발신하는 ‘천 개’의 신호에 따라 나를 지속적으로 변조해 낼 것이다. 잠깐 뿐이라도 그렇다. 거기엔 명시적인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건 표제하나 없는 절대음악처럼, 그저 변용을 유도하는 신호들로 가득 찬 발신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매번 다른 신호를 발신하는, 매번 변조기를 재구성하는, 매번 이전에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는. '매번 떠나고 또 떠나는 자유를' 누리는.


"펜과 함께 우리는 '그 글'을 썼던 자신을 매번 떠나고 또 떠나는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주의하자. 심지어 괴테라도 펜을 놓는 순간 자기가 썼던 것에 갇힌다. 글이 내 존재를 가둔 벽이지만 또 다른 한계로 나를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은 오직 쓸 때 뿐이다. 오직 쓰고 있을 때에만 그 문은 다음 문을 부르면서 계속 열려간다. 끝도 없이.

- 오선민, 『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 북드라망,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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