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까라마조프, 러시아의 길을 보여주다

까라마조프, 러시아의 길을 보여주다



“이게 바로 러시아야!”

  

‘러시아’하면 지울 수 없는 대사가 하나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노어노문학과 전공의 어린 친구를 만났었다. 그 친구는 러시아를 비롯해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고,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녀가 러시아에서 유학 중이었을 때는 바야흐로 소치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2014년이었다. 은퇴 경기를 치르던 김연아 선수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을 뺏기고 온 나라가 울분을 터뜨렸던 바로 그 올림픽 말이다. 경기를 보다가 화가 난 친구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러시아인 친구에게 대담하게 소리쳤다. “이건 불공평해! 어떻게 김연아가 은메달일 수가 있어?” 그 러시아인 친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고 한다. “이게 바로 러시아야.” 




러시아에서 유학하다보면 겪는 온갖 사건들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게 “이게 바로 러시아야.”라는 말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그 말이 신기했다. 도대체 저 담담한 자신감은 뭘까? 러시아 국민들이 입버릇처럼 말한다는 저 ‘러시아’라는 단어에는 결코 설명 되지 않는 모순과 비합리성, 비논리성과 불평등을 함축하는 뉘앙스를 다 우겨넣은 것 같았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이 ‘러시아’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모든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에 더해, 러시아적 삶까지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읽다 보면 내 귓전에 대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 같다. “봐라! 이게 바로 러시아다!”라고. ‘러알못(러시아를 잘 알지 못하는)’인 나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고 어안이 벙벙하다. 뭐 어쩌라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눈물겹게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인이 많고 많은 소설 중에 굳이 러시아적 위대함을 강조하는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무엇보다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한 세대 거친 후의 21세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강하게 구분 짓는 이런 인식이야말로 너무나 촌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거기에 일요일 예배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장황한 종교적 장광설까지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지식인들에게 종종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노자 교수가 쓴 기고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약점이랄까,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혼선을 전부 조목조목 짚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때부터 정반대 길을 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애써 부정하고 오히려 반사회주의운동의 선봉에 서는 특별한 ‘충성’을 보인다. 특히 1870년대 후반에 그는 ‘빨갱이 딱지를 떼기’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일제 시대의 많은 전향자들처럼 정교회 신앙과 관제 민족주의로 돌아온 전향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어용적 이념의 강조와 선포에 남다른 공을 들인다. ‘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과 암’, 박노자, 한겨레21, 2002년 08월 13일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우리 사회의 차별과 폭력에 과감한 도전장을 내미는 지식인인 박노자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극우 성향에 기독교가 짬뽕된 어용 민족주의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이라는 광산에 러시아와 도스토예프스키, 기독교라는 짐을 이고지고 진입하는 나의 마음은 무척 무겁다. 연장은 많은데 전부 다 날카롭고 세심하게 다뤄야 할 것들 투성이라서 그렇다. 민족주의, 보수, 애국자, 기독교, 이 모든 것을 합쳐놨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존재는 마치 지금 광화문에서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바로 그 노인 집단의 이미지와 정확히 겹친다. 그 뿐인가? 코로나 사태로 기독교가 사회적 혐오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종교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거기에 러시아를 알려면 러시아 혁명, 즉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까지도 들춰봐야 한다. 모든 것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섬세하고 날카로운 작업을 요하는 소재들이다. 자칫하면 바로 사람들이 정해둔 편견이라는 경계선의 안 쪽으로 훅 떨어져버릴 테니까. 혁명과 진보에 좀 더 마음을 둘 수밖에 없는 청년으로서 가장 구닥다리 같은 단어들, ‘보수’나 ‘기독교’같은 것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긴긴 소설을 통해 굳이 존재적인 물적 증거를 세상에 남긴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할배할매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따라서 아주 섬세하게 사이의 길을 내보려 한다. 어쩌면 내 예상보다 더 많은 샛길을 돌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방정교, 러시아의 공통감각


똘스또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러한 민족 정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러시아인의 자신감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으며,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데서 오고 있다.” 『러시아 정교』, 석영중, 고려대출판, 61쪽




한 마디로 러시아인들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불변하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확신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것은 러시아의 대지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가장 오래된 교훈이다.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를 지리적으로 비교해보면, 미국이 얼마나 지리적 ‘금수저’인지, 러시아는 ‘흙수저’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은 광대한 국토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차게 잘 운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선진국이다. 그들의 지리적 이점은 우선 날씨가 온화한 위도 12도 아래에 위치하여 농사를 짓기 쉽다는 데 있다.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도 그들은 수억의 자국민들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기에 식량의 대외의존도가 상당히 낮다. 거기에 캐나다와의 사이에는 빽빽한 산림이, 멕시코와는 거대한 사막과 높은 고원이 훌륭한 자연적 국경을 형성해준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유럽과 아시아로부터 미국을 완벽히 분리해주며 국경선을 정해준다. 러시아는 반대다. 길게 늘어선 국토는 위도 12도 위쪽에 위치해 있다. 농사 짓기가 어렵고 강이 거의 없어 내륙 운송은 오로지 육로가 전부다. 미국이 수많은 강들을 타고 다니며 상품들을 거미줄처럼 구석구석 곳곳에 나르는 동안 러시아는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느라 시간과 인력을 전부 투자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시베리아와 북극은 하필 대륙의 안쪽에 몰려있고, 정작 유럽의 13개 국가와 국경을 바로 맞대고 있는 지역은 전부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다. 한 마디로 끊임없는 영토 분쟁과 전쟁, 약탈과 침입이 너무나 쉬운 조건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야만스러운 나라에 속한다. 영토는 너무나 척박하고 살기 어려운데다 전쟁이 잦고, 중앙집권 국가가 출범하기가 어려운 조건이기에 13세기 본격적인 러시아의 기반이 만들어지기까지 볼가 강 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공국들이 난립해있었다. 그 유명한 이반 4세(이반 뇌제)가 러시아 제국을 출현시키기까지, 러시아는 그야말로 사분오열의 조그만 국가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하루하루 먹고 살며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봉합하기에도 바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리적 조건 역시 유럽과 떨어져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어떤 문명이 발달하려면 유럽의 르네상스 부흥기나 중국의 한나라 시절처럼 노동을 하지 않고 사상을 탐색하고 연구할 지식 계층이 충분히 형성되어야 한다. 러시아는 그러기에 너무 척박한 땅이었다. 당시 유럽 지식의 필수 요소인 라틴 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러시아는 사실 모든 방면에서 유럽의 지진아라 불릴 만 했다. 16세기 유럽에서 한창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었을 때도 러시아는 늦었다. 러시아의 속도는 늘 유럽보다 느렸고, 그들은 유럽을 따라가려고 허둥지둥 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없는 인간의 무리는 존속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개인주의와 주체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사람이 모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공통감각이 생성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러시아가 10세기 이후 재창조한 집단적 공통감각은 바로 종교였다. 그들은 유럽으로부터 복잡한 사상이나 철학을 도입한 게 아니었다. 러시아로 하여금 생생한 활력과 유구한 전통,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철학의 역할까지 모두 감당한 것은 바로 종교, 특히 그리스 정교였다. 러시아를 이야기할 때 이 단어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사회, 철학, 예술 모든 것이 러시아 종교와 완전히 일체화되어서 함께 가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 철학이 되다

  

이런 역사적 맥락 위에서 보면 신과 종교가 작품의 유일한 화두인 것 같아 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이해가 간다. 사실 러시아의 모든 소설들이 이 문제를 빼놓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유럽이나 미국의 소설들보다 더 노골적이고 더 직접적이며, 심지어 어떤 집착까지도 보인다. 소설의 묘사나 배경, 관용어나 맥락에서 기독교적 문명의 흔적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소설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것이 신과 종교인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신이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진부한 문제를 빼놓으면 섭섭하기라도 하다는 듯 가열차게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결투를 한다. 혹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지루한 기독교 소설’이라고 폄하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다. 그렇지만 러시아에게 있어서 러시아 정교는 곧 그들의 사상이자 철학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파일 것이 분명한 기독교는 러시아에서는 기본 전제 자체가 된다. 대화, 사상, 철학, 토론, 신념, 역사, 예술... 모든 것의 전제 말이다. 이것은 우파와 좌파라는 언어적 대칭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러시아’가 출발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맥락을 모르면 러시아 소설은 보수가 되고 종교 이야기에 그쳐버린다.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도 이런 종교적 논쟁은 빠지지 않는다. 소설은 표도르 일가를 소개하면서 시작되는데, 처음 나오는 에피소드가 세 아들 드미뜨리와 이반, 알료샤가 아버지 표도르의 집으로 돌아오고 수도원에서 모이는 장면이다. 그 외에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꼬냑을 마시면서, 모두가 응접실에 모여 아주 신심 깊은 토론을 전개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어쨌든 말해 봐라. 신은 존재하는 거냐, 아니냐? 진지하게 말이다! 나한테는 지금 진지한 게 필요하니까.” “아니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료쉬까, 신은 존재하는 거니?” “신은 존재합니다.” “이반, 불멸은 존재하는 거니?” “불멸도 존재하지 않아요.”(...) “알료쉬까, 불멸은 존재하는 거니?” “존재합니다.” 237쪽,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러시아 문학 강의를 요즘 열심히 듣는 중인데, 강사는 모스끄바 유학 시절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서점 직원과 고객이 책에 대해 짧은 토론을 나눌 수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줬다. 러시아를 전혀 방문해본 적이 없어서 진의 여부를 따지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소설 속에서는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활발한 토론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인물들의 말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가는 소설적 기법이다. 그의 소설에는 당시 유명한 사상가들이나 동료 작가들이 이름만 바꾼 채 등장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도스토예프스키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작가들 대부분이 그런 식의 패러디를 즐겨했다. <죄와 벌>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비꼬는 장면이 들어있기도 하고, <악령>에서는 소설가 뚜르게네프를 풍자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의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었다. 아, 이 캐릭터는 이 작가를 모방한 것이로군,하고 말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_ 톨스토이(좌)와 도스토예프스키(우)


물론 아주 사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톨스토이를 비꼰 이유는 그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보다 더 높은 원고료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빈정 상했기 때문이고, 뚜르게네프 같은 경우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이 서로의 사상을 논박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장이 바로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었다는 점이다. 주기적으로 발간되던 잡지나 신문은 물론이고, 이렇게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세계에 상대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충돌시키면서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스스로 창조하고 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문학은 현실세계를 대변하는 거울인 동시에 이론과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사상이 완전히 육화(肉化)되는 현장성 그 자체다. 그래서 러시아는 러시아의 철학이 따로 없다. 독일은 헤겔과 같은 독일의 철학과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문학의 영역이 다르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마찬가지다. 러시아만큼은 다르다. 러시아의 문학은 곧 철학이다. 사상이 탄생하고 논의되며 실제로 피와 살을 입고 현실성을 띠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그들의 소설 속에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한국 기독교와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기독교를 이해하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종교 중 하나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서 작동하는 기독교다. 

   

다른 종교도 아니고 왜 하필 기독교가 러시아에서 완벽한 토착화를 이루었을까?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훨씬 전부터, 러시아인들의 정신 속에는 ‘공동체 정신-소보르노스트(Sobornost)'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전쟁과 궁핍한 삶에 시달렸던 러시아 사람들은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타인과의 협업과 관계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따라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도 나의 부모님이나 아들딸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정신이 아주 중요했다. 예수의 보혈로 누구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기독교 신약의 공동체 의식이 러시아적 감성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민족적인 열등감도 작용했다. 왜 러시아는 유럽의 발뒤꿈치를 따라가기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유럽보다 그들이 더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유럽보다 더 진지하고 세심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였다. 마침내 ’모스끄바야말로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을 잇는 제 3의 로마‘라는 주장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아마 19세기 슬라브주의자들의 사상적 원형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모스끄바-제 3의 로마이론은 모스끄바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향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지속되어 왔다. 그것은 군주들에게는 무력 외교와 폭정을 합리화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으며, 민중들에게는 선민사상을 심어주었다. <러시아 정교>, 81쪽” 이는 왜 유독 러시아가 이렇게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해야하는지에 대한 해명도 될 수 있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이런 불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런 흐름 속에서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의 정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게 된다. 



세상을 구원할 러시아적 아름다움

   

러시아의 야사에서는 기독교가 최초로 전파된 경위에 대해 흥미로운 일화를 말해준다. 10세기 말,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블라디미르 공후가 작은 소국에 불과한 러시아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선진 유럽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카톨릭, 이슬람, 기독교 등의 성격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사신들을 파견한다. 이슬람은 술을 금지하기 때문에, 보드카에 죽고 못 사는 러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결코 맞지 않았고, 카톨릭은 교리가 너무나 어려웠다. 마침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던 사신이 돌아와 공후에게 보고를 한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와 신비로운 성가, 엄숙하고 섬세한 그리스 정교의 예식에 완전히 매혹된 채 말이다. 결국 비잔티움의 기독교인 동방 정교가 토착화된 것은 러시아적 감성을 가장 잘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일 풍부하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리와 문자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것이야말로 러시아인들의 미적 감각이자 최고로 좋은 선, 가치 판단의 기준, 그리고 진리이기도 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주장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아포리즘은 가장 러시아적인 가치의 정수를 담고 있는 셈이다.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내게 있어서 이 형용사는 “예쁘다”거나 “잘생겼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정의된다. 김태희와 전지현은 정말 아름답다. 그들은 정말로 잘 빚어진 예술작품처럼 느껴지니까. 러시아인들의 아름다움 역시 외적인 요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 철저한 미의식은 러시아의 건축물에 그대로 반영된다. 비비드한 원형의 색색을 그대로 담고 있는 러시아의 여러 건축물들을 떠올려보면 쉽다. 하나님과 성인들은 ‘이콘’이라는 러시아 특유의 성상화로 전부 묘사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의인화된 형태를 가진 형상물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러시아에서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남녀주인공들은 일관되게 미남미녀들이다. 얼굴도 끝내주게 예쁘고 잘생겼는데 언변과 두뇌마저 뛰어난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니 얼핏 위화감이 들 정도다. 물론 미의식이 단순히 용모와 외면적인 부분에만 집중되지는 않는다. 이 미의식은 러시아식의 가치 판단 기준이다. ‘옳은가? 그른가?’가 아닌, ‘아름다운가? 추한가?’에 대한 검증만이 그들에게 있어서 철학이 성립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란다! 무서운 것이지, 아름다움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고 결코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이 던진 유일한 수수께끼이니까. 거기에는 양극단이 맞물려서 온갖 모순이 공존하고 있단 말이야.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도스또예프스키, 열린책들, 191쪽

   

도스토예프스키나 러시아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늘 생각해온 아름다움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목구비의 완벽한 비율이나 희고 깨끗한 피부 같은 완전함과 순결함으로서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차원이다. 첫째 아들 드미뜨리의 명대사는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카오스적이고 혼돈스러운 모든 종류의 모순과 아이러니에 아름다움이 내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모순적인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과 모순,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천재적인 사람이 없다. 니체가 그를 가리켜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칭송했다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왜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캐릭터들은 입체적이라는 표현만으로 부족할 만큼 하나같이 모순적이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살인자와 성자, 창녀와 성녀, 백치와 천재, 극단적인 이성과 격렬한 감성, 이 모든 상반되는 지점들이 캐릭터들 하나하나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하고, 이 대비들이 그들을 무척 ‘인간스럽게’, 그리고 생생하게 꾸며준다. 분명 신을 열렬히 추종하는 광신도인데, 정작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믿을 겁니다’라는 애매모호한 대사를 내뱉는 캐릭터도 있다. 철저한 무신론자라서 신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까지 택하는 양반이 오히려 종교인들보다 더 세상과 인류를 따뜻한 시선과 사랑으로 품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만이 해낼 수 있는 세밀한 장면들 속에서 하나하나 확대되는 모순들을 보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에피소드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인 셋째 알료샤는 바람 잘 날 없는 가족들 때문에 지난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침상에 들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여기서 현명한 사람이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통찰력을 지닌 이다. 인간적 모순의 진폭은 너무나도 광활해서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다. 인간이 무엇인지, 그 인간을 추동하는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최후까지 표현되기 어려운 혼란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은 이 모순의 면면과 성질을 알고 그대로 포옹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자다. 알료샤는 ‘좀 더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거나 ‘좀 더 단호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하지 않았다. 단순히 착함이라는 덕목이나 굳건한 결심만으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해 아는 앎, ‘현명함’이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이 현명함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알아챌 수 있는 지혜와 함께 극단적 모순을 통해서 발산되는 인간적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미의식이다. 여기서 나와 다른 남에 대한 이해와 자비심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 없으며, 이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있게 되면, 그의 개성은 바로 나의 자존심을 짓누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하루만 지나면 나는 그를 증오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식사 시간에 너무 오래 먹는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은 감기에 걸려 계속 코를 풀어 댄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단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나는 사람들의 적이 되고 만다. 105쪽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명의 전제는 ‘인간이란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무척 어려운, 못돼먹은 존재’임을 상정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책 속에서 조시마 장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토록 지겹게 사랑과 자비심에 대해 설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개성이 바로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말은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절절한 깨달음이다. 이렇게 신심 깊은 노장로조차도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한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려면 신을 통해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이 조시마 장로다. 그의 설교와 별개의 플롯으로 전개되는 까라마조프네 일가의 갈등과 폭력, 서로가 엮고 엮이는 연애담과 싸움은 왜 우리가 인간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할 수 있으면서 죽도록 사랑할 수도 있다. 열렬한 신자이면서 또 가장 냉정한 무신론자일 수도 있다. 위대한 사랑을 말하면서 끔찍한 독재와 오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은 결코 하나의 언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내적 갈등과 싸움으로 엎치락뒤치락한다. 이 거대한 싸움이 점점 더 커질수록, 그래서 인간이 더욱 고뇌하고 번민할수록 현명해질 수 있다. 그리고 현명해진다는 것은 관계의 의무,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역시 비례하여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캐릭터들이 러시아적 아름다움을 향해 지성과 영성을 총동원하여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소설을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그려가는 소설’이라고 자평했던 이유다. 

   

이번에 착수한 것은 내가 이 작업에 필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 장편의 주요 사상은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 아름다운 것은 이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건 문명화된 유럽 사람이건 아직도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단다. 이 세상에 완전히 아름다운 사람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니 이 헤아릴 수 없고 아름다운 인물의 출현은 말할 것도 없이 영원한 기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조카딸에게 보낸 서한」

   

러시아어에서 ‘아름답다’를 의미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끄라시비красивый’이고, 다른 하나는 ‘쁘레끄라스니прекрасный’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언급하는 ‘아름다운 인간’은 후자다. 전자는 주로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가리키고, 후자는 내외면의 아름다움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으로,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서 ‘우수한’, ‘일류의’ 뜻이라는 최고 강도의 의미까지 가져온다. 우리는 보통 공자와 맹자를 말할 때 “아름다운 사람, 공자”라던가 “맹자는 지구상의 모든 미를 충족하는 인간”이라는 찬사를 쓰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인’을 주장한 사람, 성선설을 말하며 휴머니즘을 말한 사람, 이런 식으로 주요 사상에 대해 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는 예수님이나 지역의 성자로 봉해진 위대한 사람들이 곧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남의 죄, 타인의 업보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자들, 즉 궁극의 인간 이해를 터득하고 실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러시아적 미(美)는 세상을 구원한다.  


글_오찬영(『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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