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인문-고전 공부의 길 - 왜 ‘세미나’인가?

인문-고전 공부의 길

왜 ‘세미나’인가?



하루하루가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세미나를 하면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바뀝니다. 보통 세미나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입니다. 그러면 세미나 모임이 없는 날은 세미나와 상관없이 사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미나 모임에서 할 말을 만들어 놓으려면 주중에 책을 읽어 놓아야 하고, 혹시라도 발제를 맡았다면 발제문 쓸 준비도 하면서 텍스트도 읽어야 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가정했을 때, 주어진 일주일의 시간은 결코 넉넉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정해진 분량을 어떻게든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텍스트가 조금 하드코어한 편이라면 정해진 분량을 읽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릴 정도입니다. ‘세미나’를 한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를 정해 놓고 표지를 세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주일 중의 다른 날에는 그 표지를 향해서 걷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걷다보면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어떤 상태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루를 엉성하게 살았다는 후회가 없는 상태, 내가 나 스스로를 잘 돌보면서 살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상태, 애써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을 잘하는 데서 오는 자부심을 느끼는 상태 등등. 그런 상태들이 자주 반복되고, 오래 지속되면 ‘나’라고 하는 사람이 바뀝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인생이 바뀝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고, 자주 하는 일이 책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애써 시간을 만들어서 하는 일이 ‘공부’가 되는 삶이 됩니다. 




물론, 그렇게 ‘표지를 향해 걷기’를 반복하면서 살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공부를 왜 하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붙들고 또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부하는 삶’ 속에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왜 하는가’ 하는 질문을 두고 생각해 보았더니,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그 때 중단하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세상에 인문 고전 공부 맛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인문 고전 세미나를 지속해 간다면, 쌓여가는 책들 덕에 책상은 어지러울지 몰라도 ‘일상’은 단순하게 정리됩니다. 주로 관심을 두는 것이 바뀌고, 주로 만나는 사람이 바뀌고,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달라지는 것 말고 무엇이 더 바뀌어야 ‘인생’이 바뀌는 걸까요? 저는 다른 예를 알지 못합니다.



‘읽기’의 밀도가 높아진다


혼자서 책을 읽다보면 말 그대로 책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일상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아실 겁니다. 인간의 감각은 지속적인 노출에 따라 무뎌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괜찮은 정도의 문장들만으로도 큰 감동이나 의식의 환기가 일어나지만,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웬만큼 파격적인 문장이 아니고서는 마음이 잘 움직이질 않게 됩니다. 바로 그때, 독서의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지치는 순간이지요. 물론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해간다고 해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예 읽는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세미나’에서 형성되는 인간관계 자체에 회의감이 들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생각해 봅시다, 그 정도 ‘위험’은 언제나, 무슨 일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던지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어간다면 ‘권태기’가 훨씬 드물게 찾아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이란 비슷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저마다 생각하고 느끼고 보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읽으며 미적지근한 느낌을 받았던 문장이라도 내 앞의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미나 시간에 모여있을 때 그 사람이 자신이 느낀 흥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내게 와서 죽었던 문장이 다시 부활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흥분’에 감염된 나의 무의식은 내가 읽었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배치합니다. 그건 텍스트의 의미가 다시 태어나는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습니다. 근사한 일이지요.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어가다 보면 혼자서 ‘독서’를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읽기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내용도 더 풍부해지고, 거기에 반응하는 내 감각도 더욱 예민해지고요. 물론 세미나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때의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세미나를 하지 않으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세미나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쌓이다보면 ‘읽기’를 대하는 내 태도가 점점 달라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텍스트와 더 강렬하게 감응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읽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함께 읽어가는 동료들에게 내가 발견한 것들을 더욱 잘 전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게 되고요. 이런 ‘읽기’는 오직 함께 읽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건 혼자서는 다다를 수 없는 강도로까지 읽는 이를 밀어 올리는 읽기입니다. 



어떻게든, 끝까지 간다


물론, 모든 텍스트를 그렇게 높은 밀도로 읽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읽는 것도 버거운 텍스트들이 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펼치는 모든 책이 그럴 수도 있고요. 문제는 경험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똑같은 수준으로 어려운 책을 만나더라도 그 책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알게 됩니다. 이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순간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미나를 한다고 할 때 가장 실질적으로 좋은 점이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약속은 어떤 약속일까요? 바로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얼마나 연약한지 약속한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도 깨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약속을 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깨질 수도 있지요. 이를테면 닭다리를 뜯으며 하는 ‘아 진짜 다이어트 할거야’ 같은 약속 말입니다. 그런데 ‘약속’은 속성상 그 약속에 참여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늘어날수록 튼튼해집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입니다. 약속을 어기더라도 티가 잘 나지 않는 정도로 수가 늘어나면 이 역시 깨지기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법’이 그렇지요. 어쨌든, 세미나를 하면 나 혼자 읽기에 벅찰 정도로 어려운 텍스트라도 꾸역꾸역 읽어갈 수 있습니다. 세미나 동료들과 한 약속이 있으니까요. 그 약속을 어기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단 그 이유 때문만 일까요? 정해진 분량을 다 읽어가지 않으면 창피해서, 세미나 진행자가 뭐라고 하니까, 아니면 약속된 벌칙이 있어서, 꾸역꾸역 다 읽어가는 것일까요. 그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상이 정돈되는 느낌’, ‘읽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기분’처럼 긍정적인 상태를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도 ‘꾸역꾸역 읽기’를 지속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친구’를 잃기 싫은 마음도 큰 역할을 합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다


‘친구’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입니다(영화 <친구>에도 나오지요). 그래서 ‘친구’라고 하면 어릴 때부터 친해서 언제든 서로의 흉금을 터놓아도 마음이 편하고, 어쩌다 한 번씩 만나지만 만날 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만난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도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여러 ‘이익’에 엮인 몸이 되면 이른바 ‘순수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생긴 고정관념일 겁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어른’의 조건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미나’를 통해서 만나는 ‘친구’는 정말 특별합니다. 드물기 때문에 ‘특별’한 것도 있지만, 이 관계가 보통 생각하는 ‘친구’나 ‘연인’, ‘직장동료’ 같은 관계들과도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학교 친구’하고도 다릅니다. 


세미나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의 목표가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공부’를 함께 한다는 목표입니다. 이 관계는 묘합니다. 물론 ‘인간관계’를 넓히려고 독서토론 모임이나 세미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세미나의 목표는 역시 ‘공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 내 삶에 무언가 변화를 가져다 줄 ‘앎’을 찾겠다는 열망 없이 그저 사람 하나 더 사귀려고 세미나에 참여한다면 오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으로는 애써 책을 읽고 발제문을 쓰는 노력이 ‘손해’로 느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한 두 번씩 결석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매번 나온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오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가장 괴롭겠지요. 물론 그런 계기로 ‘공부’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공부’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만난 사람들이니만큼 이후의 관계도 ‘공부’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테면 ‘다음엔 무슨 책을 읽을까?’로 관계의 행로가 이어지는 식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흔한 ‘진정한 친구’ 관계처럼 술마시고 하는 주정처럼 ‘내가 요즘 너무 힘들어’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텍스트의 내용을 두고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요즘 상태, 과거사를 이야기 합니다. 자기 자신의 서사도 ‘공부’라는 틀 안에서 발화하는 것이지요. 세미나를 함께 오래 지속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발언들을 들으면서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여갑니다. 그 속에서 물론 애정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 애정의 성질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비교적 깔끔합니다. 그러니까 막연하게 서로의 ‘힘듦’을 호소하는 관계에 비해서 소모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관계가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관계 나름의 미덕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공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네트워크는 그런 ‘끈적한’ 관계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공부’를 하는 이상 어느 때고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지요. 물론 그 속에서 ‘진정한 친구’와 같은 관계로 이행해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관계 자체가 박살나버릴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건 어느 관계나 가지고 있는 위험입니다. 그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함께 공부하는 관계를 계속 증식하면 됩니다. 세상에, 언제든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온 사람’에게도 쉽게 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관계의 시작에 ‘공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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