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문탁네트워크에서 진행 중인 <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 강의의 후기로 작성된 글입니다. (강의소개바로가기)
칸트,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
칸트는 저에게 늘 이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텍스트들을 보고 있자면, ‘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사유할 수 있지?! 리스펙!!’과 같은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연역> 부분은 그 치밀함에 있어서 역사상의 그 어떤 텍스트보다 ‘꼼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잖아요? 꼼꼼한데 재미까지 있는거 진짜 어렵잖아요? 네, 칸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핵노잼’의 핵심에는 ‘형이상학’의 부재(?)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리형이상학’(의 정초)가 있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처럼, 헤겔처럼 이 우주의 진상의 슉슉 그려가는 ‘멋짐’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는 ‘아니야. 형이상학 아니야. 그거 그냥 가상이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윤리학’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매사에 ‘제약적’인 듯 보입니다.(판단력 비판에서는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러고선 자신은 ‘학을 튼튼한 토대 위에 놓기 위해’ ‘이성의 능력을 비판critique’하는 작업을 하겠다고 하고,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 무엇을 해도 좋은가(실천이성),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끼는가(판단력)’를 묻는 책, 각 세 권을 씁니다. 진정 덕력 높은 덕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비판’일 뿐 아직 진짜 ‘학’은 시작도 안 했다고도 합니다. 여전히 생각해보면 대단하기는 하지만, 조금 갑갑합니다. 저는 성향상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앞의 땅이 진흙탕인지, 포장도로인지, 아니면 내가 발로 나아갈 수 있는지, 기어서 갈 수밖에 없는지 그런 걸 따지는 걸 선호하지 않습니다. 음... 저도 따져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많이 막 따지지는 않습니다. 일단 가보면 무슨 땅인지, 내 몸뚱이가 어떤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요. 칸트에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칸트의 사고방식 전반에 걸쳐 있는 그 ‘꼼꼼함’이 저를 가끔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만들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식’의 매커니즘을 설명할 때에도 그는 프로세스 전체를 꼼꼼하게 분석합니다. ‘주체 밖에 현상계가 있다. 우리에겐 현상계를 지각하는 감관이 있다. 감관을 통해 ‘현상’이 지각된다. 지각된 ‘현상’을 오성이 ‘범주’로 판별한다. 그러면 우리가 인식한 것은 ‘사물’인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의 ‘현상’만 인식했을 뿐이다. 사물 그 자체(물자체, Ding an sich)는 인식할 수 없다.’ 아, 진정 대단하고, 진정 꼼꼼하며, 진정 ‘사물 자체’로 확 달려들고 싶어집니다.
예전부터 저는 칸트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실천이성비판』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아마 칸트의 철학이 처음 시작된 곳도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생각했고요. 물론 이건 제 뇌피셜이기는 합니다. 뇌피셜이기는 합니다만, 어떤 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가 철학하게끔 하는 동기는 ‘사변’ 그 자체에 있기 보다 ‘현실 세계의 문제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상식이 무너지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다른 이득을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능력들에 대한 비판까지 갔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이후에 칸트가 구축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의 체계가 ‘윤리형이상학’이었다는 걸 보면 꽤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그 사유의 전제들(이성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실천이성비판』을 읽으면 이 극도로 보수적인 윤리관,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끔 행동하라’는 명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칸트의 윤리철학이 ‘상식을 잘 지켜라’는 통설에 대한 철학적 버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그렇게 보자면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메시지는 ‘겸손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칸트의 철학이 ‘겸손과 상식’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의 종교(경건주의 기독교)와 꽤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뇌피셜도 있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 한편으로 제 머릿 속에 떠올랐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권리 대 권리라는 이율배반이 발생하는데, 이들 두 권리는 똑같이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는 것들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짓는다.
― 칼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길, 334쪽
맑스의 유명한 문장이지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더 옳은 것’을 원리적으로 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유에 있어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니체, 맑스, 프로이트 이전 사유에서는 ‘더 옳은 것’을 원리적인 수준에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힘, 충동, 조건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 윤리의 ‘법칙’ 이런 거 없다는 것이죠. 어제 이수영샘께서 ‘인식과 윤리가 일치할 때 대량학살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맑스’와 ‘니체’가 실제로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정말 묘하게도 실제 그 사상의 내용과는 별개로 ‘맑스주의 윤리’가 있었고, ‘니체의 윤리’, ‘프로이트의 윤리’가 역사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보자면 문화대혁명, 나치즘, 68혁명기 몇몇 소집단 내에서 일어났던 성적 문제들 같은 것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상의 실제 내용’과 그 사태들은 ‘내용상의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수용형식이 문제가 되었었죠. 그렇다면 그 수용형식 상의 문제는 왜 일어났을까? 저는 바로 거기에 결여되었던 게 ‘겸손과 상식’이 아니었을까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를 마냥 ‘갱유’해버릴 수 없듯이 칸트도 마냥 없애버릴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조금 답답하고, 보수적이고, 요즘말로는 ‘꼰대’스럽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칸트는 지난 20년, 또는 10년 전에 비해 더 중요한 철학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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