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공부, ‘이해’보다 중요한 ‘통과’에 대하여
‘이해’한다는 것
‘이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함께 있습니다.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한다는 뜻과 ‘깨달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의미 모두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할 ‘대상’, ‘깨달아 알아들을 대상’이 있는 것이지요. 이 말은 곧, 그 ‘대상’의 내용을 재현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책을 읽었다고 한다면 읽은 내용을 스스로에게 재현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이해’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공부’란 대개 그런 것이었습니다. 배운 내용을 얼마나 잘 재현해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이해’ 개념이 가진 문제점과 어쩌면 그러한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는 참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와 같은 재현적인 이해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읽은 내용을 고스란히 재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텍스트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이른바 ‘창의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숙련’와 결부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판’(critic)이란, 텍스트의 어디에 무엇이 있고, 그 이야기가 어떤 맥락 속에서 나왔으며, 화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꿰고 있는 가운데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의성’이라는 것이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이라면, ‘비판’은 바로 그러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출발점인 셈입니다. 알지 못하는 상태, 그러니까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하지 못하면 ‘새로운 어떤 것’도 만들지 못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해’는 공부의 첫 번째 목표이자, 창조의 출발점임에 분명합니다. ‘공부’를 한다는 건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것’과 ‘매몰되는 것’의 차이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이해’ 속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와 ‘이해에 집착하여 매몰된다’는 개념적으로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를 낳습니다. 무엇보다 ‘이해’하는 것에 매몰되면 ‘정답’이라는 가상을 쫓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인문학’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역사상의 위대한 철학자나, 그걸 읽고 있는 자기 자신이나 위계적인 차이도 없습니다. 모두가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진리’를 쫓는 ‘학인’이고 ‘해석자’일 따름이니까요. 그런데 ‘이해’하는 일에 집착하는 순간 위계가 생기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누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꼭 맞는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찾아내 외우려고 합니다. ‘누구누구의 윤리관 : 선/악은 상대적’ 이런 식의 요점 정리 노트를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요점’이 ‘정답’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요점’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의 서로 다른 성질의 ‘요점 정리’가 무수히 많을 수도 있고요. 말하자면 이건 해석의 문제인 셈입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똑같이 ‘요점’을 정리해서 외운다고 하더라도 늘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둡니다. 왜냐하면 이건 사람 간의 ‘대화’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정을 가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씁니다. ‘지금 쟤가 한 말이 이 뜻인가? 아니면 다른 뜻인가?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 뜻인 것 같은데’ 하는 식으로 그 말을 듣는 것처럼, 인문 고전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이 뜻인지 저 뜻인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타당한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가장 타당하지는 않지만 가장 참신한 가능성은 무엇인지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고 낯선 텍스트를 처음 마주하면서 그렇게 읽어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글자를 쫓는 데에만 급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읽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알 것도 같은 문장에 멈췄을 때, 말씀드린 것과 같은 여러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인문학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더 높은 설득력을 가진 해석이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경우에 딱 맞는 해석, 틀릴 가능성이 없는 해석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서, 텍스트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는데, ‘읽기’란, ‘세미나’란, ‘공부’란 바로 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세미나를 하다보면, 마치 참고서를 읽듯 텍스트를 읽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텍스트를 읽는 것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텍스트의 생명력을 제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권위 있는 해석일지라도 결국은 ‘잠정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조금 마음을 놓고, 읽어 가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통과’가 더 중요할지도
큰 산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두 달 정도 매주 한 번씩 그 산의 정상을 오른다고 하다면 대략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그 산의 정상에 오른 셈이 됩니다. 그것으로 그 산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산’은 계절에 따라 다르고, 오르는 길에 따라 다르고, 날씨에 따라 다릅니다. 인문 고전 텍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 몇 번, 세미나 몇 번에 그 책을 ‘안다’고 말하는 건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그 책을 ‘이해’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잠정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읽은 만큼, 내가 그에 대해 알려고 한 만큼, 딱 거기까지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인문 고전 텍스트들은 한 사람의 평생을 걸어도 될 만큼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온지 수천 년이 지난 텍스트들이 여전히 ‘연구’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그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수 천년 동안 더 연구되면 그 책들이 가진 잠재성이 모두 펼쳐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 가면 더 이상 연구되지 않는 책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시점에 가면 다시금 활발하게 연구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책이 가진 잠재성이란 다 파먹고 나면 끝나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 내게 경험되는 ‘산’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생의 어느 시점에 그 책을 만나는지, 심지어 그날 아침에 무엇을 먹고 만나는지에 따라 다른 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책을 단번에 읽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만족할만한 ‘이해’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어떤 책을 두고 공부를 할 때는 그 책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를테면 ‘통과’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고생해가며 붙들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많아지고, 그 문장들과 내가 작용하는 경험들이 쌓여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문장이 문득 설거지를 하다가 이해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말하자면, ‘공부’는 내 인생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 자신과 함께 공진화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계기에, 어떤 식으로 이해되고 작용할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번 새롭게 주사위를 던져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점에서 그의 ‘해석’이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이니까요. 공부는 보다 넓고 긴 지평에서 보면 그와 나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시점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지만요.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모두 ‘공부’ 앞에 평등합니다. 저마다 조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우리 모두, 역사상의 유명한 사상가, 철학자들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 결국에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에서의 삶을 배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란 바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굉장히 특별한 장소입니다. 시공간을, 살아온 내력을, 계급을, 나이를, 성별을 초월해서 ‘공부’라는 키워드로 ‘학인’들이 모인 장소니까요. 세상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를 쓰고 한 권의 책을 읽어 갑니다. 명시적으로 정해진 공통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각자의 앎을 끌어올리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실제 세미나를 하다보면 문득문득 미묘한 해방감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걱정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앎’과 그에 대한 열망이 채워지는 순간이지요. 그 때는 정말로 무언가 초월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현실이 바뀌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는 ‘욕망’이 바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면 말 그대로 ‘현실’이 바뀌는 것 아닐까요? ‘공부로 인생역전’ 한다는 건 공부를 발판 삼아 출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생의 성질을 바꾸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글_정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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