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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4강 후기 - 작가는 미래를 미리 만들어보는 자

by 북드라망 2020. 9. 1.

이 글은 문탁네트워크에서 진행 중인 <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강의의 후기로 작성된 글입니다. (강의소개바로가기)


<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4강 후기

- 작가는 미래를 미리 만들어보는 자



기계공, 톱니바퀴, 카프카


전염병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카프카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4강이 열렸다. ‘어수선한 시국’ 덕에 줌(ZOOM)을 이용해서, 비대면으로 열렸다. 들뢰즈/가타리였다면 이 ‘시국’에 관해 뭐라 말했을까? 이건 정말이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리좀’ 같다. 물론 그런 ‘리좀’은 없다. 어딘가에선 백신을 만들고, 치료제를 만든다. 더 놀라운 건 서로 멈추지 않고 감염되면서 항체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극이 있다. 그렇지만 삶은 원래 비극과 희극이 자리바꿈하며 구성되는 것이 아니었나. 큰 비극이 작은 비극들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더 큰 시점에서 보자면 이 모든 게 희극일지도 모른다.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가라 말할 때, 나아가 웃음의 저자라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랩톱과 모바일폰 카메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서버로 전송할 때, 저 편의 사람들이 내 화면에 비칠 때, 그리고 나 자신이 비칠 때 가장 먼저 표면을 점령하는 건 어색한 웃음이다. 전염병 때문에 만나서 강의하지 못하는 이 우울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이 웃음이라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어쩌면 가장 카프카적일지도 모르겠다.



기계공


들뢰즈/가타리는 카프카를 하나의 기계로 다룬다. 카프카만 기계여서가 아니라 이 세계가 기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그는 톱니바퀴다. 그렇지만, 자기가 그러모을 수 있는 부품들로 먼 미래의 기계를 조립해낸다는 점에서 그는 기계공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기계이면서 기계공이다. 혁명가가 아니다.


문학작품을 읽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방식이 있다. 거기서 쓴 사람의 의도를 찾아내고, 의미를 찾아내고, 교훈을 찾아내는 방식 말이다. 이보다 조금 최신의 방식도 있다. 거기서 어떤 손상, 상처, 내면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두가지 모두 사냥감을 쫓아 사냥하고 결국엔 박제하는 것이다. 박제품들의 전시장엔 민족문학이 있고, 저항문학이 있으며, 대서사시가 있고 결국엔 세계문학이 되고 만다. 거기서 문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작동하기는 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카프카의 위대한 점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놀라운 점은 분명히 알 것 같다. 그 글이 가진 신선함이 흡혈귀처럼 그대로 여서 100년의 시차를 두고 읽어도 당연하다는 듯 현대적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래서 그 작품은 ‘세계문학’ 속에 끼어 있지만, 여러 박제들 가운데 산 채로 끼어 있다. 그 기계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소송』을 분석하면서 판사・변호사・피고를 모두 사법기계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볼 때, 나는 당연하게도 내 경험을 거기에 이어붙일 수 있었다. 피고로서 고발당했을 때, 나는 이기길 원했고, 재판에서 피해 없이 빠져나오길 원했으며, 판사에게 잘 보일 법한 글을 쥐어 짜내듯 써 낸 적이 있다. 말하자면, ‘피고’의 자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재판을 욕망하고, 승소를 욕망하는 사법기계의 훌륭한 부품이었던 셈이다. 국가와 법을 개똥으로 알았던 나였는데…. 그렇게 나는 사법기계의 부품이 되었고, 자괴감 기계가 되었고, 망각기계가 되었고, 재생 기계가 되었고, 지금은 후기-쓰기-기계가 되었다. 


그러니까 문학은 세계를 다시 조립하는 일이다. 들뢰즈/가타리와 입장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하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세계가 여러 기계들의 접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계라면 그리고 그 와중에 이리저리 떨어져 나온 부품들이 쓰레기처럼 사방에 널려 있다면, 그걸 줍고. 모으고. 닦고, 갈아내고, 새로 다듬어서 끼워보자. 미래는 어떻게 생겼을까? 문학이 주술적이라면, 거기에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이 수행하는 일이 미래를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관료제-기계를 보고, 과잉작동하는 그 기계가 파시즘-기계가 되는 걸 본 것처럼 말이다. 지금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것들이 미래의 부품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기관 없는 신체와 신체 사이를 왕복하는 자다. 



젊은 여성들, 그리고 예술가들


카프카의 작품엔 젊은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왜 그럴까? 구조주의적 독해는 ‘왜’를 묻지 않는다. 그저 작품에 펼쳐진 ‘구조’ 속에서 해당 항(젊은 여성들)이 어떤 계열에 접속되는지, 그로부터 어떤 효과들이 일어나는지만 볼 뿐이다. ‘젊은 여성들’은 요제프 카와 K와 카알 로스만을 도주시킨다. 다른 선분으로 이동시키는 ‘접속구’로서 그렇다. 그것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수적 남성들 판사, 변호사, 집사 기계들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그들도 큰 기계(사법기계, 성城 기계)의 일부로서 작은 기계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카, K, 로스만이 접속하는 것도 사실은 기계의 내부다. 물론 거기서 남자들은 ‘젊은 여성들’ 덕에 극적인 탈영토화를 겪지만, 다시 (기계 속으로) 당겨진다. 말하자면 이 접속은 선분과 선분 사이를 잇는 접속이다.


‘젊은 여성들’은 ‘탈영토화의 역량’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나는 사실 이게 좀 이상했다. 카프카가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썼다면 딱히 할말이야 없지만, 어째서 ‘젊은 여성들’이 그렇게 표현된 걸까? 이를테면 『소송』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요제프 카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성들은 큰 기계의 작동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아주 단순한 기계들로만 나타난다. 이 인물들(판사, 변호사, 감독관 등)은 스스로 판단하는 이성도, 의지도 없는 듯 보인다. 반대로 ‘젊은 여성들’은 제량껏 판단하고, 체제의 빈틈을 찾고, 제 욕망을 실현하려 노력하는 등, 이른바 ‘주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는 이 대조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왜 그랬느냐 하는 건 생각하기 나름의 문제니까 그렇다치고, 일단은 그 설정이 품고 있는 현대성이 놀라워서 SF소설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스티븐 소더버스의 1991년 영화 <카프카>가 SF스릴러로 만들어진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선분과 선분을 잇는 접속구라면 ‘예술가’는 모든 선분을 넘어선다. 그래서 그들과 만난 카, 카알, K는 아예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 세계도 결국엔 기계의 내부다. ‘예술가’들이 그들을 이동시키는데 사용하는 미학적인 인상들, 은유들, 어떤 의미에서 속임수들은 결국 ‘부품’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탈출엔 무엇이 필요할까? 



예술-기계


도대체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예술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현대 예술의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의미 포획’의 고전적 모델에 포획되지 않는 걸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접속구’를 찾지 못하면 그냥 거대한 물질이나 음향의 덩어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나는 그게 어떤 해석 능력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차라리 마음의 개방성에 더 깊이 결부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거나, 심지어 배울점을 찾으려고 달려들면 어떤 작품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고전적인 작품이어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인상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결국 강렬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피가 철철 흐르고 표상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해서 생기는 강렬함 말고, 내 마음의 어딘가와 만나서 펑 터지는 그런 강렬함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의 ‘예술가’는 폭발물제작자다. 여하튼 그렇게 터진 작품은, 잘 터진 작품은 감각을 바꾼다. 카프카가 소설을 읽는 감각을 바꾸는 것처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미래엔 예정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없다. 그저 오늘이 내일을 만들 뿐인데, 예정된 게 없을 따름이다. 그래서 ‘폭파’는 끝이 없다. 땅을 파고 내려가든, 심연을 향해 가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운동,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경로를 새로 찾아가는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역량’이란 그 운동을 해낼 수 있는 힘이다. 니체가 미치고, 고흐가 제 귀를 자르고, 백남준이 자신의 바지에 오줌을 싼 건 어쩌면 심연에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카프카가 매일 밤 글을 썼던 것도 바로 그런 역량의 생산이 주는 쾌락, 자유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진짜로 어떤 ‘강도’에 도달한 작가들은 ‘주체’마저 벗어버린 자들이다. ‘자유’는 획득하는 게 아니라 도달해야할 어떤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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