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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2) - 주석가들

by 북드라망 2020. 10. 8.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2) - 주석가들



『논어』 읽기에 앞서 『논어』 독해에 필수적인 주석가들을 일별하는 게 순서다. 『논어』 텍스트의 성서(成書)와 해석사의 문제가 걸려 있어 몇몇 주석서는 기억해 두어야 한다. 대강을 훑어보기로 한다.



한나라까지의 논어 : 노논어, 제논어, 고논어




『논어』는 한나라 때 이미 판본이 세 가지였다. 송나라 때 사람 형병(邢昺, 932~1012)은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주석을 단 그의 책 『논어정의』(論語正義) 서문에서 한나라 때 『논어』를 전한 학파가 셋이 있다고 썼다.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노논어’는 노나라에서 전승된 학파로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의 편차(編次)는 ‘노논어’를 따르는 것이다. ‘제논어’는 제나라에서 전해지던 것으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과 관계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논어’는 공자의 고택(古宅)에서 집을 확장하면서 벽을 헐다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책을 숨겼다가 나중에 발견된 것이라는 등 추론이 나왔다. ‘노논어’가 20편인데 비해 ‘제논어’는 22편에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많다. ‘고논어’는 21편에다 편차가 ‘노논어와 다르다. ’고논어‘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글자가 다르다는 것과 전한(前漢)의 공안국(孔安國)과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주를 달았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는 예서체를 썼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필체를 이어받은 것이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동문同文[했다는 사실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진시황 통일 이전에는 남방과 북방이 다른 글자를 썼다. 언어만 다른 게 아니라 글자도 달랐던 것이다. 진시황의 통일은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을 가져왔고 이는 제국통치의 기초를 놓았다는 정치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중국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된 『논어』 판본이 낯선 글자라는 사실은 진시황 통일 이전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논어의 주(注) : 장후론, 정현, 하안


그렇다면 『논어』는 현행과 같은 텍스트의 형태로 언제 완성됐는가. 전한(前漢)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노논어’를 중심으로 그 편차를 따르면서 ‘제논어’와 ‘고논어’의 장점을 택해 『논어』를 완성한다(장후론張侯論). 이 텍스트가 현행 『논어』의 모본(母本)이다. 『논어』 본문이 텍스트로 완성된 시기는 전한 말엽이다. 


『논어』의 전승이 몇 가지가 되고 장구(章句)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두고 『논어』 본문에 후인(後人)의 첨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견해가 있다. 『논어』를 읽다 보면 문체와 서술양식이 상이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을 두고 전승되면서 변화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어』 본문을 이상하다고 의심한 사람들의 견해에는 귀 기울일 만한 게 있다. 현행 『논어』를 상편과 하편으로 각각 열 편씩 나누는 것도 본문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반증한다. 대표적인 책이 청나라 최술(崔述, 1740~1816)의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다     


장후론에 주석을 다는 사람들이 생긴다. 우리가 통상 주(注)라고 일컫는 말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텍스트가 고정되어야 하고 일정하게 의미 단위로 분절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이 한나라 때 와서야 완성이 되었으니 『논어』의 성서(成書) 연대는 공자의 사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서 연대가 『논어』 텍스트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행 형태는 아니더라도 『논어』가 파편 형태로 통행되었음은 전술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주석을 다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한나라 때 공자의 생전 시기와 멀어지면서 『논어』 읽기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책을 독해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여기에 한나라의 석학과 대가들이 달려들었다는 사실은 학문방법으로서 주(注)가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한나라 때 주석이라는 학문양식이 탄생했다. 한나라 때 주석가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한나라를 대표하는 대유(大儒) 정현(鄭玄, 127~200)이다. 그는 ‘노논어’의 편장(篇章)을 따르고 ‘제논어’와 ‘고논어’를 참고해 주석을 냈다. 『논어정주』(論語鄭注)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석은 망실되어 전승되지 못했다. 정현의 주는 주희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은 20세기(1907)에 돈황에서 대규모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정현의 『논어』주 필사본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체는 아니고 대략 반 정도가 복원되었는데 옛 중국과 조선의 학자들도 보지 못했던 정현의 주를 지금 현대학자들은 구해 볼 수 있다. 




정현의 주를 이어 『논어』 해석 작업을 일차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하안(何晏, c.193~249)이다. 조조의 양아들이자 사위로 유명한 하안은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으로 ‘노자주’(老子注)로 유명한 왕필(王弼)을 알린 사람이기도 한다. 하안의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중요한 책이다. 그는 위진시대의 풍조에 걸맞게 『주역』(周易)에 밝았던 사람으로 『논어』에 철학적 무게를 더했다는 점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두고 도가(道家)의 현학(玄學)이 『논어』에 들어왔다고 판단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런 정통/이단의 잣대는 보류해 둘 필요가 있다. ‘집해’라는 제목에서 보듯 이전 시대 주석을 모은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지금도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하나로 필수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주(注)와 소(疎)


정현과 하안의 주를 합쳐 통상 고주(古注)라고 한다. 이 말은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신주(新注)라고 하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주(注)라는 해석 작업과 학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소(疎)라는 해석방식이 따라 붙는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주는 경문 본문을 직접 해설하는 방식이어서 간결하다. 소(疎)는 소통한다는 뜻으로 주의 간결한 설명에 상세한 해석을 가한 방식이다. 위진 시기에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해석 양식이지만 소(疎)라고 불리는 상세한 해석방식은 종이의 보급이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도 큰 몫을 했다. 죽간에 써서 작업을 했던 한나라 때는 죽간의 물질성이 간결함을 강제할 수 밖에 없었음에 비해 서진(西晉) 이후 보편화된 종이 보급은 좀더 긴 의견 진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두 권이 중요하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무제 때 황간(皇侃, 488~545)은 『논어집해의소』(論語集解義疏, 『논어의소』論語義疏라고 한다)를 남겼다. 하안의 주에 한위(漢魏) 이래 여러 해설을 붙여 가치가 높은 책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 자취를 감춰 볼 수 없게 된 책이나 일본에서 온전한 판본이 발견돼 청나라 건륭연간(1736~1795)에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 또 하나는 북송 때 형병(邢昺, 932~1012)의 『논어정의』(論語正義)다. 황간의 소를 기초로 자신의 의견을 포괄적으로 담아 하안의 집해와 합본한 책이다. 우리가 보는 ‘십삼경주소’의 『논어』는 바로 형병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주희 이후 : 주희, 유보남, 정수덕


주희



남송 때 주희는 『논어집주』(論語集註)를 낸다. 획기적인 책이었다. 신주(新注)라고 부르는 것은 편의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전의 주석이 사전적 해석(훈고訓詁)이었다면 주희의 해석은 철학적으로 접근(의리義理)한 것이어서 『논어』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에 다른 차원을 연 것이었다. 인식론적 전회라고 말하는 작업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파급력이 대단히 큰 책이었다. 중국왕조는 청나라 때까지 주희의 책을 기본 텍스트로 읽었고 조선은 주희의 이념 아래 국가가 운영되고 문명이 완성되었으니 어떤 책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주희의 책이 의리학(義理學[송학宋學])으로 접근해 훈고학과는 다르다 했으나 주희의 주석은 한대의 훈고학 전통을 완전히 흡수한 뒤에 송대 유학자들의 의리학을 결합해 집대성한 견고한 성채이다. 자구(字句) 해설에서 장(章)의 의미를 밝히고 전체적인 통일성까지를 아우르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사유의 결정이기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재해석한 『논어』는 전혀 다른 텍스트로 읽히게 된다. 


청나라에 이르러 한나라의 훈고학(한학漢學)을 계승한 고증학(考證學=고거학考據學)이 등장하면서 주석사에 전환기가 온다. 대표작이 유보남(劉寶楠, 1791~1855)의 『논어정의』(論語正義)다. 고증학은 문헌을 가져와 증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문헌학과 연계될 수밖에 없고 방대한 서책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정밀한 읽기가 가능했다.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증거에 준해서 철저한 읽기를 지향하기에 주희의 주석에 대해서도 문헌증거에 의한 재검토와 일정한 비판/다시 읽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유보남의 책은 하안의 『논어집해』를 계승한 것이다. 청대 고증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문자의 훈고에 힘을 기울이면서도 전장제도(典章制度)와 역사고증, 인명과 지명에 고증이 세밀해 주희의 『논어집주』가 놓친 부분을 보충하고 합리적인 추론으로 이전 주석의 부실한 부분을 많이 바로 잡았다. 


마지막으로 근대의 학자 정수덕(程樹德, 1877~1944)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이 있다. 『논어』연구에 평생을 바친 역작으로 중국의 전쟁 시기에도 『논어』 원고를 안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제목 그대로 중국의 다양한 『논어』 주석을 제시해 비교 검토할 수 있게 하였다. 양이 적지 않아 읽는 작업조차 만만치 않은 거작이다.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자극을 주는 가치 높은 책이다. 

이 밖에도 현대 중국의 뛰어난 주석서들이 지금도 간행되고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조선의 논어 : 정약용,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앞서 언급했듯 조선시대 주희의 책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선조 내내 그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독창적인 연구나 객관적인 주석이 나오기 어려웠다. ‘주자’라 부르며 존숭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주자와 의견이 다를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목숨까지 빼앗을 지경이었으니 주자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가 여러 주석 가운데 단연 눈에 띈다. 『논어고금주』는 고금의 주를 모아놓은 것이지만 금(今)에는 다산 당대의 청나라 학자까지를 포괄하고 일본의 유명 유학자들의 서적도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책의 넓은 스펙트럼은 박학의 과시가 아니다. 다양하고 폭넓게 제설(諸說)을 제시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관문인 주자학을 성공적으로 객관화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산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주자의 설이 여러 주장과 병치되면서 의리학이 상대화되는 효과는 학문의 진화가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고금의 여러 학설을 검토하다 보니 자신의 목소리가 확고할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를 기준으로 기억할 만한 『논어』 주석의 대강을 살펴 보았다. 중요한 사항을 정리해 보자. 한나라 때 『논어』 텍스트가 완성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注)라는 학문 방식이 탄생한다. 하안의 『논어집주』로 ‘주’는 완성을 보는데 이를 하한선으로 ‘고주’라고 한다. ‘주’에 붙는 ‘소’(疎)라는 상세한 설명방식이 후대에 성립되는 데 황간과 형병이 대표다. 남송의 주희는 『논어집해』를 펴내 주석사에 이정표를 세운다. 때문에 신주로 불린다. 청나라에 들어 고증학이 왕성해지면서 정밀한 학문으로 자리 잡아 유보남의 『논어정의』라는 걸작이 나온다. 고주와 신주, 훈고학과 의리학(훈고학의 체계화된 정밀학문으로서 고증학=박학樸學)으로 기억해 두면 좋을 것이다.     

다음 장부터는 앞에서 거론한 여러 책들을 실제 인용하면서 『논어』 읽기를 시도할 차례다.


글_최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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