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쉬 서사시』,「그림동화의 ‘트루데 부인’」
- 영웅, 죽음의 숲에서 돌아온 자
피해
둥순과 둥자는 올 1월에 세종시로 이사를 와서 전학을 했다. 드디어 6월 초, 학교라는 곳에를 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얏호! 드디어 친구다, 친구! 그런데 등교의 첫 주 내내 둥순과 둥자의 불평은 하늘을 찔렀다. 선생님은 자신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듣는지 몰라주셨고, 앞에 앉은 친구는 덩치가 너무 커서 내가 칠판 보는 것을 방해했고, 옆에 앉은 친구는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바람에 내가 신경을 지나치게 많이 쓰게 했다는 것이다. 나도 불만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대꾸도 했는데 불평의 내용이 너무 사소한데다 끝도 없이 이어질 기미를 보이자 초조함이 몰려 왔다. 적응을 못하나? 왜 더 노력을 안하지? 결국, 내(엄마)가 뭘 잘못 가르친 거지?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헌데, 겨우 일주일이다. 겨우! 나는 왜 이리 걱정이 많나? 아이들의 언어란 말 하나가 내포하는 바가 너무나 크고 복잡해서 즉자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뇌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몸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때문에 인식하고 느끼는 양과 질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몸과 마음이 달라지는 속도를 잘 못 따라갈 때가 많다. 커갈수록 짜증과 화가 폭발하고 사방으로 나부대지 않으면 안 되는 저 온갖 땡깡질의 배경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새학교에 대한 저 짜짤한 불평도 꼭 학교 때문이랴? 사태를 다각도로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다. 아이들이 불평을 하다니! 아이들은 옛 학교와 새 학교를 비교하면서 그 어떤 학교도 절대적으로 옳고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이 세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의 짜증은 그들의 오래된 세계 즉, 엄마를 향해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나를, 이해를, 못해!”, “아아아악!!@#%!” 『이방인』의 작가 까뮈는 주인에게 불평하며 ‘반항’하는 노예는 단지 그 주인이 지배하는 세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 바깥에 주인조차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고귀한 가치들이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반항하는 인간』) 이제 십대다, 시작인가? 그들의 눈에 이 집이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집은 절대적으로 옳고, 마땅한 세계가 아니다. 큰다는 것은 자기 세계가 얼마나 작고 협소했던가를 발견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또 재미가 없다. 잘 들어보니 그 불평이 ‘피해자의 진술’을 닮은 것이 아닌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내가 얼마나 친절했는데! 엄마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이런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 타인에게 인정을 구하는 것 자체야 사람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의 ‘열심’을 인정해주어야만 한다는 이 강박은 억지스럽다. 무엇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 왜 그것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없어야 저토록 자신의 억울함을 강변하게 된다.
이것이 둥순이와 둥자의 문제만은 아닌 듯 같다. 전학을 오기 전에 학급에서 남학생 하나가 여학생 세 명에게 맞은 일이 있었다. 남학생의 어머니가 득달처럼 달려와서 소위 ‘가해자들’을 소환했는데, 밝혀지기가 접입가경. 실은 세 명의 여학생들이 줄곧 그 남학생으로부터 놀림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학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은 점점 누가 더 피해를 입었는가를 입증하기 위한 진술극으로 바뀌었다. 상황은 남학생의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그동안 고생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지는 선에서 급마무리되었다. 결과는 심플했다. 남학생이 전학을 가기로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몇 주 만에 결정되었다. 나는 사건의 진행 속도에 놀랐다.
왜 그 모든 일이 그토록 빨리 진압되어야 했을까? 어떤 욕망이 사건을 그 모양이 되게 했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원인제공자를 찾아 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피해의 연쇄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할까? 또 누가 그 고리를 끊고 책임의 무게를 질 수 있는가? 때린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받은 잘못된 가정교육?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혹하게 몰아붙인 학교의 과잉경쟁 시스템? 대한민국의 학력주의? 방과 후에 초등학생 넷이서 벌인 다툼이 학부모들 간의, 학부모와 학교 간의 싸움으로 일파만파. 그런데 피해의 메아리가 단체 카톡방을 뜨겁게 달구더니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피해자의 진술이 증폭되는 가운데 우리들 중 누구도 단순히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는 점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 누구도 맞은 아이나 때린 아이들 모두를 보듬을 지혜를 갖지 못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 사건 자체를 이해시키고 왜 우리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함께 지내야 하는지를 넌지시 그렇지만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나도 피해자다, 라는 생각이 나 역시 가끔 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육아를 전적으로 엄마 몫으로 만든 남편과 세상을 정말 많이 원망했었다. 이렇게 열심히 애쓰고 있는데 아이들은 점점 더 말을 안 듣고, 온갖 방송이며 책에서 어쨌든 엄마가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며 독려하는 데에 게거품을 물 때도 많았다. 날더러 뭘 더 어쩌란 말이야? 제발 알아줘 날! 그런데 사람을 키우는 일을 두고 가해와 피해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한 불행한 사건의 원인을 나 바깥에서 찾고 그것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된다. 나의 아이, 나의 육아, 나의 삶이 피해자의 것이 되다니? 육아에서 가해의 원인을 찾는 것은 의외로 쉽다. 임금노동과 그림자 노동의 자본주의적 배치.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잔존. 그러나 그저 나날이 쌍둥이 키우기에 바쁜 이 엄마 하나가 저 커다란 사회제도와 무슨 수로 싸울 수 있나? 게다가 그런 부당한 사회제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네비게이션을 아무리 찍어도 그곳은 나오지 않는다. 부당함과 억울함이 없는 세상은 없다. 그런데 그 가해와 피해는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도출된 선악일까?
길가메쉬, 영웅의 자격을 논하다
동화는 피해자들이 돌아다니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피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계모 때문에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겪는다. 차이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에게는 피해자 의식이 없다. 소녀들은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영웅의 아우라마저 느껴진다. 예로부터 신화 속 영웅들에게는 어떤 필수 코스가 있었다. ‘고귀한 출생, 비참한 축출, 조력자와의 만남, 각종 미션 수행, 마침내 해피엔딩.’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도 비슷한 스텝을 밟는다. 이들은 어째서 그 피해 상황과 함께 영웅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동화 속 영웅들의 원류를 찾아보았다. 무려 4천 오백년 전의 동화, 길가메쉬 서사시가 떠올랐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자를 만들었던 수메르 인들의 이야기이다. 길가메쉬의 모험은 영웅 신화라는 점에서도 재미있는 화두를 많이 던지지만 문명과 자연의 관계, 도구와 기술의 문제, 강함과 약함에 대한 고대인의 사유를 풍요롭게 펼쳐놓고 있어서 다른 기회에 따로 이야기를 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아무튼 길가메쉬는 수메르 문명이 자랑했던 왕국 우룩의 왕이며, 이 서사시를 통해 수메르 최고의 영웅, 나아가 인류의 영웅이 된다. 그럼 길가메쉬에게 영웅의 자격에 대해 물어보자.
우선 길가메쉬는 결핍을 모른다. 3분의 2는 신이며 3분의 1은 인간인 길가메쉬는 오히려 너무나 완벽한 외모에 엄청난 힘으로 사방을 압도한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힘을 사방으로 뿜어내기를 좋아하며,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위를 허락받지 않는다. 그는 자기 좋음에만 충실하다. 자신이 신의 일원인지 인간의 일원인지 묻거나 따지지도 않는다. 나는 나다! 천상과 지상의 모든 법이 그 안에서 융합과 해체를 반복한다. 여기서 영웅의 첫 번째 조건이 나온다. 영웅은 자기를 비춰줄 거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울아, 거울아~’만 찾는 백설공주의 계모는 절대로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가메쉬에게 과잉은 결핍 이상으로 괴롭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때문에 도처에서 사고를 치게 되기 때문이다. 왕국의 어떤 총각도 처녀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총각들은 길가메쉬가 이유 없이 벌이는 전쟁 때문에, 처녀들은 밤마다 길가메쉬가 쳐들어와 데리고 가버리기 때문에. 그럼 길가메쉬는 행복하냐? 길가메쉬도 낮과 밤으로 피곤에 쩔어 산다. 결국 왕국의 신민들이 신에게 부탁을 드려 길가메쉬를 제압할 인간 하나가 창조되게 한다. 그것이 흙이 빚은 인간 엔키두다. (보통의 신화나 동화가 남녀의 결합을 통해 음양의 조화, 차이나는 다른 힘들의 중재와 화합을 다루는 것과 달리 길가메쉬 서사시는 동성 남자들 사이의 결합을 다룬다. 동화와 젠더 문제는 또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자. 하, 하, 하! 이렇게 다음, 다음으로 미루다가 언제? ^^;;)
엔키두는 자연(흙)을 빚어 나온 존재로 지혜를 상징하며, 카오스적 힘인 길가메쉬를 길들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 길가메쉬는 황소만큼이나 힘이 세고 무녀만큼이나 지혜로운 엔키두에게 홀딱 반한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엔키두를 보자마자 그 당당함과 세련됨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달려든다. 여기서 영웅의 두 번째 자격이 나온다. 영웅은 위대한 것 크고 강한 힘과 마주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길가메쉬는 엔키두를 만나고부터 세상 어딘가에는 더 크고 강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엔키두 덕분에 그의 세계는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이제 길가메쉬는 자신의 왕국에서 제 힘을 행사하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정말 낯설고 강력한 것,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바로 그것, 그의 온 관심은 죽음에 집중된다. 어떤 영웅도 극복하지 못한 바로 그 죽음을 이겨보고 싶다! 좋다! 그래서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곧장 숲으로 달려가 삼나무를 베기 시작한다. 숲은 생명의 원천이니 그 탄생의 에너지를 모두 파괴하면 죽음 역시 소멸하지 않겠는가? 4천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죽음을 정복해서 영생을 얻으려 하는 이 둘의 오만은 현대인의 그것과 닮았다.
그러나 웬걸? 숲의 신을 없애자마자 권태와 허무가 길가메쉬를 엄습한다. 이제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허무주의자가 되어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 아무리 꼬드겨도 흥미를 못 느낀다. 결국 이 여신의 분노를 사고 말아, 엔키두가 죽는다. 왜 길가메쉬가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한 엔키두가 죽게 되는가? 그야 엔키두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렇지! ^^ 여기서 잠깐, 엔키두가 자연을 가공한 도구이자 지혜를 상징한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고대 수메르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이 도구와 기술(엔키두)의 과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했음이 틀림없다.
길가메쉬는 사랑하는 모든 것, 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엔키두마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때부터 서사시는 제2부로 들어가는데, 길가메쉬는 그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오디세우스나 훨씬 이후의 단테나,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온 세상을 떠돌며 죽음의 비밀을 묻는 여행을 한다. 결국 길가메쉬는 어딘가에 죽음을 극복한 인간이 하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가 바로 노아보다 훨씬 앞서서 대홍수로부터 인류를 구한 ‘우르나피쉬팀’이다. 그는 어떻게 신들로부터 영원을 선물 받게 되었을까? 만물의 삶을 돌보려고 자신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홍수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다 바치려 했다. 우르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 그들의 자손들은 갈대처럼 부러진다. 잘생긴 젊은이와 귀여운 소녀들도 죽음은 …….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비정한 죽음은 인간을 꺾어 버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가정을 이끌고 갈 수 있겠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형제들이 상속받은 재산을 나누어 갖겠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증오심이 마음속에 남겠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홍수로 일어난 강물이 흘러넘칠 것이며, 잠자리들이 강물 위에서 표류할 것인가! 태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은 결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법. 잠자는 자와 죽은 자가 얼마나 똑같은가! 죽음의 현상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도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김산해,『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289~90쪽)
죽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영원을 산다. 영원한 것이 어디에도 없음을 아는 자가 영원을 얻는다. 아, 어려운 말이다. 영원이 없으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다. 오직 지금. 지금 형제와 나누고 가족을 꾸리며 기쁨도 슬픔도 고스란히 껴안으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 영원을 사는 자는 지금 이렇게 산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진리다. 마지막에 길가메쉬는 현자로부터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대가로 회춘의 풀을 선물 받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연히 마주친 뱀에게 그것을 빼앗기고(그래서 뱀은 허물을 벗으며 영원히 회춘한다) 젊음도 잃고, 친구도 잃고, 더 큰 세상에 대한 호기심마저 잃은 뒤 주름 많아진 몸뚱이를 끌면서 우룩으로 돌아온다.
고대 수메르인들의 영웅은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 자란 말인가? 그들의 영웅은 혈기 왕성한 고난극복자가 아니라, 죽음과 삶이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은 노인의 모습을 한다. 나는 여기에서 신화와 동화가 고민했던 삶의 모범, 영웅의 세 번째 자격을 본다. 영웅은 죽음을 사유하는 자다. 우리 전래 무가에 나오는 여신 바리데기도 죽음의 언덕을 넘고 넘어 죽은 아버지를 다시 살린다. 죽음을 껴안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자는 죽어가는 모든 것, 영원하지 않은 만물에 시선을 둔다. 영웅은 바로 이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고난 속으로 밀어붙인다. 만물이 모두 이르게 되는 문턱, 어떤 존재도 피할 수 없는 생의 조건, 그 지평에서 자기 인생과 뭇 삶을 바라보는 자만이 영웅이 된다.
그러나 조심해. 거기 트루데 부인이 있어!
그림 동화는 죽음을 어떻게 사유하는가? 그림 동화 속에는 많은 이들이 죽는다. 죽느니 주로 욕망의 화신인 계모들과 뱃속에 돌덩이가 들어찬 늑대지만. 그림 동화 속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제시되는 작품은 「트루데 부인」이다.
어느 마을에 정말 말 안듣고 고집 센 소녀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숲 속에 트루데 부인을 만나러 가야겠다며 집을 나간다. 부모는 ‘네가 트루데 부인을 만나러 간다면 너는 우리 딸이 아니다!’라고 엄포를 놓아도 막무가내. 결국 이 부인은 마녀로 드러나고 소녀는 나무토막으로 몸이 바뀌어 불에 태워진다, 끝. 과연, 그림 동화다! 잔혹하다는 점에서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부모님 말씀을 안 들으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으하하하! 그런데 이 표면적인 교훈으로 이 동화를 해석하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둥순이와 둥자는 요즘 매일밤 트루데 부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 ‘엄마 말 안들으면 혼난다!’라는 식상한 교훈 때문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 말썽꾸러기 소녀의 행보는 당연한 것이다. 내 집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자에게 ‘너는 여기서만 살아라!’, ‘내 말을 들어라!’라는 말은 들을수록 공허했겠지! 그러고 보면 가출은 성장의 필수조건인가 보다. 우리는 자신을 초월한 무엇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트루데 부인이 아이를 끌어당겨서라기보다 아이 쪽이 원해 숲으로 걸어 들어간 점을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트루데 부인」이 그림 동화들 안에서도 특별한 이유는 백설공주며 헨젤과 그레텔이며 많은 동화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다루는 것과 달리, 이 이야기는 어떻게 죽는가를 다루기 때문이다. 소녀는 곧장 트루데 부인의 집에 도착한다. 집 밖에 나온 소녀는 곧바로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 전회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숲은 생멸의 카오스다. 여기서 들어왔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트루데 부인은 일본의 융 전문가인 가와이 하야오 선생님도 설명했지만 그레이트 마더 즉 지모신(知母神)이라고 할 수 있다. 트루데 부인의 시스터로는 백설공주의 계모, 신데렐라의 계모 등이 있다. 원래 그림동화가 채집한 이야기에서 이 악마같은 계모들은 친엄마로 나온다고 한다. 즉 나를 낳는 자가 곧 나를 죽이기도 하는 자라는 것. 엄마란 바로 자연 자체다. 선악을 넘어서 있는 우주적 생명의 화신, 그것이 엄마다.
말썽꾸러기 소녀가 트루데 부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인이 묻는다. ‘왜 그렇게 하얗게 질려 있니? 뭘 보았기에?’ ‘계단에서 새까만 남자를 보았어요.’ ‘그건 숯장이야.’ ‘그 다음엔 초록색 남자를 보았고요.’ ‘그건 사냥꾼이야.’ ‘그 다음엔 새빨간 남자를 보았어요.’ ‘그건 백정이야.’ 다른 그림 동화 속에서 단편적으로 출현하는 숯장이, 사냥꾼, 백정은 그러니까 트루데 부인의 부하, 숲의 절대적 힘을 표현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트루데 부인」에서 이들은 무엇을 상징하나? 죽음이다. 숯장이는 식물을 태우고 사냥꾼은 동물을 잡고 백정은 인간을 죽인다. 트루데 부인의 집 앞에서 소녀는 존재하는 모든 죽음을 보게 된다. 트루데 부인의 집이란 그러므로 길가메쉬가 다녀왔던 저 깊은 숲과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마지막은?
“아, 트루데 부인. 제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니까 당신은 보이지 않고 불 같은 머리를 지닌 악마가 보여서 무서웠어요.”
“오호, 그럼 넌 마녀의 진짜 모습을 보았구나. 난 벌써 오래 전부터 너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 너를 바란 건 네가 나를 비춰 주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부인은 소녀를 장작으로 바꾸어 불 속에 던졌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자 부인은 그 옆에 앉아 불을 쬐며 말했다.
“빛이 참 밝기도 하구나!”(「트루데 부인」)
동화는 이 모든 죽음을 본 자, 더 나아가 그레이트 마더의 참모습을 본 자는 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길가메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길가메쉬는 죽음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숲 깊숙이 들어가 숲의 신을 잡아 확인 사살하기까지 했다. 현자를 찾아가 도대체 죽음이 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죽음은 확인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화와 동화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의 경계를 확실히 하려고 한다. 「트루데 부인」의 처음에 이 말썽꾸러기 소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옛날 고집이 세고 주제넘게 참견을 잘하는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를 추동하는 욕망은 앎이며, 그래서 뭐든 보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했다. 「트루데 부인」은 이런 태도를 가차 없이 단죄한다. 그럼 그레텔은 어떻게 트루데 부인 같은 마녀의 아궁이 옆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다시 「헨젤과 그레텔」을 보자.
할머니는 불쌍한 그레텔을 빵 굽는 가마로 밀었다. 가마 속에선 벌써 불꽃이 활활 일고 있었다.
“기어들어가 잘데워졌는지 살펴봐라. 그래야 빵 반죽을 가마에 놓을 수 있으니까.”
그레텔이 그 안에 들어가면 가마를 닫을 속셈이었다. 거기다 그레텔을 구워 헨젤하고 같이 먹어 버릴 작정이었다. 그레텔은 할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요?”(「헨젤과 그레텔」)
그레텔은 자신이 뭘 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아예 모른다고 한다. 그림 동화는 분명 보아서는 안 될 것,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최대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삶에 더 발붙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알기 위해 다가가다가는 그것 자체에 잡아먹힘을 강조한다. 명명백백하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려는 시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바꾸려는 오만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려고하기보다는 모든 것과 함께 할 궁리를 하는 것. 동화는 이러한 능력을 더 높이 산다.
성숙의 한 걸음
쓸쓸한 귀향이었지만 그의 귀환 이후로 수메르의 모든 이들이 길가메쉬를 영웅으로 받들기 시작했다. 죽음을 정복하지도 못했는데 왜? 죽음을 계속 마주하려고 했던 길가메쉬의 모든 발걸음이 결국은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보내는 나날의 삶에 눈을 두게 했기 때문이다. 영웅은 죽음을 사유한다. 그는 모든 존재가 처한 절대 절명의 한계로서 죽음을 떠올리며 이해의 시선을 온 삶에 두기 때문이다.
동화 속에서 살아남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가시옷을 짓는다. 그들은 타인의 죽음을 자기 몫의 죽음으로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곳과 저기를 돌아다니는 자는 설령 이웃의 배신과 도둑의 강탈에도 억울해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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