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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동화인류학] 만물을 생각하다

by 북드라망 2020. 8. 3.

만물을 생각하다



우리는 라푼젤이었다 


야생의 사고를 찬미하는 글을 쓰고 난 며칠 뒤 산책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아파트 복도를 멋지게 비행하는 한 마리 말벌(로 추정되는 좀 큰 붕붕이)과 조우하고 말았다. 작은 녀석의 빠른 날갯짓이 어찌나 힘찼는지, 나는 선풍기를 안 끄고 나온 줄 알고 서둘러 집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열린 복도 창문 밖으로 녀석을 보낼 수 있었는데 다음이 문제였다. 현관문 바로 위에 녀석이 만들어 놓은 흙집이 있었던 것이다. 꺄아! 소리를 내지르며 둥순이와 둥자는 계단으로 내빼고 말았고, 나는 갑자기 패닉에 빠졌다. 그의 작은 하우스에 난 문이 너무나 정교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원모양으로 안에 아주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음을 암시했다. 매우 안정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설마?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혼자 살자고 지은 집 치고는 너무 견고하고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주인을 잃은 집이니 그냥 두면 폐허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족이 있다면? 알들이 부화되어 나에게 복수를 하지 않을까? 과연 몇 마리나 들어 있을는지? 현관문을 열 때마다 새 벌레가 태어나 우리를 찾고, 머지않아 쌍둥이의 굴속에까지 밀고 들어올 것은 자명했다. 그 작은 구멍은 이제 신비한 공포를 크게 내뿜는 미스테리의 장소가 되었다. 아, 우리도 이렇게 신비 아파트가 되는구나! 


나는 내 새끼를 지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갖고 신발 주걱을 들어 앞뒤 가리지 않고 벌집을 치기 했다. 얍, 얍!! 무서워 제대로 조준을 못했는지 계속 실패를 했다. 그래서 다시 살충제를 들고 광범위한 지역에 분사를 했다. 고스터 버스터즈의 활약이 떠올랐다. 스위트 홈이 철퍼덕, 덕,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명의 작은 아기 말벌들이 웅크리던 몸을 서서히 펴면서 떨어졌다. 나는 갑자기 또 멍해지고 말았다. 내가 누군가의 새끼를 죽인 것이다. 야생은 어디 있냐며 안타깝게 외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벌의 모성을 측은히 여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무나 쉽게, 너무나 격렬하게, 작은 것들을 해치우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사실에 무거워졌다.        

    

온라인 학습에다 미세먼지와 더위 덕분에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 티비며 유튜브며 계속 전자기기에 손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나조차도 자꾸 티비에 손이 간다. 그 와중에 우리 셋은 점점 더 바깥 세상에 무뎌지고 있다. 갑자기 더워졌다며 놀라서 에어컨을 틀면서도 5월인지 6월인지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는 관심이 없다. 공원의 풀들이 색깔을 바꾸는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밤꽃이 피는지 아카시아가 피는지 다 심드렁하다. 뉴스며, 영화며, 책이며 뭔가 많은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 이미지처럼 지나간다. 코로나도 남북문제도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막연하다. 어쩌면 낯선 ‘벌’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마주침 앞에 무능력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정말 코로나 때문에 집 안에 틀어박히게 되어서 일까? 그리고 정말 벌이 낯선 존재라 할 수 있을까? 벌은 언제나 우리 곁에 붕붕 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주변을 대충 보고, 마주친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잘 안했던 것은 아닐까? 그냥 익숙한 대상과 익숙하게 만나는 방식만 계속 유지하고 있었나? 어떤 고립이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우리를 꽁꽁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탑에 갇혀서 모든 것을 관조했던 라푼젤, 우리는 세계의 구체성에 무감각했던 라푼젤이었다.     

    

동화는 구체성이 활동하는 세계다. 다르게 말하면 일상성이 작동하는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주변의 식물이나 동물이 인간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동화는 마주침을 열어 가는 일에 힘쓴다. 어디 동식물뿐이랴? 유정하지 않은 사물들 역시 차별 없이 제 역할이 있어 주인공들과 함께 움직인다. 가장 쉽게는 신데렐라의 아궁이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다. 저 위대한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어벤저스는 또 어떤가? 동짓날,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마당의 알밤, 송곳, 개똥, 맷돌, 자라, 멍석, 지게 등이 총출동한다. 동화는 이 평범한 나날의 사물들에게 왜 이렇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일까? 동화는 우리 주변의 존재들, 사물들을 통해 어떤 식의 관계 윤리를 사고했던 것일까? 동식물 상징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찾아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동화 속 ‘사물’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따라가 보자.       



스머프는 광대버섯을 탄 샤먼이었어! 

    

동화가 주인공들, 조연을 맡는 동식물들, 무엇보다 사물들을 무작위적으로 선택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동화는 사소한 모든 장치들에 그 이야기를 향유하는 지방의 온갖 상징을 녹여 낸다. 20세기의 동화라 할 수 있는 스머프 마을에 가 보자. 파파 스머프가 이끄는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집을 광대버섯을 갖고 꾸민다. 빨간 머리에 흰 눈송이처럼 점이 찍혀 있는 이 예쁜 버섯은 실은 독버섯으로 잘 알려져 있는 ‘광대버섯’이다. 그런데 이 독은 고대 시베리아 부족 사회에서 샤먼이 죽은 자들과 신들과 소통하기 위해 먹던 식물이다. 광대버섯을 먹게 되면 대단히 흥분하게 되는데, 정신을 잃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몸을 마구 움직이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샤먼은 기쁨과 슬픔의 극단을 오가는 감각적 착란에 빠진다. 샤먼의 이 모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감각하는 세계는 원래의 질서가 녹아내린 상태여서 사물들이 제 자리를 잃고 형태나 방향을 바꾸면서 계속 움직인다. 그러다가 샤먼에게는 갑자기 모든 흥분이 사라지고 창백한 상태가 닥쳐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을 시작한다고 한다. 카오스의 깊고 넓은 시공을 통과해서 샤먼은 이승과 저승으로 오고가는 능력을 갖게 된다. 광대버섯은 그런 샤먼에게 꼭 필요한 도구였다.(자크 브로스,『식물의 역사』 참고) 스머프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갈 수 있는, 인류의 무의식이 대지와 신을 만나기 위해 이용해왔던 타임머신에서 사는 셈이다. 가가멜은 마법사,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화학자라고 할 수 있다. 스머프는 광대버섯을 호흡하는 존재이니 고대의 샤먼에 가깝다. 아, 이 만화는 20세기 식으로 고대적 상상력과 현대적 상상력의 갈등을 다루고 있었구나아! ^^  

    

동화 속 사물들은 그 동화를 향유한 사람들의 삶과 욕망에 딱 밀착된 존재이다. 그림 형제가 사랑했던 노간주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가문비나무라고도 하며 중부 유럽의 울창한 숲을 상징한다. 따라서 더 북쪽의 켈트족 신화나 남쪽 페르시아의 민담에는 잘 나오지 않을 수가 있다. 팥죽 할머니 이야기도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티베트와 몽골을 거쳐 한반도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송곳과 개똥, 자라와 멍석의 조합은 이 이야기가 타고 넘은 고장의 풍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지역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의 모든 동화가 사랑하는 물건도 있다. 바로 황금이다. 세 아들을 둔 왕은 임종을 앞두고 황금 새를 찾아오라고 보낸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숲 속의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된다 등. 황금색을 띈 모든 것들을 향해 자석처럼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들 앞에 처한 난관에 대해 동화는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들을 갖고 있는가? 그럼 황금을 중심으로 동화가 구체성의 세계,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철학을 하고 있는지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숲의 에티카  

    



그림 형제도 많은 황금 이야기를 수집했다. 왕자는 ‘황금공’을 이용하여 공주와 결혼하면서 마법을 푼다(「개구리 왕자」). 황금 사과가 열리는 나무와 그것을 먹는 황금 새, 황금 말이 동시에 출현하는 이야기도 있다(「황금 새」). 그 중에서 황금의 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화는 「룸펠슈틸츠헨」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에 가난하지만 예쁜딸이 있는 방앗간 주인이 살았다. 그는 우연히 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도 뭔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딸이 하나 있는데 지푸라기를 자아 금실을 만들 수 있다고 뻥을 친 것이다. 당연히, 호기심 많은 왕은 소녀를 불러 짚이 가득 쌓인 방으로 데려가 물레와 얼레를 주며 황금을 만들어보라고 한다. 동화에서는 언제나 이런 어처구니없고 막무가내의 고난이 갑자기 주인공을 덮친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 예쁜딸도 자신의 불행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다. 동화 속에는 어떤 존재도 자신을 피해자라며 억울해하지 않는다. 긍정, 또 긍정!    

    

당연히! 짚을 금으로 바꿀 줄 몰랐던 소녀 앞에 조력자가 등장한다. 숲 속 난장이가 나타나 방법을 알려줄 테니 무엇을 달라고 요구한다. 소녀는 목걸이를 주고 짚을 금실로 바꾸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황금에 욕심이 난 왕이 더 많은 짚을 주고 더 많은 황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왕뿐만이 아니라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다. ‘왕’이라는 기표는 늘 황금에 목마른데, 아무리 많은 금을 주어도 그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왕-황금-권력의 본질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왕이 황금을 왕비가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것이 동일한 구조를 갖는지 아닌지는 또, 다음에!) 아무튼, 이 곤란의 유일한 해결책인 난장이의 요구도 왕의 황금 욕심에 맞춰 커진다. 하여 소녀는 손에 낀 반지를 주게 되었고, 팔목의 팔찌를 계속 난장이에게 주게 된다. 결국 왕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더 큰 황금을 차지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어쩌나 소녀는 더 이상 난장이에게 줄 것이 없다. 이에 난장이는 왕비가 되면 첫 번째 아이를 달라는 요구를 한다. 어음을 발행한 것이다. 결국 왕비가 된 소녀는 첫아이를 빼앗길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난장이는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다면 아들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왕비는 숲에서 우연히 그 이름을 알게 되어 아이의 목숨은 구한다. 이 난장이의 이름이 룸펠슈틸츠헨(Rumpelstilzchen; 작은 딸랑이 실타래? 작은 딸랑이 죽마?)이다. 

    

이 이야기는 우선 동화가 사물의 기원을 어떻게 보는지를 말해준다. 황금은 어디에서 왔나? 숲에서 왔다. 갑자기 소녀를 도와주는 것으로 숲 속 난장이가 나타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소녀가 왕비가 되기 위해, 그녀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숲을 통과해야 하는다. 여기서는 두 번의 숲 체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난장이에 의한 간접적으로 숲의 에너지(황금)을 체험하기, 난장이의 이름을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 숲에 들어가 보기. 심청이가 인당수에 들어갔다 나오고, 방앗간 소녀가 숲에 들어갔다 나오고, 왕비가 되기 위해 소녀들은 거대한 어둠, 온 생멸의 휘몰아치는 공간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이야기에서 소녀는 왕비가 될 만한 어떤 자질도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이기까지 하다. (심봉사도 거짓말쟁이었잖아?) 왕을 속이고 신분을 높이려는 부덕한 부녀가 주인공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소녀가 숲 속 난장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동화는 여기에 대해 ‘그냥’이라고 한다. 사물은 나에게 그냥 주어진다. 일방적으로 증여된다. 난장이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소녀를 돕는다. 위험으로부터의 도움은 즉각 이루어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숲으로부터라는 점이다. 숲이란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곳이며, 그 안는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것들이 항상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처음에는 소녀를 구해주는 존재였지만 나중에는 그녀의 아이를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난장이가 이를 잘 보여준다. 불운도 행운도 숲이 그냥 준다. 

    

그럼 사물이란 ‘어떤 것’인가? 그림 동화 속 많은 사물들은 주인공들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한다. 아들들은 황금 사과를 찾으러 집을 떠나고, 외국과 지옥을 그것과 함께 돌아다니곤 한다. 특히 황금은 그 불변하는 성격 때문인지, 멀리까지 비추는 환한 빛 때문인지 가장 먼 거리에 존재하는 것들의 위치를 바꾸는 데에 쓰일 때가 많다. 황금은 굵은 나무 한그루를 자른 뒤에야 그 안에 있는 황금 오리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는 등,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그래서 그것과 함께 하는 자들은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도 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과도한 탐욕으로 왕좌에서 내쫓기는 왕들도 많다. 그러므로 사물에는 삶-자리를 매개하는 도구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구는 다루기가 어렵다. 황금은 그저 황금이 아니라 짚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황금은 변질 즉, 변신의 힘을 상징한다. 사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질적 변환을 일으킬 때에만 의미가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첫 번째 점이 나온다. 만약 이와 같은 사물의 본성을 놓치고, 사물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소유하려고 달려들게 되면 주인공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황금 자체에만 눈 먼 자들의 최후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룸펠슈틸츠헨」에서 방앗간 주인은 황금이 황금으로 가치 있다고 보았기에 딸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고, 왕도 황금을 축적하기에 정신이 없다보니 거짓말쟁이 장인을 얻는 것도 모자라 자식마저 난장이에게 빼앗길 처지가 된다. 사물을 소유의 대상으로만 보고 끌어모으는 데에만 힘쓰게 되면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을 계속 놓치게 된다.     

    

이 도구를 다루는 것의 두 번째 위험성은 사물이 ‘증여’ 되었다는 점에 있다. 동화 속 사물들의 관계가 ‘교환’이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쓰는 ‘교환’이라는 개념은 같은 값을 지닌 것 사이에 물건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는 이러한 교환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황금도 난장이도 숲이 그냥 주고 있기 때문이다. 「룸펠슈틸츠헨」 바로 앞에 실린 이야기로 「배낭과 모자와 뿔피리」가 있다. 여기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세 형제가 나온다. 각자는 행운을 바라며 길을 나서게 되는데, 첫째는 은을 얻어 만족하고 둘째는 금을 얻어 만족한다. 문제적 남자 셋째는 그 정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헤매다가 무조건 밥상을 차려내주는 마법의 식탁보를 얻는다. 이 식탁보를 얻은 그는 승승장구하며 숲을 돌아다니는데 굶주린 숯장이들이 자기들의 마법 배낭(원할 때 군사들이 튀어나오는), 마법 피리(기회만 되면 대포가 발사되는), 마법 뿔피리(모든 요새와 성곽을 무너뜨릴 수 있는)와 아무리 바꾸려 해도 마법 도구들은 번번이 이 셋째에게로 되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등가교환 자체를 계속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비슷한 이야기로 또 가난한 세 아들이 나와 셋째가 황금 거위를 차지하게 되는 「황금 거위」도 있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등가교환적 사고 방식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세 아들은 각각 숲에 들어가기 전 먹음직스럽고 근사한 달걀빵과자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가게 된다. 숲에서 그들은 늙은 잿빛 난장이를 만난다. 난장이가 인사를 하며 말한다. “자네 주머니에 든 과자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만 나누어 주게나. 몹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래.” 똑똑한 첫째와 둘째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한테 내 과자와 포도주를 주면 내가 먹을 것이 없는걸?” 두 형제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는 일을 자기의 뭔가가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되받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없을 때 이들은 절대로 자기 것을 주지 않는다. 

    

반면 셋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잿불에다 구운 맛없는 과자하고 시큼한 맥주밖에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같이 앉아서 먹기로 합시다.” ‘괜찮으시다면’이라, 정말 멋진 표현이다.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내가 돌려주는 말이 ‘괜찮으시다면’ 이라니. 상대의 처지를 비하하지 않으면서 대가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 아닌가. ‘괜찮으시다면’은 ‘부족하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도 받아주어서 고맙습니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것이다. 셋째는 이 난장이가 왜 고마운가? 그가 숲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신이 숲으로부터 무한히 무엇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다시 「룸펠슈틸츠헨」으로 돌아오자. 어쨌든 소녀에게 황금이 주어졌고 그녀는 그것에 상당하는 뭔가를 숲에 되돌려 주어야만 했다. 등가 교환은 아니어도 반드시 뭔가 숲에 되돌려 주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다. 이 절박한 깨달음이 「룸펠슈틸츠헨」후반을 무섭게 강타한다. 처음에 소녀는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를 줌으로써 황금을 불리면서 자기 목숨을 구했다. 문제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어졌을 때였다. 소녀는 이때 멈추었어야만 했다. 되돌려줄 것이 없을 정도로 숲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녀는 그저 난처한 상황만을 모면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약속을 하고 만다. 언젠가는 값을 거라며 지킬 자신도 없는 약속을 한 것이다. 숲은 이런 무책임한 탐욕을 참지 않는다. 

    

왕비는 어떻게 위험에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이 대목이야말로 「룸펠슈틸츠헨」의 지혜가 빛나는 부분이다. 난장이는 자기 이름을 알아 오라고 한다. 왜 이름인가? 난장이의 이름 자체는 대단할 것이 없다. 작은 줄을 타거나 그것을 조랑말처럼 몬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빵을 굽고 내일은 술을 빚는”, 오늘은 먹을 것을 마련하고 내일은 삶을 향유하는 소박하고도 절대적인 숲의 진리에 헌신하는 난장이 한 사람의 이름을 찾기 위해 왕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온 나라에 사자를 보내고 그 스스로도 잠을 자지 않으며 수많은 이름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룸펠슈틸츠헨’이라는 고유명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뭇 존재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이해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숲의 황금에 답례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모자라다.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왕비는 자기 자식 한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야생의 에티카다. 나 자신이 숲으로부터 계속 증여받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만물과 함께 살길을 찾아가는 것.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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