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작은 것들을 위한 시 – 노르웨이 동화 ‘에스펜의 피리’

작은 것들을 위한 시 

– 노르웨이 동화 ‘에스펜의 피리’



구석으로부터의 사색 


‘사랑은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도 큰 의미를 갖게 만든다’고 방탄소년단은 말했다.(노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그렇다면 둥순이와 둥자는 정녕 세계의 구석구석을, 한없이 미세한 수준에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오늘도 둥시는 집 구석 어딘가를 찾아 들어가 앉아 있다. 딱 붙여 놓은 침대 옆에 조금 남아 있는 벽면이라든가, 빨래가 휘휘 널린 빨래대 아래. 그도 아니면 이불장 안이나 식탁 밑. 아이들은 왜 구석을 좋아하는 것일까? 비좁고 어둑한데. 갑갑하지 않나? 좀 호방하게 컸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구멍만 찾다가는 쪼잔한 어린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구석에서 하고 있는 놀이가 또 대단하다. 정말 작은 것들을 갖고 놀기 때문이다. 자기 손톱보다 작은 장난감 조각들, 어디선가 주워온 돌멩이, 클립, 접고 또 접은 색종이. 끝도 없는 쪼가리들이 집구석 여기저기를 장식한다. 


작년 어린이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둥자가 블록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큰맘 먹고 이층집을 쌓아 올리는 레고를 사주었다. 잘 노는가 싶었는데 올 초에 오래간만에 만난 큰고모가 레고를 사준다고 하니까 단번에 거절한다. 만드는 것은 재미있지만 만들고 나서는 쓸 데가 없다는 것이다. 다 지어진 것, 번듯하게 완성된 것, 그것을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러고 나서 고른 것이 작은 열쇠고리이다. 이유는 열쇠 걸이의 쇠부분이 반짝이기 때문에. 가게 조명을 받아 어쩌다가 반짝이는 그 고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럼 ‘그 반짝이는 것을 가지고는 뭘 할꺼냐?’고 물었더니 그건 물어서 뭐할 거냐는 표정으로 묵묵부답이다. 작은 것, 찰나적인 것, 어떤 목적과 무관한 것, 완성을 모르는 것. 그런 것에 아이들은 자석처럼 끌린다. 


하지만 아이들이 작은 것만 찾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요즘이라 예전 같지 않지만 유치원 시절 내내 둥시가 매료된 것은 공룡이었다. 그 때 아이들 데리러 유치원에 가면 이 녀석 저 녀석 모두 공룡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디 공룡뿐이랴? 초반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포크레인을 비롯해, 소방차, 사다리차, 덤프트럭, 레미콘 같은 중장비 자동차 모형이었다. 거대한 것에 대한 동경에 사무친 어느 봄날, 우리는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소풍을 간 적도 있다. 큰 것을 보고 싶고, 그것을 타고 싶은 이 원초적 욕망 때문에 거대한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마징가 Z, 태권 V, 철인 25호 등. 아이들은 커지고 싶다.  

    

그러고 보면 동화 속 주인공, 이들은 다 작은 놈들이다. 아예 신체가 쬐그마한 엄지 공주, 엄지 동자가 있다. 자식 중에도 막내가 늘 주인공이다. 어리숙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양탄자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구해올 수 있었던 것도 셋째 아들이고(그림 형제,「세 개의 깃털」), 아버지 말 안듣고 뭐든 제 복에 달렸다며 대문 탁 차고 나가는 소녀도 셋째 딸이다.(왜 주로 셋째인가? @.@) 결혼을 목표로 달려간다는 관점에서 보면 청년들이 나온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어리다. 물론 동화는 대칭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나올 때는 늘 노인(주로 할머니. 왜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일까? @.@)이 방해꾼이거나 조력자로 출현한다.(백설이의 계모는 실은 노파였다!) 동화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 멀리는 노르웨이의 아스비에른센(Peter Christen Asbjømsen, 1812~1885)과 모예(Jørgen Engebretsen Moe, 1813~1882) 는 모두 19세기 초 유럽의 민담 수집가들이었고 그들이 채집한 옛이야기들은 각 지방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랫동안, 많이 전승되어 온 구전 설화였다. 1800년대 초에는 아직 보호받고 관리되어야 하는 인생의 한 시기로서 ‘아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민간에서 전해진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자체가 작은 존재였다.  

    이 작은 존재들의 성격을 대충 정리해보자. 부모가 없고, 받은 재주가 없고, 하여 가진 것이 없다. ‘작다’는 곧 ‘없다’의 동의어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세상의 이치를 따를 수도 없다. 그들은 팽팽 돌아가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몸집이 큰 존재들과 결코 같지 않다. 즉 이들은 척도 바깥의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은 척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장소를 용케 찾아내 온갖 잡다한 것들로 ‘쓸데없이’ 꾸미고 노는 일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소년은 왕이 된다 

    

작기에 자라고 싶고, 아무 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되고 싶다. 동화의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왕자나 공주와 결혼하여 성으로 간다. 성숙이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척도로 가득한 세계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동화 속 소년 소녀들은 대체로 부모 말씀을 잘 안 듣는다. 기존의 권위를 비트는 일에 그들은 얼마나 능한가? 

    

노르웨이의 민담 중에 ‘에스펜의 피리’라는 것이 있다. 에스펜은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왕이 토끼 돌볼 사람들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향한다. 그의 첫째 형들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은 싫다며 지위가 낮은 사람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둘째 형은 왕의 신하가 되기 위해 떠나지만 도중에 만난 불행한 노파를 못 본 척 하고 지나친 탓에 벌을 받았다. 에스펜은 왕보다 낮은 사람을 섬기고 싶지 않다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씩씩하게 길을 나섰다. 당연히! 이 착한 셋째는 불쌍한 할머니를 구하고, 실은 숲의 대모였던 그녀로부터 마술 피리를 선물 받는다. 

    



에스펜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동화는 누군가의 부하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왕의 신하가 되는 것, 선한 자의 충복이 되는 것, 그것은 큰 기쁨이다. 충복 하인리히의 이야기(그림 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 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 시대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거부감은 근대 제국주의가 보여준 폭력적 식민지 지배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그 안에서 위계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든다. 실제로는 불평등이 도처에 만연하지만 삶의 우열이 학력이나 금전처럼 단일한 척도로 재단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지배-종속’에 대해서도 무턱대고 관계가 불편하다. 하지만 누구나 비교불가능한 척도를 갖고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설령 왕의 신하가 된다고 해도 비굴한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화 속 아이들 역시 작지만 ‘어른처럼’ 커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에스펜 이야기로 돌아오자. 왕은 왜 토끼 몰 사람은 아직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누구도 토끼를 숲에 푼 뒤에 다시 몰아서 데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펜의 피리는 언제라도 토끼를 다시 데려올 수 있었으며, 더욱 놀랍게도 피리 자체가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나 에스펜의 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때문에 토끼들을 모두 데리고 오지 못할 경우 등에 붉은 칼자국을 세 번 내겠다고 엄포를 놓는 왕 앞에 에스펜은 번번이 토끼들을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데려올 수 있었다. 

    비밀이 궁금한 왕이 어떤 행동을 취했겠는가? 동화 속에서 힘 있는 왕치고 건강하고 선한 경우를 못 봤다. 공주도 왕국도 다 자기 것이고, 보물을 그러모으는 것에 능수능란해야 동화 속에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 하며 떵떵거릴 수가 있다. 선한 왕은 어떻게 사느냐고? 쭈굴하게 살지. 왕비도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서 숲 속의 마녀에게 홀려 자식을 버리기가 일쑤다. 백설공주, 그리고 신데렐라의 아버지를 보라. 물론 덕분에 딸들이 일찍부터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씩씩하게 제 살길을 찾아가게 하지! 

    자 다시 돌아와서, 아비가 사악하니 마누라며 자식은 또 어떻겠는가? 먼저 공주가 나서서 에스펜에게 피리를 자기에게 주면 무엇이든 소언을 들어주겠다고 유혹한다. 에스펜은 백 달레르와 백 번의 입맞춤을 요구한다. 계산에 빠른 공주는 어짜피 피리를 뺏고 에스펜을 내쫓으면 아무도 모를 일 아니겠냐며 돈도 주고 키스도 해 준다. 하지만 허사, 다음날 아침이면 피리는 다시 에스펜의 손에 가 있고 토끼들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이번에는 왕비가 나선다. 왕비도 3백 달레르와 3백 번의 키스를 주고 피리를 손에 넣는 듯했다. 하지만 도루묵! 결국 분이 뻗친 왕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왕은 1천 달레르를 주는 것도 모자라 왕궁의 흰말과 키스를 하는 수모까지 치르게 된다. But, 또 실패! 

    

왕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격노하여 에스펜을 거짓말쟁이라며 비웃고 피리를 뺏은 뒤에 성 밖으로 쫓아내려고 달려들었다. 억울한 에스펜이 하소연하자, 왕은 거대한 술통에 거짓말을 가득 채워 흘러넘치게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며 말도 되지 않는 조건을 음흉스럽게 제시한다. 그런데 왠일? 에스펜은 ‘자기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며 공주와 왕비가 에스펜에게 한 키스 이야기, 뿐만 아니라 왕이 말에게 입을 맞춘 일까지 줄줄이 불어 버린다. 자신을 속일 수 없었던 왕은 수치심에 사로잡혀서 결국 이렇게 외치고 만다. “멈춰라, 멈춰! 소년이여! 통은 넘칠 만큼 가득 찼다. 너는 통에 거품이 넘치는 게 안 보이느냐?” 

    

술통에 말을 채워 흘러넘치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에스펜의 말은 왕의 수치심을 흘러넘치게 했다. 왕이 말의 입에 키스를 했다는 것을 누구도 믿지 않을 테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피리의 힘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로 보였던 에스펜의 기지가 빛을 발한다. 에스펜은 왕의 명령을 따랐다. 진실을 말하면서 거짓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거짓은 진실로서 왕의 제안을 넘치게 하여 허세와 탐욕으로 빚어진 왕의 술독을 깨부순다. 에스펜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만 왕이 기대한 대로가 아니라 그 명령의 빈틈을 찾아 외연을 넓히면서 명령 자체의 목적과 기능을 비틀면서 그렇게 했다. 결국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던 왕은 모든 것을 덮고 에스펜과 공주를 결혼시킨 뒤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에스펜의 피리」,『아스비에르센과 모에의 노르웨이 옛이야기』, 1871)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아이들이 왕궁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반드시 왕의 명령을 비틀면서 제 자리를 만든다. 백설공주도 계모를 죽이고 왕국에 들어갔다. 그녀의 아버지 즉 과거의 왕이 계모를 왕비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계모를 몰아낸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킨 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척도 바깥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척도를 학습하고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척도는 신봉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찾아 균열을 내라고 있는 것이다. 작은 존재들이 완수해야 하는 미션은 입신양명이 아니라, 임금님이 계신 이 왕국에 낯선 기운을 불어넣는 일인 것이다. 

    

이 동화는 동화 속에서 말이 맡은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신데렐라에게 말은 저주요, 운명이었다. 그 누구도 열여섯이 되는 그날 물레에 찔리게 될 것이라는 마녀의 저주를 바꾸지 못한다. 누구도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한다. 말은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예언적 힘으로 미래를 이끌어 낸다. 피리를 입으로 부는 것도 에스펜이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예언, 시간을 이끄는 힘을 기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말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물과 사람과 세상과 관계 맺는 양식이다. 그래서 말하는 능력은 소중하다.(인어공주는 말을 잃는다, 음 왜일까?) 말하는 능력은 에스펜처럼 피리를 쓰면서, 숲의 정령과 토끼와 왕들 사이에서 그 기능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자기 말이 자기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생각과 행동을 늘 상황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융통성과 능동성이 필요하다. 목숨을 건 모험이 거듭되는 가운데 주인공들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 간다. 자기 입으로 내뱉지만 모두와 함께 말하는 존재, 그런 지혜에 통탈할 때 소년은 왕이 된다. 이것이 동화가 제시하는 작은 것들의 성숙이다. 

    


인생의 한 계단 

    

프란츠 카프카(1883~1924)라는 체코의 작가가 있다. 그도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특히 구석을 좋아했다. 「가장의 근심」이라는 단편 소설에서 그는 쓸모라고는 없는 장난감이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를 계속 방해하는 이야기를 썼다. 작은 것, 의미 없는 것, 어떤 목적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법의 위반자라는 뜻이다. 

    

카프카는 자신을 인생을 생의 첫 번째 계단 위에 계속 머무는 사람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진급을 거부하는 공무원으로 살겠다는 뜻인가? 싶었다. 카프카가 체코 프라하의 노동자 보험공사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이 비유에 대해 아주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직 개학을 하지 않아 내둥 집에만 있는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 긴 산책을 하는데 그날 우리는 공원의 어떤 계단을 지나고 있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이 첫 번째 계단 위에서 놀기 시작했다. 계단 위를 구르는 먼지들, 계단 바닥의 벽돌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이끼들, 누군가가 버린 ‘자유시간’ 껍질, 개미 …. 그런 것들을 보고 만지고 있는 것이다. 뭐 놀겠지 했는데 시간이 계속 흐르는 것이다. “이제 가자, 가자.” 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시간은 이십 분을 넘기고 있었다. 백번쯤 ‘가자, 가자’ 한 끝에 겨우 한 계단을 올랐는데 거기서 다시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섯 칸 짜리 계단에서 거의 한 시간을 놀았다. 

    



저 평범한 계단 한 칸에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고 느꼈던 것일까? 아이들이 경험하는 시공간은 내가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다. 그들은 정말 다른 존재이다.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육아의 공리 같은 것은 가당치도 않다. 아이들이 찾아 들어가는 ‘구석’이 엄마 자궁처럼 아늑해서라는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세계의 크기, 부피, 밀도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험되고 있는 게 아닐까? 계단 한 칸이 주는 흥분과 불안 감탄과 슬픔의 넓이와 깊이에 나는 아연했다. 아, 작은 것들의 찬미자인 카프카도 한 순간, 한 지점이 수많은 놀이로 분기하는 열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 ‘반복’의 달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 어릴 적에는 같은 책을 몇날 며칠 읽고 또 읽어 달라고 조를 때도 많았다. 분명 같은 장면에서 웃는 것 같은데, 이걸 왜 반복해야 하는지 내가 지쳐서 “야, 야, 안돼, 안돼, 다른 것도 좀 해야지”하며 다른 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같은 쾌락에 길들어서도 아닌 듯하다. 아이들은 같은 장면으로만 보이는 책의 한 페이지에 너무나 다른 결이, 너무나 미세한 차원에서 숨 쉰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아이들의 신체가 폭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자라기 위해서 온 세포가 맹렬히 증식을 거듭하기 때문에 세계가 확확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계속 우리 셋이서만 놀게 된다. 학교도 못하고 운동장 출입도 금지되었다. 새 도시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산책을 해도 어린이들 보기가 어렵다.(다들 어디 있는 겐가?) 이제 작은 것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이유가 좀 다르게 다가온다. 봄날 저수지에 나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개구리의 봄과 나의 봄이 같을 것인가? 개구리와 인간 모두가 저수지 앞에 서 있지만 둘은 다른 세계를 산다. 아이들과 나도 그렇게 지금 이 집구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이는 것이 다르고 들리는 것이 다른데, 정말 차원이 다른데, “엄마 말을 좀 들어!”가 제대로 들릴 리 없다. 

    

그럼 아예 입을 다물고 있을까? 아스펜이 피리를 불면서 왕이 되었던 것처럼 다른 두 존재는 함께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르쳐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따로 없다. 개구리에게 뭘 가르친단 말인가? 함께 이 저수지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각자, 그러나 또 함께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계단은 목표를 향해 올라가야 하는 사다리가 아니다. 우리가 놀았던 첫 번째 계단과 두 번째 계단은 같은 계단이 아니다. 같은 칸에서 놀지만 둥순이의 계단과 둥자의 계단도 같지 않다. 누구나 자기만의 지평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살 길을 찾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이가 어른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단과 계단 사이의 도약이 있을 뿐이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듯이. 갑자기 치워야 할 것만 가득해 보이던 이 집구석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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