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오래오래
- 그들은 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되었나?
행복의 조건
“행복은 뭘까?” 조카 연하가 말한다, “인류가 좋게 생각하는 거요. 특히 어린이가 기뻐하는 거요.” 둥순이가 말한다, “사람들이 기쁘고 서로서로 배려하는 것.” 둥자가 말한다. “사람들이 기뻐서 폴짝폴짝 뛸 만큼 좋은 거요.” 승환이가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갖게 되고, 원하는 곳에 가게 되는 거요.”
행복이란 뭘까? 행복은 기쁨과 동의어다. 그럼, 기쁨은 뭘까? 연하는 4학년. 벌써 ‘인류’를 걱정한다. 기쁨은 나 하나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 그리고 그 인류를 대표하는 얼굴은 어린이다. 그리고 둥순이와 둥자는 알고 있다. 기쁨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 기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온몸으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행복한 자는 온몸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인류를 향해 퍼져나간다. 놀라워라. 이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알기 위해 수많은 책을 독파하고 면벽 수련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놀면 된다.
행복이 나 하나만의 문제가 되고 소유와 관련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문득 저 유명한 『안나 까레리나』(톨스토이, 1877)가 떠오른다. 안나 까레리나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편도 아들 세료자도 다 버리고 애인 브론스키를 향해 돌진한다. 안나는 고상한 드레스와 위압적인 저택에 앉아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는 것은 자신이 행복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숨보다도 더 귀한 아들을 보살피며 그 옆에서 흐믓하게 바라보는 일도 자신이 행복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나에게 행복은 오직 훤칠하고 준수한 브론스키의 사랑을 받는 것, 세상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녀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봐주는 단 한 남자 품에 있었다.
불륜 커플로 낙인이 찍혀 러시아의 모든 사교계로부터 거절당한 안나-브론스키 커플은 점차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정말이지 둘밖에 모르는 방 안에 유폐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옥이 되는 지옥을 경험한다. 게다가 당대 러시아 귀족 사회는 미혼인 브론스키의 연애에는 관대하면서도 기혼인 안나의 불륜에는 훨씬 더 가혹했다. 결국 안나는 질투와 의심, 망상에 사로잡혀 기차역에 몸을 날리게 된다.
톨스토이는 ‘자기의 행복’만을 고집하는 이 안나를 가차 없이 단죄한다. 『전쟁과 평화』에서부터 『안나 까레리나』에 이르기까지 톨스토이가 줄곧 질문했던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톨스토이만큼 행복한 삶에 골몰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과연 어떠한 태도가 우리를 지복으로 이끌 것인가를 두고 평생을 고민했다. 『안나 까레리나』에서 그 답을 제시하는 인물은 귀족 지주 레빈이다. 그는 귀족이지만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 매료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민들과 함께 땀을 흠뻑 흘리며 일하는 레빈을 통해 대지의 생명력에 감탄하는 인간,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 열리리라고 보았다.
우리는 모두 잘 살고자 한다. 톨스토이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동화야말로 노골적으로 ‘행복하자!’고 말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란 안나 카레리나처럼 자기의 정념, 자기의 개성, 자기라는 것을 고집하는 행복은 아니다. 사실 동화는 행복한 상태를 묘사하는 일이 거의 없다. 동화가 돌파하는 세계는 잔혹함으로 뒤덮여 있다. 조실부모는 기본이고, 믿었던 할머니가 늑대로 돌변하여 달려드는 등 내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태반이다. 주인공들은 목이 잘리고, 등가죽이 뚫리고, 손가락 발가락이 가시에 찢어져서 피를 철철 흘리며 온 숲을 헤맨다. 이 무시무시한 세계가 주는 메시지를 거칠게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놓지 마 정신줄!’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거친 세계만을 제시하면 될 것이지 마지막에는 꼭 행복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놀랄만한 그들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면 〈개구리 왕자〉에서는 너무 깐족거리는 개구리를 참다못해 공주가 발로 뻥 차 준 덕분에 개구리의 마법이 풀려 왕자로 돌아온다. 즉 행복의 조건은 오해와 발길질이다. 또 <개구리 왕자>의 마지막에는 충성스러운 하인 하인리히가 등장하는데 하인리히는 자기 팔자가 고쳐진 것도 아닌데 왕자의 마법 풀린 일을 가슴 터지게 기뻐한다. 여기에서 행복이란 결국 남의 행복이다.
“이튿날 아침 공주와 왕자가 잠에서 깨었을 때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여덟 마리의 하얀 말이 이끄는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마차 위에는 왕자의 충직한 시종인 하인리히가 서 있었다. 드디어 마차는 왕자의 나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달리지 않아서 왕자는 뒤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세 번이나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왕자가 개구리로 변해 있을 때 왕자의 충직한 시종 하인리히가 너무나 슬픈 나머지 가슴에 감아놓았던 세 개의 쇠줄이 기쁨에 겨워 하인리히의 가슴에서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소리였다.”(『개구리 왕자』)
백설공주의 미래도 따지고 보면 정말 행복할까 싶다. 그녀는 자기 닮은 딸 낳고 일찍 죽게 되거나, 알고 보니 결혼한 왕자가 상처(喪妻)를 하고 혼자서 예쁜 딸을 키우던 차라 이번에는 자신이 계모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동화가 말하는 행복이 뭘까?
부부의 세계
동화에서 행복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결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는 남녀간의 결합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아름답지만 불쌍한 재투성이와 훤칠하고 신분이 높은 왕자의 결합이라든가, 가진 것 없지만 지혜로운 청년과 말 못하는 공주의 결합 같이 신분이나 능력의 격차가 상당히 큰 두 사람의 만남을 이야기의 큰 줄거리로 삼는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게다가 결혼을 하더라도 꼭 두 사람이 가난한 오두막으로 들어가지 않고 왕국에 입성한다. 언뜻 생각하면 행복은 이성애 핵가족의 물질적 부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우선 동성애만 놓고 말해 보자면, 동화는 동성애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동화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부정한다. 그것은 너무나 같은 형태 간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동화가 신분이나 처지가 다른 두 남녀를 결합시키려고 하는 까닭은 대단히 먼 거리에 있는 차이들에 관심이 있어서다. 개구리 왕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동화는 남녀만이 아니라 동식물과 인간의 결합에 더 주목한다. 성탑 위에 혼자 갇혀 있는 머리 긴 소녀를 평범한 인간 여성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라푼젤의 긴 머리는 식물이나 나무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또, 왕자에게 반했을 때 인어공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왕자를 만나러 육지에 갈 때에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보통의 사람-아가씨가 왕자와 결합하려고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동화에서 언어는 인간성의 징표가 아니다. 동화에서는 인간과 까마귀가, 원숭이와 거북이가, 인간과 영혼이 충분히 말을 나누니까. 말을 못한다는 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놓인 교통의 회로가 단절된 상태를 뜻한다. 잠깐 결론을 내려보자. 동화는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결합은 접근하기 어려운 두 존재가 만나는 것을 뜻한다. 신분이 다른 남녀, 저주에 걸린 남자와 공주 등, 이렇게 차이가 설정되었을 때야 비로소 동화의 서사는 비로소 운동을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합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차이의 중화가 아니라 또 다른 차이의 생산이다. <개구리 왕자>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충신 하인리히는 사실 이야기 자체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인물이었다. 그냥 개구리가 사람이 되자마자 갑자기 튀어나오는 존재다. 동화에는 이야기의 본래 서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동물이나 식물이 불쑥 끼어들어서 이야기를 열린 결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흔한데, 이것은 동화라는 서사가 변증법적 종합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화는 질이 다른 두 항의 결합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이가 생산되는 세계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회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었지만 자기를 꼭 닮은 하얗고 예쁜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모두 다 일찍 죽지 않던가? 동화는 같은 것들이 자기 체적(體積)을 늘리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동화가 말하는 ‘행복’이란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상태, 끊임없이 예측 밖의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의미한다.
놓지 마 정신줄!
따라서 이 행복은 위험하다. 개구리 왕자가 하인 하인리히 이야기로 끝나듯 언제,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카오스가 열리기만 한다. 이러한 위험을 잘 보여주는 그림 동화의 결혼담으로 「수수께끼」가 있다.
‘수수께끼’ 하면 오이디푸스의 스핑크스가 떠오른다. 오이디푸스는 ‘아침에는 발이 네 개이고, 점신 때는 두 개이며, 저녁 때는 세 개인 존재는 무엇이냐?’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된다. 수수께끼란 나란히 놓일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장면(차원)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언어유희이다. 예를 들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것은?’이라는 수수께끼의 답은 ‘나이’이다. 이 수수께끼는 ‘음식물을 먹는다’와 ‘나이를 먹는다’라고 하는 전혀 다른 상황을 ‘먹다’라는 동사로 급박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음식 양의 줄어듬이 예상되는 자리에 시간의 줄어듬이라는 의미를 붙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먹음을 둘러싼 상식에 교란을 일으키고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남아메리카의 어떤 원시부족은 오직 장례식 때에만 수수께끼로 놀 수 있다고 한다. 원래 같이 놓여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맞붙는다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끊어진 인연을 갑자기 이어붙여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장례식 때에는 죽은 몸이 산 자의 공간에 잠깐 함께 있으니까. 이처럼 생사의 굳건한 벽이 허물어지는 때에만 수수께끼는 허용된다.(나카자와 신이치,『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참고)
「수수께끼」라는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부분을 퀴즈-수수께끼가 연결한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 구경이 하고 싶어진 왕자가 나온다. 그는 시종과 함께 우연히 숲을 지나다가 계모(마녀인)의 구박을 받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왕자와 시종은 어쩔 수 없이 마녀의 오두막에 들어가게 되지만, 소녀로부터 마녀가 주는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받는다. 붉은 눈을 가진 노파(그녀는 트루데 부인처럼 붉은 색을 좋아한다)는 왕자와 시종에게 술 한 잔을 권하는데 소녀의 말을 귀담아 들은 왕은 술잔을 놓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지만 시종은 자신의 말 위로 술잔을 잘못 쏟아 말을 죽게 한다. 놀라서 달아났던 시종이 죽은 말이 있던 자리에 되돌아 왔지만 벌써 까마귀 한 마리가 말의 시체를 뜯어 먹고 있다. 결국 시종은 까마귀를 데리고 왕을 따른다.
왕과 시종은 숲을 맴맴 돌다가 우연히 주막에 들어가게 되는데 알고 보니 살인자들과 마녀의 소굴이다. 그것도 모르고 왕과 시종은 주인장에게 까마귀를 자기들의 식사거리로 맡겨 놓는데, 악당들이 까마귀 요리를 먼저 먹게 된다. 아뿔사! 그 고기에는 이미 독이 퍼져 있다. 그래서 모두 죽고 왕자와 시종만 살아남게 된다. 왕자는 살인자들과 마녀들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착한 주막집 딸에게 주고 무사히 숲을 빠져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이다. 여기서 왕자는 계모 밑에 억울하게 붙들려 있던 소녀와도 착한 주막집 딸과도 결혼하지 않는다.
문제는 후반부다. 오랜 여행 끝에 왕자는 한 나라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예쁘기는 하지만 진짜 못된 공주가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맞히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면서, 대신 알아 맞출 수 있는 수수께끼를 내는 자는 죽이고 있다. 왕자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아홉이나 죽고 난 뒤였다. 왕자는 공주의 미모에 반해 수수께끼를 낸다. “때린 자는 없는데 맞은 자는 열둘인 게 뭡니까?” 왕자는 지금 까마귀가 독이 든 말고기를 먹고 죽은 이야기, 그 말고기를 먹고 살인자와 마녀 열두 명이 죽은 이야기를 수수께끼로 내고 있다. 우리는 이 답을 안다. 독자로서 진즉 이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런데 공주는 이 답을 알 수 없다. 그 상황에 있지 않았으니까. 왕자의 수수께끼는 왕국의 공주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숲 속에서의 사건을 들이밀면서 왕국과 숲을 연결해버린다. 이렇게 차이나는 두 세계가 연결될 때 결혼은 성사될 수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주는 왕자로부터 은밀하게 답을 듣기는 했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쫓아낼 궁리를 한다. 나쁜 년이다. 그러나 왕자는 이를 눈치 채고 도망가려는 공주의 망토를 잡아챈다. 다음 날 공주가 왕국의 대신들 앞에서 수수께끼의 답을 진즉 알고 있었다며 거짓말을 했지만 왕자는 망토를 보여주며 공주의 거짓을 밝힌다. 결국 둘은 결혼하는데 이렇게 사악한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된 왕자는 행복할까? 원하지도 않은 남자랑 살게 된 공주는 행복할까? ^^
「수수께끼」에서 보듯이 공주는 왕자가 좋아서 결혼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에 둘은 결합한다. 왕자는 왜 착하디착한 두 소녀 대신에 이렇게 못된 공주와 결합하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동화는 착하고 못되고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착한 것을 +, 못된 것을 –라고 할 때(착한 것을 –라고, 못된 것을 +라고 해도 된다) 이 차이 나는 두 항이 접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 전반부에 등장했던 착한 소녀들과 착한 왕자가 결합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걱정도 기대도 소용없어!
그런데 왕자가 미모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 대체로 왕자들은 미녀를 밝힌다. 하지만 백설공주, 신데렐라, 라푼젤, 그리고 <수수께끼>의 공주가 갖고 있는 미모는 양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백설공주가 왕자와 숲 속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한참 그림자 노동을 하다 말고 독사과를 드신 뒤였다. 신데렐라는 화려한 드레스 안에 아궁이 옆에서 묻힌 재를 안고 있었다. 라푼젤도 왕궁이 아니라 깊은 숲 속의 탑 위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수수께끼>의 공주는 예쁘지만 성격이 별로였고. 동화에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동화에서 공주가 예쁘다라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공주가 예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예쁘다라는 진술문은 예쁘지만 못됐다, 예쁘지만 팔자가 사납다, 예쁘지만 마술을 부린다 등 ‘예쁘다’는 전혀 다른 의미를 향해 열려 있고, 열려 간다. 그래서 단지 착하기만 한 <수수께끼>의 소녀들은 절대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라는 말도 행복했다라는 정태적 상태를 지시하지 않는다. ‘행복했는데~ 곤경에 처했다’, ‘행복했는데~ 큰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 ‘행복했는데~ 희안한 동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등, 이 행복은 온갖 상황과 접속이 일어나는 분기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어떤 길을 선택해도 만만치 않으리. 그러니 걱정도 기대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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