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동화인류학] 야생의 사고 : 헨젤과 그레텔의 숲에서

야생의 사고 : 헨젤과 그레텔의 숲에서



신비 아파트로 오세요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아이들은 이 시간을 위해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견딘다. 일찍 일어나기, 집 안에서 뛰지 않기, 엄마에게 말대꾸하지 않기, 심지어 숙제도 하기! 바로 그 시간 초등 에니메이션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신비 아파트》가 방영되기 떄문이다. 이 문제의 아파트는 2016년에 어린이 채널 투니버스에서 첫 방영을 시작해서 최근까지 <신비 아파트 고스트볼의 비밀>, <신비 아파트 고스트볼 X의 탄생> 등을 거쳐 최근 <신비 아파트 고스트볼 X 6개의 예언> 시리즈까지를 마쳤다. ‘6개의 예언 시리즈’의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찔러, 투니버스 개국 이래 최대 시청률을 올렸다. 이 놀라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인가?  

    



신비 아파트는 도심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등신 도깨비 ‘신비’가 하리와 두리 남매,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악귀를 처단하고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이다. 우리집의 둘째는 겁이 많아서 혼자서는 집 안의 화장실도 못 가는데, 빨간 눈을 한 시커먼 귀신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신비 아파트를 볼 때에는 아주 작정을 하고 온몸으로 방바닥을 구르며 제대로 스릴을 만끽한다. 첫째도 캄캄한 아파트 복도와 지하실을 돌아다니는 모험에 완전히 빠져서는, 귀신도 안 나오는 이 놈의 집구석은 시시하다며 난리다. 인기의 이유는 퇴마사들에게 있기보다는 귀신 쪽에 있는 듯하다. 

    

당황스럽다. 나도 어렸을 때는 한 괴담했다. 학교 귀신, 무덤 귀신, 식민지 귀신 등(그 동네에 일본 적산가옥이 몇 채 있었다)! 온갖 괴담을 섭렵하고서는 골목에 자리를 깔고 동네 꼬맹이들을 겁주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싶다. 아, 그렇다면? 쌍둥이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니라 TV 중독인가? 그런데 갑자기 이런 궁금함이 생긴다. 중독은 둘째 치고 저 순진무구해 보이는 어린양들이 어째서 저 사악한 귀신들에게 이끌리는가? 사이좋기만 하던 ‘뽀로로’에서 악귀들과 노는 ‘신비 아파트’로의 이행은 급작스러웠다. 어둠의 세계로 성큼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타인을 이해하면서 성장한다 

    

어른과 아이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도 든다. 저들은 걸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둥순이와 둥자는 하루 종일 뛰고 있다. 한번은 비오는 날 심심해서 둥순이에게 만보기를 채워보았다. 6000보! 그냥 집 안에서 풀방구리처럼 돌아다니기를, 6000보인 것이다. 가만히는 못 있는 존재,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어찌 이들과 내가 종(種)이 같다 하랴? 그렇기에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아이들이 신비 아파트에 빠지는 이유, 그 짜릿한 스릴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테다. 여러 번 물어보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왜 재미있냐고? 몰라. 그럼 엄마는 신비 아파트가 재미없어?” 어째서 신비 아파트가 재미없을 수가 있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무조건 좋다고? 저 귀신 이야기가?   

    

나에게도 재미가 있을까? 어허허허, 세상에! 나도 재미있었다. 그럼 나는 무엇이 흥미로웠나? 우선 신비라는 도깨비가 아파트에 산다는 설정이 특이했다. 아파트는 특히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현대적 삶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신비와 하리 두리 남매가 사는 아파트는 맞벌이 부부가 많은 것으로 나온다. 덕분에 조금 큰 아이가 나이 적은 이웃의 동생을 돌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끼리의 밴드를 구성해서 놀고 귀신도 만나고 한다. 부모의 그늘 대신에 이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은 아파트 담벼락 그늘이다. 

    



문제는 이 담벼락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의 첫장편영화 《플란더스의 개》풍으로다가 이 아파트에는 지하와 외벽으로 돌려서 나 있는 계단, 가끔씩 고장 나는 엘리베이터 등 도처가 빈틈이고 구석인데, 바로 여기에서 예기치 못하게 귀신이 출현한다. 뻔하게만 보이는 평범한 아파트에서 퇴마 놀이에 열중하는 신비 어벤저스는 끝도 없는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아간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아파트가 귀신들의 사연과 함께 점점 더 복잡한 시공간이 되어간다는 점이었다. 신비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한 겹이 아니라, 무수한 겹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해 간다. 

    

그 다음 재미있었던 것은 이 악귀들이 소위 악마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악귀들은 휴대폰에 중독되어 정신줄 놓고 있다가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되거나, 집과 학교를 반복해야 하는 권태로운 일상에 허우적대다가 귀신이 된다. 물론 간간히 전설의 구미호가 나와 화장품에 탐닉하기도 하는 등 전래 동화의 현대화도 이루어지지만, 그들 각자의 사연이 모두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결국 신비 어벤저스의 ‘퇴마’란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신비 어벤저스는 타인의 슬픔과 상처를 이해하면서 귀신들을 구원하고,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아파트의 아이들은 이렇게 타인의 삶의 깊숙한 곳에 접속함으로써 성장해 간다. 



숲에서 괴물을 먹다 

    

아이들이 타인의 삶 속으로 뛰어든다는 설정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라는 일본의 사상가는, 성장이란 자신이 앉은 자리 바깥으로 성큼 발을 내딛으면서 자기 안에 세상의 여러 부분을 품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기도 한다.(『스승은 있다』참고) 그런데 여기서 다시 의문이 든다. <신비 아파트>는 왜 타인의 삶, 일상을 지탱하는 무수한 시간(이야기들)을 이해하는 일을 귀신담과 함께 녹여 낸 것일까? <신비 아파트>만이 아니다. 그림 형제가 채록한 동화에서도 사건은 주로 깊고 어두운 숲에서 벌어진다. 빨간 모자는 할머니의 숲에 다녀오고, 백설 공주는 자기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숲 속 난장이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잠자는 공주는 숲에 가는 대신 자기 왕궁을 숲으로 바꾼다. 전래의 동화들은 ‘타인의 삶’, 우리가 근원적으로 이끌리고 반드시 조우하게끔 되어 있는 그 미지의 세계를 어두운 숲으로 표현한다. 이해의 심연은 왜 어두워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숲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동화 속 숲이라고 하면, 역시 <헨젤과 그레텔>이다. 이 숲에서는 과자가 독약이 되고, 친절이 족쇄가 된다. 헨젤과 그레텔의 ‘집’은 정확하게 숲이 끝나는 곳에 있는데, 이 집을 경계로 해서 마을과 숲, 각각은 의외로 비교적 살만한 곳으로 나온다. 마을에서는 아직 아이가 버려졌다는 소식이 없고, 숲 속에서 새들은 어디서나 먹을 것을 찾는다. 오직 숲과 마을의 경계에 사는 이 가족만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데, 급기야 네 식구는 함께 먹을 방도가 없어서 아이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린다. 아이를 버리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쪽이 계모이기 때문에 이 의붓어머니가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지만, 비극에 일차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마을에도 숲에도 귀속될 수 없는 자들이 떠안게 되는 굶주림이다. 

    

여기서도 숲은 어둡다. 아이들은 낮에 두고 간 빵부스러기를 밤에 잃어버리고, 깊은 숲 한 가운데에서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어느 쪽으로 살 길이 뻗어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또한 숲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 맛있는 과자로 아이들을 구해주던 집은 그 때문에 아이들을 한 걸음도 바깥으로 못나가게 만드는 철방이 되고, 친절하게 보였던 할머니는 과자를 먹는 아이들과 함께 인육을 탐하는 마녀가 되는 식이다. 백설공주의 마녀는 왕궁에서는 우아한 왕비였지만, 숲에서는 마녀가 되기도 했다. 사실 숲속의 마녀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눈이 빨갛고 먼 곳을 볼 수가 없지만 짐승들처럼 냄새는 아주 잘 맡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숲에서는 늑대도 늑대의 탈을 벗고 인간이 되기도 한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양>에서는 엄마가 외출한 집에 엄마의 흉내를 내는 늑대가 찾아오는데, 엄마의 외양에 늑대의 마음을 한 이 존재를 두고 모든 아이들이 엄마로 착각을 한다. 다시 말하면 숲 속의 늑대는 인간-엄마도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엄마는 숲에서 늑대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이 늑대는 배 안에 돌을 넣고 무거워 물에 빠져 죽게 되는데 자기 배 안에 늑대가 아니라 돌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몇 걸음 걷기도 한다. 소화가 안 돼서 죽은 게 아니라 너무 무거워서 비틀거리다 넘어졌을 뿐. 다시 말해 늑대는 숲에서 생물이면서도 광물과 융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빨간 모자의 늑대도 마찬가지다. 그도 할머니가 되었다가 광물과 융화되었다가, 모두를 헷갈리게 하면서 계속 몸을 바꾼다.  

    

이처럼 그림 동화 속 숲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개체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확실해보였던 대상들의 외양과 내면의 성질 모두가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그림 동화는 ‘먹음’으로 표현한다. 백설 공주는 빨간 사과를 먹고 죽는다, 빨간 모자는 할머니로 변한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숲의 무겁고 날카로운 이빨에 우적우적 씹혀서 자신이 완전히 해체되는 상황까지 간다.(페르시아의 전래동화인 『천일야화』나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는 그림동화에서처럼 심하게 씹어 먹히는 사건이 잘 안 나오는데, 중세 북유럽에는 먹을 것이 너무 없었나? 그런 생각도 든다. 아니면 그림 형제가 먹는 것을 특히 좋아했거나. ^^) 

    

사실, 먹고 먹힘을 둘러싼 해체의 경험은 원시 부족의 통과 의례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식의 일부를 이룬다고 한다. 그림 형제는 민담을 채록하면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림 동화는 형제가 보기에 성숙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많은 원시 부족에서는 젊은이들을 깊은 어둠 속으로 데리고 가서 괴물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며 겁을 준다는데, 그렇게 하면 청년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혼자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 먹음은 평소에 먹지 않던 존재 다시 말해 나를 먹이고 살리던 일상의 양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과의 조우, 뒤섞임을 뜻한다. 실제로 젋은이들은 그들의 육신이 파괴되고 재조립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극단의 공포 속에서 의지하고 믿었던 상식이나 감각적 질서들이 형체 없이 녹아내리면서 문드러지는 압도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성인이 되기 위해서 이처럼 극단적인 공포에까지 몰릴 필요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숲에서 돌아와서 원래의 일상을 살아갈 텐데, 앞뒤 안 보이는 낯선 공포를 통과하고 난 전후에 어떤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일까?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 인류학』에서 아프리카 렐레족의 통과의례를 소개하면서 먹음과 공포, 성숙의 의미를 언급한다. 렐레족은 부족 젊은이들을 괴물에게 잡아먹히도록 함으로써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한다. 이들의 괴물은 어떤 존재인가? 렐레족은 극단의 이분법적 상징으로 자신들의 삶을 구성하는데 그 마을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공간 구성이나 가옥의 모습에서 렐레족의 시공간에 들어왔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사회관계나 동물 분류의 체계 전반에 걸쳐서 이분법이 작동해서 개나 닭과 같은 가축은 ‘오른쪽=남자=인간’으로 분류되고, 쥐와 같이 해로운 짐승은 왼쪽=여자-동물성에 배치되어 양자 간의 어떤 뒤섞임도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를 철저히 규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회에서 통과 의례가 있을 때에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천산갑(穿山甲 manis tricuapls)을 먹는다. 천산갑이 어떤 동물인가? 전신이 비늘로 덮여 있는 포유동물이다. 비늘이 있다면 물고기일텐데, 당황스럽게도 천삽갑은 나무를 잘 탄다. 모습은 양서류처럼 보여서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키운다. 게다가 여타의 동물들이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 것과 달리 사람처럼 한 번에 한 마리만 낳는다. 천산갑은 엄격하게 이분법을 추구함으로써 부족사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렐레족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바로 이 천산갑을 함께 먹음으로써 렐레족 남자들은 그들 사회를 지탱하는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통과 의례에서 렐레족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구성하고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사고의 체계 자체를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일인 것이다.(흥미롭게도 이 천산갑이 코로나19라고 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의 중간 숙주라는 의견이 있어 지금 상당히 관심을 받고 있다.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견고한 종간의 장벽을 넘나들게 하는 괴물.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괴물의 출현은 인류학적으로 반복되어온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카자와 신이치는 렐레족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고한 이분법적 질서가 실은 천산갑과 같은 유동적 세계로부터, 그 무한한 힘의 교류와 역동적인 의미 생산의 영역으로부터 출현했음을 잊지 않으려 한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곳에서는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식물과 동물 등 일상을 가로지르는 온갖 질서가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거듭한다. 원시 부족이 공동체의 입사 의례를 통해 거듭거듭 온간 경계들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무시무시한 영역으로 들어갔다 나오고 했던 까닭은, 그들 삶을 지탱하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활활 끓어오르는 생멸의 에너지원으로부터 새롭게 영양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어둠, 말이 태어나는 장소  

    

렐레족의 통과의례를 참고로 해서 헨젤과 그레텔의 숲을 다시 해석해보고 싶다. 그레텔은 마녀를 아궁이에 툭 밀쳐 넣는 용기를 발휘하여 오빠를 구하고 무사히 집으로 귀환하게 된다. 마녀의 부엌에서 그림자 노동을 열심히 하던 그레텔은 이 지점에서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되는데, 마녀의 집에서 나오는 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기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숲을 헤쳐 나갈 길 또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갑자기 안보이던 것을 보게 된다. 과자만 있는 것처럼 보였던 집 구석구석에서 보석도 발견한다. 그레텔은 보석을 들고 마녀의 집을 나오자마자 또 다른 능력도 얻게 된다. 숲 속의 다른 동물들과도 대화할 능력! 헨젤과 그레텔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뒷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림 형제가 채록한 이야기의 원형에는 아주 흥미로운 후일담이 하나 붙어 있다.(『그림 형제 민담집』(현암사) 참고) 

   

마녀의 집을 나오자마자 그들은 커다란 시냇물을 만난다. 난처한 그들 앞에 하얀 오리가 헤엄을 치는 것이 보인다. 이때 그레텔은 대뜸 오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오리야, 오리야, 그레텔과 헨젤이 여기 있단다. 징검다리도 나무다리도 없구나. 우리를 네 하얀 등에 태워 주렴.” 아무리 동화라고 하지만,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어찌 이리 당당할까? 이제 오빠 손을 잡고 징징거리기만 했던 여자 아이는 없다. 그레텔은 이제 자기 입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언어를 갖게 되었고, 그것을 이용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자기의 곤경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한다. 그러자 오리가 대가 없이 자신의 등을 내어 준다. 

    

그레텔과 오리 사이에 이토록 부채감 없는 신뢰가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지점에서 독자로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형제가 숲 속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기면서 살 길을 찾았다는 점이다. 헨젤과 그레텔은 숲과 계모라고 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개별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의 집에서 살아 나온 그레텔에게 더는 그들만의 규칙이 필요하지 않다. 갑자기 나타난 오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그레텔은 숲의 모든 존재를 신뢰한다. 그레텔이 오리를 찾는 모습은 그녀가 자신의 보석을 어떻게 쓸지도 짐작하게 해준다. 오리에게서 도움을 그냥 받은 만큼, 그녀는 굶주리는 누군가를 위해 ‘그냥’ 일하게 될 것이다. 그레텔의 당당함은 그녀 자신과 숲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왔다. 그레텔은 마녀의 숲에서 죽다 살아났던 자신을 생각하며, 숲 속의 모든 존재들이 그와 같은 혼돈의, 어둠의 자식임을 깨달았으리라. 한때 우리는 뒤섞인 상태로 무한히 교감하며 생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레텔의 언어는 인간만의 언어, 마을의 언어가 아니라 숲의 언어였다. 



어둠을 찾아서  

    

코로나 19로 사실상 <신비 아파트>만 날마다 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들은 같은 회를 몇 번이고 더 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때마다 더 신기한 대목을 발견할 자신이 있어 보인다. 더, 더, 더 어두운 이야기를 달라! 아이들은 자신들이 열광하는 이 아파트에 귀신 마를 날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러더라 해도 티비 속 세상이다. 티비를 끄면 다시 엄마가 보호해주는 안전한 집이다. 아이들은 그 모험이 한시적인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고, 신비가 출몰하는 아파트란 현실 어디에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근대 이전 인류의 지혜는 어둠을 통과하는 자만이 성숙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 아이들의 어둠은 어디에 있을까? 어둡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더 이어가봐야겠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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