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동화, 말의 마법

동화, 말의 마법



동굴의 금기  

    

아이들과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뒷산이며 동네 공원이며 계속 나가게 된다. 지난 주말에는 문경 석탄 박물관에 다녀왔다.(‘문경 에코랄라’) 이곳에는 1963년에 석탄을 캐기 위해 뚫어 1994년 문을 닫은 은성 광업소가 있던 곳이다. 석탄을 파기 위해 들어간 갱도 전체 전체 길이가 무려 400km나 되며 깊이는 최고 800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하루에 3교대로 일했고, 이곳에서 일한 광부의 수는 모두 4,300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광산마을을 재현해 놓은 곳과 아이들 놀이터가 있고, 전기 모노레일로 광산 뒤쪽 언덕을 조금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조선, 고려, 통일신라 시대 사극이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배경 세트장도 있어 천천히 구경할 만했다.

    



석탄 박물관은 처음에 석탄기의 형성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준다. 석탄기 지구의 식물 화석들은 아름답기도 하고 강력하기도 했다. 석탄을 통해 일으켜 세운 근대문명은 지구의 역사를 빨아먹으면서 제 힘을 키웠다. 박물관의 2층에서는 광부들의 업적과 노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중에 광부들의 일상적인 금기어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출근할 때 여자가 가로질러 가면 출근하지 않는다’, ‘출근하기 전 여자가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등. 흥미롭게도 결정적인 금기들은 갱도에 내려가기 전 여성을 보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채광은 여성에게 극히 배타적인 일이었나 보다. 왜 그럴까? 친구에게 내 이런 궁금함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뱃사람들에게도 비슷한 금기가 있다고 한다. ‘여자는 배에 탈 수 없고 출어 직전에 여자가 나타나면 조업을 포기한다.’ 채광은 땅 속에 들어가서 지구의 깊은 속살을 헤치면서 사람들을 먹이고 살릴 보물을 캐어나오는 일이다. 어업은 광폭한 바다를 누비며 얕거나 깊은 바다의 생물들을 데리고 돌아와야 하는 일이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져야 하는 이 원초적인 투쟁은 왜 여성에 대한 금기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나카자와 신이치는 라스코 동굴 벽화 안에 저 유명한 고대의 비너스상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굴 바로 밖에 햇빛이 잘 들고 느긋하게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도 있는 발코니에는 다산의 상징인 관능의 비너스가 장식되어 있는데 말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라스코 동굴이 원시인들의 제례 공간이었으며, 그 안에서는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고 순치시켜서 인간에게 이롭도록 하기 위한 의식이 치루어졌을 것인데 그 주체는 남성이었으리라고 본다. 생멸을 주도하면서 존재를 일으키고 무너뜨리는 자연은 여성으로, 그 힘에 맞서는 인간의 사유와 문화는 남성으로 젠더 배치시킴으로써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예술로서 자연과의 대칭적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인도에서 남성 탄트라 수행자들이 만다라를 제작할 때는 여성이 준비한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으며, 여자들의 팔찌나 발찌 소리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 수 있다.(이반 일리치,『H2O와 망각의 강』, 36쪽 각주 8) 

    

이것은 나카자와 신이치 개인의 상상만은 아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탐사했던 남아메리카의 보로로족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보로로족은 장례를 위해 대규모 집단 사냥에 나선다고 한다. 죽은 자를 앗아간 자연으로부터 보속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인데, 이 사냥의 결과로 획득한 사냥감이 보로로족의 잃어버린 인격을 보충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장례가 시작된다. 이때 마을의 여성은 철저하게 장례의 방관자가 된다. 그들은 멀리서 관조할 뿐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러한 장례 문화를 통해 보로로족이 자연을 여성화함으로써, 부족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질서와 자연의 상태를 철저히 구분하려고 했음을 발견했다. 이때 보로로족에게 문화는 곧 남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여성을 폄하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은 말 그대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원초적인 풍요로움의 세계 즉, 자연에 속해 있다. 보로로족이라면 자연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개발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이 아주 부드러운 도구로 달래고 또 달래면서 조심스럽게 일굴 때만이, 대지는 품고 있는 곡식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허락한다. 인간의 문화는 생명의 근원적인 힘에 존경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 자연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땅 속 깊이’ 혹은 ‘바다 멀리’란 인간의 문화와 자연의 야수성이 있는 힘껏 부딪치게 되는 지점이다. 이 무시무시한 마주침에 들어가는 광부와 어부는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문화적 능력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갱도에 내려갈 때나 닻을 올리기에 앞서 이들은 일상의 여성성을 경외시함으로써 그 자신을 더욱 순결하고 경건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석탄 박물관 체험은 갱도의 일부를 탐방하고 나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 나오니 울울창창한 숲이 우리를 놀래킨다. 아! 깊은 푸르름! 도시적 삶에 길들어 있어서 그런지 땅 속이라는 원시적 공간에서 나오면 바로 문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동굴 밖은 또 숲이다. 우리가 더듬고 헤매어야 할 곳은 끝이 없다. 

  


동화의 언어

    

나는 광산의 금기들과 함께 동화의 언어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동화는 정말 많은 금지가 작동하는 세계이다. 바로 앞 회에서 우리가 읽었던 「트루데 부인」에서처럼 주인공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같은 금지에 묶여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이 금지의 대부분이 주인공들에게 명령어로 주어진다. 동화는 언어의 주술성이 강렬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럼, 이 세계의 언어에 어떤 특징이 발견되는지 정리해보도록 하자.

    



① 우선 동화 속에서 나오는 말들은 의사소통적이지 않다. 소위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세팅을 보자. 언어를 나누는 사이는 인간들만이 아니다. 이 테이블에는 마녀, 늑대, 사냥꾼, 소녀, 개구리, 고양이 등이다. 이보다 더한 다문화적 상황이 있을까? 아! 있구나. 빙하타고 내려온 공룡, 타조, 아기 등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 가정인 아기공룡 둘리네. ^^ 우정의 대명사인 ‘브레맨 음악대’는 가히 고길동 씨네 집을 닮았다. 개, 나귀, 고양이 등 이들은 종적 차이를 넘나들면서 만나고 헤어진다. 모두가 알아야 할 정보 같은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는 존재들도 없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그것은 존재 개개인의 몫이어서 누군가에게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예 짐작조차 안 되기도 한다. 언어 자체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매체가 아니기에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알아듣지 못한다. 혹은 듣고도 못 들은 척 해야 한다. 

    

「까마귀」라는 이야기를 읽어보자. 한 사나이가 나오는데 그는 도둑의 농간으로 두 눈을 잃게 되지만 십자가 아래에 있다가 우연히 까마귀들의 말을 듣고 목숨을 구한다. 병든 공주를 고치려면 연못 속 두꺼비를 태워 먹여야 한다는 점,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두 눈을 문지르면 시력을 되찾는다는 점. 순진한 이 사나이는 눈이 멀게 되자마자 자연의 비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그림 동화에서는 ‘눈’이 사회적 질서를 상장한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인간이 자연의 말을 듣는 것에 분개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이유 없이 훼손되는 것을 꺼린 까닭이다. 결국 까마귀들은 탐욕 때문에 자기도 무슨 덕을 볼까 십자가 밑에 자리를 잡고 앉은 도둑의 눈을 뽑아 버린다. 「까마귀」는 세계의 다양한 언어군들을 설명해준다. 인간의 언어와 까마귀(자연)의 언어는 이질적이며, 자연의 언어를 바로 취했다가는 커다란 위험이 발생한다. 이런 동화의 언어관은 무릇 모두가 ‘글자를 알아야 한다’는 식의 국민교육적 발상과는 잘 맞지 않는다. 또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언어를 소유할 수 없다. 눈을 잃으면 자연의 언어를 듣게 되지만 눈을 얻으면 또 자연의 말을 못 듣게 되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이질적인 언어의 층위를 넘나들 줄 아는 존재가 주인공이 된다. 『장화 신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 주인 셋째 아들처럼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알아야 왕국에도 가고 공주님과 결혼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이언어적 횡단성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개구리와 독수리의 언어계를 종횡무진 넘나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학교사도 훌륭한 어학교제도 아니다. 오히려 동화는 이처럼 이종 횡단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언어를 상실하는 일이라고까지 한다. 인어 공주가 말을 잃고, 소녀가 백조로 변한 오빠를 구하기 위해 가시옷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 자기 입으로 말할 줄 모르게 된 자, 그런 존재야말로 말들을 횡단한다. 

    

여기서 다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동화는 이러한 헤테로-링구얼한(異言語的) 상황을 주인공과 함께 호모-링구얼(單一言語的)한 것으로 바꾸는 것은 거절한다. 이질적인 언어의 차원이 유지되어야 한다. 죽음은 죽음으로, 마녀는 마녀로, 빨간 모자는 다시 집으로, 신데렐라도 제 왕국으로. 저주에 걸렸던 모든 이들이 결국에는 제 자리를 찾는 것이 동화의 문법이다. 이 제 자리라는 것이 선하고 악한가에 대한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악하다 할지라도 그 자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동화 속에서 도둑들의 소굴이나 마녀의 집이 불타기는 하지만, 그들의 악마성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인은 벌 받지만, 동화가 무한한 만큼 악마적인 존재들도 무한히 되돌아온다. 이 경계가 완전히 뒤섞이게 되는 것에 대한 거절은 「트루데 부인」을 통해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죽음을 보고, 죽음에 대해 말하고, 죽은 자의 집에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 

    

언어와 관련해서는 인어 공주가 더욱 잘 보여준다.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말을 포기했던 인어 공주는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대부분의 동화가 왕자가 저주 받아 개구리가 되거나, 공주가 저주 받아 잠이 들었다가 원래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인간 문명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화의 심층 의식은 인어가 인간계로 넘어오는 것을 금지한다. 뒤섞일 수 없는 질적 차이가 보존되거나 생산되어야 하지 중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언어적 횡단성을 갖게 된 주인공들이 결국 왕이나 왕비가 되는 것은 이 능력의 목표가 왕국의 아주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데에 있음을 의미한다. 숲이나 마녀의 세계, 죽음의 저 편을 공격하거나 정복하는 것과 같은 문제의식은 아예 동화의 세계에 들어오지를 못한다.      

    

② 동화 속 언어의 두 번째 특징은 신체적이라는 점이다. 동화에서 말은 존재의 생김과 행위 양식을 결정한다. 말은 주체의 의식이 낳는 생산물이 아니다. 말을 낳는 것은 상황이며, 조건이 허락할 때에만 나는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하기의 주요 맥락은 상대방에게 도움 청하기 형식을 띈다. 이때 상황 자체가 너무나 절박하게 제시된다. 내가 죽을 뻔한 상황, 존재 자체가 해체될 듯한 절박함이 말을 만드는 것이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렇듯 동화는 언어의 발생을 도움을 구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를 전혀 예상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저 곤란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오는 하나의 외침. 그것이 말이다. 당연히 응답은 예상할 수 없다. 생쥐와 원숭이와 곰이 나를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내 말이 효과를 얻을지 말지는 내 의지와 무관하다. 그래서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원망할 수가 없다. 만약 동물들이 부름에 응해준다면? 땡큐다. 바로 그때, 나는, 산다. 그렇게 동물들 덕분에 살게 될 때 말은 신체의 소멸과 부활을 견인하는 장치가 된다. 이처럼 말은 살기 위해 똑같이 발버둥치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태어난다.  

    

③ 동화 속 언어의 세 번째 특징은 주술성이다. 언어는 재현하지 않는다. 누군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언어의 목적이 아니다. 재현하는 언어를 상징하는 것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거울이다. 거울은 마녀가 묻는 말에만 답할 수 있다. 뭔가를 보고 되비춰주는 거울의 언어란 묻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못 보는 언어이다. 반면 예언적 기능을 가진 주술적 언어는 그 힘의 풍요로움과 변형력으로 주인공들을 기겁하게 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열 여섯 살이 되는 해에 바늘에 찔리리라는 말을 ‘받는다.’ 이 주문은 주문을 건 존재 외에는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이 주문은 누구의 것일까? 주문을 건 마녀의 것인가, 주문에 걸린 공주의 것인가? 주술을 통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동화 속에서는 현실 다음에 그것을 묘사하는 말이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먼저 있으며 현실이 말에 맞추기 위해 조정된다는 점이다. 

    

주술의 기능은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사악하고 추한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데에 있다. 말은 주인공을 도처의 세계에 가리지 않고 연결시켜 준다. 때문에 주문의 실행에서는 주술을 건 자나 받은 자가 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바늘에 찔린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너무나 넓고 다양하며, 그 중 어떤 것을 실행시킬지는 오직 공주가 어떤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른다. 게다가 주문은 얼마든지 비틀 수 있다. 착한 요정들은 이 악독한 주문에 다양한 뉘앙스를 부여했다. 덕분에 공주는 바늘에 찔린다고 하는 말의 사슬에는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예뻐지고, 똑똑해지고, 친절해지는 복을 누리게 된다. 주술과 주술이 오버랩되고 서로를 간섭하면서 공주의 운명은 예측불가가 된다. 이처럼 주술의 강력함은 숲이라고 하는 카오스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면서 그 풍요로운 실행력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삶에 긴장과 생기를 동시에 부여한다. 

    


이야기는 죽음과 싸운다 

    



지금까지 여러 존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지고 동화 언어의 성격을 정리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이 있다. 동화라고 하는 언어에 대해서다. 사람들은 왜 동화를 읽을까? 『그림 동화』에서 이야기의 본질을 다루는 작품이 하나 있다. 「도둑과 세 아들」이다. 왕년에 잘 나가던 도둑이 개심하여 착실하게 살려고 하나, 그의 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훔치고 빌어먹고 살겠다고 한다. 겁도 없는 이 아들들은 결국 마녀의 심기를 거느리게 되는데, 마녀는 만약 도둑질의 전 생애 동안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 세 개를 이야기해준다면 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도둑질하는 아들 따위 구해줄 필요는 없지만, 어쩐 일인지 입이 근질거렸던 아버지는 결국 연결되는 사건 세 개를 이야기해주고 세 아들을 살린다. 그렇다. 너무 비슷하다, 바로 『천일야화』이다. 왕에게 잡혀 먹는 처녀들의 죽음을 멈추기 위하여, 또 자기가 살기 위해 밤마다 이야기를 이어갔던 세헤라자데의 모험이랑 똑같다. 『천일야화』는 필멸의 인간이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의 불멸성 속에서 울고 웃는 것이라고 했다. 「도둑과 세 아들」역시 마찬가지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럼 도둑은 어떤 이야기로 자기 아들을 살렸을까? 남의 것을 훔치는 것에 능했던 도둑은 어쩌다 만난 불쌍한 한 여인과 그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식인귀의 노획물로 던졌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도둑이 이웃사랑에 투철한 도덕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둑은 자신이 그동안 훔친 그만큼을 자기 목숨으로 갚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형평성 맞는 교환이 있었기에 도둑은 도둑질의 업을 털고 새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야기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동화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숲에 다가가야 할지, 어떠한 존재들과 함께 사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죽음까지도.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죽음에 완전히 자신을 넘겨주지도 말아야 한다. 동화는 바란다. 이 삶 안에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기입함으로써 죽음이 삼키고 있는 온갖 상실들이 보완되기를.    


글_오선민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