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동화인류학] 신데렐라는 왜 재투성이인가?

신데렐라는 왜 재투성이인가? 



나는야 주인공! 


개학이 연기되는 바람에 매일매일 넷플렉스에서 영화를 보게 된 둥순과 둥자는 ‘토토로’를 시작으로 ‘포뇨’, ‘키키’, ‘센과 치히로’를 통과해 가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그 위험천만의 모험들 안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어머나, 주인공들이 모두 우리 같아!’ 엄마를 잃어버리거나 집을 떠나는 소녀들? 요괴와 꿈으로 뒤섞인 불확실한 세계에서의 모험들? 집 안에서 주는 밥 먹으며 뒹굴거리는 둥시의 팔자가 치히로를 닮았다구? 세상의 중심이 자기입네 하면서 차고 넘치는 애미의 사랑에 빠져 사는 이 공주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이야기, 민담, 동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 소녀들이다. 이들은 문득 이 세계에 떨어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에 휩쓸린다. 갑자기 죽어버리는 엄마, 갑자기 덤불로 변해버리는 집. 둥시는 토토로의 세계를 귀신이 출몰하는 신비한 아파트 이야기와 비교하기도 한다. 퇴마사가 우글거리는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도 소녀요, 그녀의 무기는 오직 무대포의 용기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친구에 대한 우정에서 나온다, 부모의 품에 대한 갈망에서가 아니라. 미야자키와 신비 아파트의 우주에서 모두 부모의 역할은 극히 미미하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둥시가 매료되는 세계는 무엇보다 안락과는 거리가 먼 시공간이라고 하겠다. 이 세계는 단순하지 않으며, 여기에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평면적이지 않고 몇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결들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여자 아이들인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대개는 어른의 눈에는 낡은 시골 아파트나 텅 빈 들판으로 보이지만) 소녀들의 눈에는 예측불가능한 존재가 시시각각으로 튀어 나오는 별난 세계로 보인다. 치히로의 아빠와 엄마는 돼지로 변하고서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점을 잊는다. 세계가 몇 겹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은 알 수 없다.     


둥순이와 둥자가 이들 소녀들에게서 발견한 또 하나 멋진 점은 그들의 코스튬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난 뒤에는 특히 주인공 소녀가 할머니로 변하는 장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어 했다. 아,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예쁘고 부유한 공주가 아니라, 누군가의 성을 쓸고 닦는 존재. 집 안의 온갖 식물, 아이들, 일하고 돌아온 하울을 씻기고 먹이는 존재. 그러고 보니 미야자키의 여주인공들은 대개 누군가의 옷을 빌려 입는다. 센으로 이름이 바뀐 치히로는 유바바의 욕장에서 직원의 옷으로 갈아 입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소녀는 해적 할머니의 몸빼 바지를 빌려 입고.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생각해보니 동화 속의 소녀들이 자주 옷을 바꾸어 입었다는 점도 떠오른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할머니로의 변신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 할머니라, 그림자 노동으로 갈고 닦인 할머니. 동화 속 주인공들의 옷이 깨끗한 경우는 정말 드물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그림자 노동을 하며 이야기 속을 돌아다니지 않는가? 불행한(?) 가정사 덕분에 구박과 천대에 익숙해진 그들은 그림자 노동에 시달려서인지 옷에 검댕이 늘 묻어 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그녀는 아예 아궁이의 온 재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닌다. 왜일까? 깨끗하지 않은 소녀들의 입성은 이들이 언젠가 백조가 될 때를 대비한 장막 같은 것일까? 재투성이들이라. 도무지 씻고 싶지도 않고 씻어도 소용없는 소녀들의 운명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둥시는 왜 이들에게 빠져드는 것일까? 



재투성이의 변신 

    

신데렐라의 검댕들은 그녀가 쉬지 않고 그림자 노동을 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도 불 옆에서. 불은 만물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부뚜막은 자연의 몇 질료들이 도구와 만나 음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물로 변형되는 실험실 같은 곳이다. 온 몸에 재가 붙어 있다는 것은 신데렐라가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고 세계의 온갖 힘들을 다른 방식으로 조형해내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신데렐라는 그 창발적인 힘들 속에서 신데렐라인 것이다. 때문에 그녀에게 요정이 찾아오고, 그녀 앞에서 쥐가 마부가 되고 호박이 마차가 된다. 신데렐라라는 고정되고 완성된 하나의 인격이라기보다는 늘 다른 존재로 바뀌는 사물들 속에서 자기 삶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의 옷이 더러운 것은 그녀들이 ‘깨끗함’으로 표상되는 정돈된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는 환하고 깨끗한 무균실이 아니라, 그들은 어둡고 더러운 온갖 영역으로 움직인다. 그러고보니 센도 유바바의 목욕탕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가마 할아범의 도움을 받고, 온천의 물을 덥히는 검댕 일꾼들과 친구가 되었다. 누군가의 밭으로, 누군가의 세탁실로, 누군가의 부엌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바꾸어내기 위해, 자신의 정돈된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먹이고 씻기기 위해서 그녀들은 늘 불 가까이에 머문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의 흔적을 온 몸에 붙이고 있다.

    




신데렐라의 검댕은 만물의 변화 속에서 그녀가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화는 이것이 원초적인 삶의 형태, 존재의 삶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만물. 동화는 이 ‘변화’의 힘을 주재하는 것이 신데렐라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 때문에 이 변화의 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다만, 어쩌다 불 옆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기회를 얻는다.(이 소중한 기회를 주신 계모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그리고 변화하는 것은 신데렐라만이 아니라 만물이다. 온갖 것들이 서로서로의 삶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먹으며 잘 살고 있다가 신데렐라의 이상한 운명에 말려서 마차를 몰아야 하는 쥐는 불행한가? 쥐도 어쩌다 신데렐라 옆에 있다가 그런 삶을 살아보게 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호박은 또 무슨 팔자로 마차가 되어 인간들의 괴상한 잔치에 끌려가게 되는가? 근대적인 의미에서 ‘개인’이 탄생하기 전에 채록된 이야기어서가 아니라, 진실로 이 옛이야기에서 신데렐라와 쥐, 호박은 자신들이 ‘어쩌다’ 처한 조건을 ‘때마침’으로 바꾸면서 후회도 자만도 없이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다. 

    

돌맹이 하나, 호박 한 덩이, 바람 한 자락. 집 안에서 몇 주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갑자기 발견한다. 아이들이 너무나 쉽게 심심함을 느낀다는 것도, 그것의 해결로 금방 텔레비전을 찾는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심심함이란 어떤 느낌일까? 해야할 것,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없는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심이다. 유사한 단어로 ‘지루함’이 있겠고, 반대말로 초조함이 있겠다. 만사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루함은 싹튼다고 할 수 있다. 둥순이와 둥자도 심심하다, 심심하다, 노래를 부른다. 자기 주변의 사물들이 각각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가 되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아, 계모는 너무 청소와 빨래를 열심히 했던 것이다! 책상이 있는 장소에서는 공부를 해야 하고, 이불이 깔려 있는 곳에서는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니! 쌍둥이는 호박이 마차가 될 수도 있는 세계 속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매일 갈아입으면서 온갖 불순물이 깨끗이 치워진 마룻바닥에 고상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엄마, 밥 줘! 하면서. 

    

신데렐라는 어떻게 부엌의 동물들, 도구들, 식재료들과 ‘함께’일 수 있었을까? 대상과의 관계에 활짝 열려 있을 수 있었을까? 고된 일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 덕분에 그에 결부된 많은 것들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부엌을 드나드는 모든 것들에게 마음이 가 닿기 때문에, 그녀는 그토록 빨리 쥐-마부와 호박-마차의 도움을 받아 이웃 성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둥순과 둥자에게는 할 일 없는 지루한 부엌이겠지만 신데렐라에게는 동틀 때부터 해질 때까지 벅차게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였을 것이다. 

    

신데렐라는 왕비를 꿈꾸면서 아궁이 옆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것이 아니다. 부엌에서 지내는 일이 그 자체로 재미있고 보람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른다. 할머니로 변한 소녀는 하울의 성을 쓸고 닦는 일을 그냥 했다. 부엌일이라고 폄하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이다. 자기 앞에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것. 미야자키는 그런 일을 숭고하게 그리지도 않았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라는 듯 당연하게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그런 부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부엌 없이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없다. 자기를 표현할 아궁이, 남을 먹이고 살릴 부엌을 찾지 못하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럼 엄마에게 부엌은 어떤 곳인가? 아이들에게 부엌이 있어야 하는 고귀한 이유는 둘째 치고 부엌을 끼고 사는 나는 어떤가 싶다. 지금까지 정말이지 삼시 세끼 찍어 내야 하는 일터에 불과했다. 대충 시간 맞춰 일하다 퇴근하고 싶은 직장 같기도 했다. 이 엄마는 재투성이처럼 옷 여기저기에 음식 얼룩을 묻히고 있지만 신데렐라는 아니었나 보다. 번듯한 상차림을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날마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고는 있지만 어쩐지 내 일이 아니었던 듯. 때문에 매끼마다 엄청난 음식 쓰레기가 나왔던 것이 아닐까? 음식이 계산도 없고 맛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신데렐라는 부엌일에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해야 되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을 했을 뿐이다. 자기도 먹어야 했고 계모와 언니들도 굶길 수 없었다. 쥐와 호박이 자신의 삶을 채우고 있으니 그것들도 소중히 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왕비라고 여긴 탓에 아궁이를 부끄러워했다. 나를 표현해야 할 곳이란 모름지기 모두가 우러러 보는 무대여야 한다고 생각했던가. 그러고보니 사실 둥순과 둥자에게 부엌은 심심한 곳이 아니다. ‘제대로 된 밥 한끼’라는 목적의식이 없다면 그 자리는 많은 사물이 자리잡고 움직이고 일하는 자리일 테니까 말이다. 부엌을 내어준다면 둥순이와 둥자는 환호성을 지르겠지. 그들은 기꺼이 재투성이가 될 것이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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