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인류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 엄마가 동화를 펴 든 까닭은?
저는 쌍둥이 엄마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인생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되지요. 먹고 숨 쉬는 일에서부터 싸고 잠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손길을 거쳐서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매일 새롭게 발견합니다. 사십 평생 키워 온 나의 욕망이 실은 온갖 사회적 관계망의 산물이며, 자연이라고 하는 더 넓고 깊은 대지를 양분으로 한 것임도 순간순간 깨닫습니다. 한 마디로 ‘내 운명의 주인은 나’라는 말을 밑바닥에서부터 의심하게 됩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온갖 육아서를 독파하며 더 잘 키우는 기술을 연마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제가 읽은 많은 지침서에는 육아가 엄마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성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이란 계속해서 쏟아지는 ‘정보’를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느냐 였지요. 쓸고 닦고 좋은 것 찾아 먹이고 이렇게 교리처럼 반복되는 ‘엄마의 애정이 최선’이라는 명제에 지칠 무렵, 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누구도 엄마랑 안 사는데? 그렇습니다. 시야를 넓혀 보니 정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집이 아니라 길 위에, 엄마가 아니라 마녀나 난장이들과 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심지어 그들의 옷은 누더기요, 그들의 잠자리는 쥐가 돌아다니는 아궁이 옆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 계모 밑에서 큰다는 점이지요! 동화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옛’의 범위는 인류의 역사를 망라합니다. 어쩌면 동화에는 잘 큰다는 것, 잘 기른다는 것, 나아가 잘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원초적인 통찰이 들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터 저는 엄마를 위한 교과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읽는 동화를 펴들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가 장화를 신고, 장화와 홍련이가 우물에 빠져 죽고. 산만하게 펼쳐져 있는 동네방네의 전설들을 읽으면서 ‘동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옛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길 위의 생’입니다. 온갖 동화를 가로지르는 것은 원하지 않아도 태어나고,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고, 그렇게 저주와 괴물과 함께 살아가는 길에 대한 통찰이었습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이라는 애정의 저수지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백설공주와 난장이는 가족이 아니며, 결혼을 한 공주는 동화 밖으로 사라집니다. 동화 자체는 타자들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흩어지는 사건사고만을 다룹니다. 핸젤과 그레텔이 숲 속에서, 마녀의 식탁 옆에서 겪는 일 그 자체에 ‘성장’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타자들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숲 속에서 난장이도 만나고, 독사과도 먹어볼 수 있었던 백설공주와는 달리 저희 쌍둥이는 튼튼하고 고집 센 엄마 품을 갑자기 벗어날 기회가 잘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둥순이와 둥자의 원초적 욕망은 백설공주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요. 벌써부터 방문을 쾅 닫고 둘이서 키득대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엄마 품을 벗어나고 싶어! 내 맘대로 하고 싶어!’ 쌍둥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욕망은 자립입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간다, 하면서 결국 길 위에서 머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이야기는 늘 집 앞에서 끝나잖아요?) 계속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서로에게 낯설어지는 것이 존재의 운명이기 때문일 겁니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지금 있는 곳이 스위트 홈이 아니라, 마녀의 집일 때에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치한 의존 관계가 아니라, 자립을 위한 동반자로서 함께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래애애서! 저는 계모 되기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 계모의 시선으로 날마다 사고를 치고 있는 둥순이와 둥자, 그리고 저를 관찰해보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이 나날을 정답이 있는 양육의 길로 생각하지 않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차고 넘치는 동화 속 모험처럼 생각하려고요. 그리고 이 과제를 해결할 지혜를 빌기 위해 많은 동화를 참조하려고 합니다. 제가 어떤 문제를 발견하게 될지, 어떻게 아이들과 함께 잘 살아갈 길을 찾게 될지는 예측불가입니다. 둥순아 둥자야, 아직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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