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읽기> 2강 후기
어머, 이건 꼭 들어야 해!!!
영화인문학 시즌2가 마침 7월말에 끝났다. 그리고 8월 첫 주부터 시작하는 들뢰즈/가타리-카프카 강좌는 ‘이건 꼭 들으라’는 계시 같았다. 그 부름에 응답하고자 휴가를 하루 줄이고 일요일이 돌아왔다. 지난 입문강좌 이후 다시 만난 두 사람. 들뢰즈/가타리와 성기현. 이번에는 친구를 한 명 더 데리고 오셨다. 앞뒤가 똑같은 ‘카프카’. 카프가, 카프나, 카프다, 카프라, 카프마, 카프바, 카프사, 카프아, 카프자, 카프차, 카프카, 카프타, 카프파, 카프하. 제일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카프카.
결국 내가 어디있느냐의 문제
이번 시간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소수문학의 핵심개념들을 다뤘다. 먼저 소수문학의 정의를 살펴보자. 먼저 ‘어떤 소수성이 다수 언어 안에서 만들어낸 문학’을 의미한다. 다수와 소수의 문제는 ‘숫자’의 많고 적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어떤 기준을 점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수와 소수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이동한다. 강의 때 나온 예로는 중년 여성이다. 여성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소수지만, 아이들에 비하면 다수가 된다. 그러나 그 여성이 이주민 중년 여성이라면? 결국 다수와 소수의 문제는 내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거대한 문학 안에 있는 모든 문학의 혁명적 조건’을 가리킨다. 이것 역시 특정한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어떤 조건들이 ‘소수적’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왼쪽에서 위로,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몇 권 없는 문학책이 빈약하여 거대문학과 문학의 혁명적 조건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대신 가수 ‘이랑’의 <임진강>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이랑은 대중음악상을 수상하고 그걸 돈 주고 팔겠다는 퍼포먼스로 음악보다 더 유명해진 대중음악가수다. 그녀가 부른 <임진강>은 ‘내 고향 남쪽 땅으로 가고파도 못 가’는 심정을 담은 북한노래다. 그걸 남한의 대중가수가 부르는데, 일본어로 부른다. 그리고 그 뮤직비디오에선 이랑이 그 노래를 수화로 부른다. 남한의 (음악상을 받은)대중가수가 북한노래를 일본어로 부르고 영상은 수화인 상황, 애매하고 뭔가 이질적인 그런데 다 알아들은 것 같은 이 상황이 떠올랐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링크 걸어둔다.
소수문학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사용되는 언어 그 자체로 높은 탈영토화 계수를 갖는데 주로 사용되는 통상적, 일상적, 클리셰 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반면 대한민국 수도권에 사는 중년 남성이 사용하는 서울말은 거꾸로 굉장히 영토화된 언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두 가지가 비슷한 맥락인데, 소수문학은 분야나 운신의 폭이 좁아서 언급되는 모든 것이나 개인적인 것이 곧바로 정치적이며, 집단적 가치를 갖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고정화시키는 방식의 글쓰기나 말하기의 경우, 오히려 다수적인 방법이므로 그것이 고착화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즉 별로 알아주는 이 없는 동천동의 문탁네트워크라는 공간에 소위 ‘문탁스러운’ 글쓰기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고착화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제발 그렇게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바램?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즐기는 스모우크핫커피, 한 잔만 더 주세요
그러한 소수문학의 언어 중 카프카를 예로 든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카프카가 사용하는 언어는 ‘문서 언어’인 독일어다. 그가 독일어를 탈영토화하여 취하는 방식은 빈곤한 그 언어를 빈곤한 그대로, 혹은 더욱 빈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형식화 되지 않은 완전한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성기현 선생님은 MOT의 노래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를 예로 들었다. 나 역시 MOT의 <Cold Blood>를 무한반복해서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자기 고유의 언어에서 어떻게 소수 문학을 이끌어 낼 것인가’의 문제는 이민자, 소수자들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MOT에 덧붙여 3호선 버터플라이의 <스모우크핫커피리필>을 추천한다. 이건 분명 한국말인데, 한국어가 아닌 것처럼 들린다. 무언가를 표현한 듯한데, 그게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걸 듣고 있으면 어떤 의미가 전달된다. 형식이 없이도 그 의미가 전달되는 아주 이상한 표현이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음......할말은 딱히 없다.
붉은눈시울망초
심장을누르는돌
붉은눈시울망초
뜨거운피귀뚜리피리
붉은눈시울망초
심장을누르는돌
붉은눈시울망초
지나가는흰구름이쓰는이름
<3호선 버터플라이, 스모우크핫커피리필 중에서>
들뢰즈/가타리-카프카를 이야기하는데, 문학이 빈곤한 나는 계속 음악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후기를 쓰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언어가 빈곤하다는 것은 표현이나 어휘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표현이나 어휘가 부족하다고 빈곤한 것은 아니다. 다수라고 생각하는 중년 아저씨들은 자신들의 빈곤한 언어를 인식하지 못하고 빈곤하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즉 빈곤은 소수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아니면 스스로 소수자라는 인식을 할 때부터 언어의 빈곤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결국 소수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빈곤한 것이 아니라 소수자임을 인식할 때 빈곤함은 드러난다. 사실 모국어를 사용한다고 그것을 늘 풍부하게 사용하진 않기 때문이다.
3장의 마무리 글에서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소수적이지 않은 혁명적 문학은 없다. ‘자기 고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 둘째, 언어활동의 다수화가 아니라 그것의 소수화가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수많은 문체들, 장르들, 문학 운동들이 한 가지 꿈’ -즉 국가 언어, 공식 언어, 시대를 대변하는 무엇- 꿔왔다고 지적하면서 소수자되기를 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전반부가 끝나고 후반부에는 카프카의 표현 기계 세 구성요소 중에서 ‘편지’부분을 배웠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편지는 그것을 쓰는 사람과 그 안의 내용 속의 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쓴 연애편지 속의 내가 상대에게 전달되어도, 상대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쓴 편지 속의 나를 만난다. 그러나 두 번이나 파혼을 한 카프카에게 편지는 ‘문학기계의 필수적인 톱니바퀴요, 동력장치’이다.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극도로 공포스럽지만 늘 누군가 옆에 있기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상상은 자신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자 살아가는 힘이 된다.
군대 있을 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펜팔편지가 그렇다. 상대가 꼭 애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여기에 갇혀 있으나, 나의 편지 속의 나는 그 담을 뛰어넘어 너에게도 갈 수 있다. ‘만남을 대신하는 편지의 흐름’, ‘하루에 두 번 편지를 쓰겠다는 악마적 계약’ 그러나 편지가 휴가나 전역 이후 실재로의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그 역시 또 다른 공포로 작동한다. 그래서 국군장병들에게 필독서로 카프카를 추천해 본다.
3강을 잘 듣고 나서 쓰는 후기의 결론부분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일기는 어떤가? 카프카의 편지에서 주체의 이중성을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 상대에게서 창조의 힘을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기는 편지처럼 글을 쓰는 주체와 글 속의 주체는 다르지만, 그것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즉 상대에게 피를 얻으려고 취한 주체의 이중성이 일기에서는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물론 그날의 일상을 기록하는 차원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왜 카프카는 일기가 아니라 편지의 형식을 동력으로 삼았을까? 두 번의 파혼과 끊임없는 함정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면서도 일기가 아닌 편지를 쓴 이유는 뭘까? 성기현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카프카는 유리벽에 갇힌 아이였다. 세상이 저기에 있으나 나는 저곳으로 갈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나에게 쓴 편지 같은 일기는 어떤 의미일까? 상대에게 보낸 나의 연애편지를 남에게 들키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일기장 역시 몰래 훔쳐보면 안 될 일이다. 군인들에게 카프카를 읽게 하자.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말자. 이것이 진정 2강의 결론인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글_청량리(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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