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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강의의 후기

by 북드라망 2020. 8. 11.

이 글은 문탁네트워크에서 진행 중인 <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 읽기> 강의의 후기로 작성된 글입니다. (강의소개바로가기)


들뢰즈/가타리, 카프카 읽기

'벌써 말 목덜미도 말머리도 없이'


'문탁'에, 강의에 이르기까지


비가 많이 온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는 창 밖을 보며, 기대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원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무엇을? 휴강을! 우리집에서 문탁네트워크까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간다면 무려 75km인데, 이 빗속에 가려고 한다면 갈 수야 있겠지만, 나는 뭐라고 해야할까... 내가 문탁에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마다 느꼈던, 그 꿀맛 같던 '여유'를 원했다.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 멀어도 상관없었다. 멀어진 만큼 내 여유의 길이도 길어질 테니까. 어린집 등원 시간에 쫓기고 하원 시간에 쫓기고, 낮잠 시간에 쫓기고, 밥 시간에 쫒기다가 맞이하는 심야의 여유 말고, 남들 모두 일하는 시간에 혼자 여유롭게 움직이는 그런 '여유' 말이다. 폭우를 뚫고 겨우 도착해서 꿉꿉한 옷에 젖은 신발에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한 책에, 낯익지만 여전히 몸에 달라붙지 않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에, 어딘지 멍해진 머리에... 블랙커피님이 건내주신 콜드브루 커피에... 마셔버린 주둥이에... 거부할 수 없는 후기 청탁에.... 끊겨버린 나의 퇴로에.... 잘가 여유야.

 



그렇게 어찌저찌 애써 여유를 찾았고, 앉았고, 미리 받은 강의안을 읽는데...

강의안을 보자마자 나에게 한가지 깨달음이 내려왔으니.... 그것은 내가 어쩐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왜 이 강의를 신청했던가? 그것은 사실 '들뢰즈/가타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카프카' 때문이었다. '차라리 공지 올라오는 걸 조금 기다렸다가, 세미나에만 들어갈 걸 그랬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기회를 통해서 매번 실패하고 말았던 카프카 읽기에 도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의 공지가 떴을 떄, 옳거니! 카프카! 하며 신청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 강의는 '카프카'에 대한 강의이지만, 사실은, 진짜 사실은, '들뢰즈/가타리'에 관한 강의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내가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법


들뢰즈/가타리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최후까지 남은 고전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먼저 한 시대의 문을 연 현대적인 철학자다. '고전적'인 이유는 그들의 사유가 존재론에서 시작해서 윤리학까지, 윤리학에서 정치철학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 철학의 고전적 모델을 고스란히 따른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현대적'인 이유는 그 사유가 고전적 철학의 전제들(물질-정신 이원론, 이성-정념의 이원론, 선악이분법, 계급이분법 등등)을 가루가 되도록 분해하여 철저하게 극복해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나는 푸코가 언제가 들뢰즈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할 때의 그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를테면, 강의 막판 질의응답 중에 선생님꼐서 들뢰즈/가타리의 '도주-이행-도주' 계열을 설명하면서 나온 '수동적 능동' 개념은 우리 시대를 정말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그것은 '자본'이 어떤 이유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이행해 가는지, '빅데이터' 담론과 '취향'의 절대화와 어떤 매커니즘 속에서 가능한지를 그 어떤 이론보다도 근본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다. 말하자면, 포획장치로서 자본은 철저하게 '기관없는신체'를 재조직 해 판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도주'는 자본의 본성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들뢰즈/가타리가 마치 경영학자들 같지만, 그들이 고전적 의미에서 '철학자'인 이유는 그러한 자본의 운동방식과 개별자(인간, 사물, 동물, 식물, 미생물, 먼지, 돌, 모래, 바람 등등등)의 운동방식이 근본적인 지점, 다른 말로는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그러니까 이 우주 전체는 언제가 '기관없는신체'가 될테고, 지금도 되고 있으며, '있음'이 있게 된 이후로 언제나 그렇게 되어 왔다. 이건 정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멋진 세계다. 지금 내가 가진 이 '형식'과 '표현'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기 때문에 이 삶에서 닥치는 그 어떤 슬픔과 괴로움 역시 절대성을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철학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적으로 무거워지는 삶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도주선'에 이르려면 절대 무거워서는 안 되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16년 전 군입대를 1년 앞둔 시점에서부터 아니면 그보다 몇개월 전부터, 그러니까 처음 들뢰즈에 관한 책(아마도 이정우,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읽었을 때부터 '들뢰즈빠'였다. 지금도 그렇다. 정말 놀라건 그렇게 오랜 세월 '빠'로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원래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한 김에 계속 하자면) 나는 어떤 의미에서 들뢰즈가, 들뢰즈/가타리가 '이해'를 일부러 피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이해'된다는 건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보자면 '포획'되는 것이고, 잠재성이 제거당하는 것이기도 하며, 삼각형 안에 갇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이해'가 아니라 그들이 펼쳐놓은 사유의 지대를 여러 번 통과하는 것이, 마치 여행하듯 이번에 여기, 다음엔 저기 하는 식으로 다니는 것이 더 적합한 독법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선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 통과마다 매번 다른 지대에 이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 이제 돌고 돌아 카프카로


들뢰즈/가타리는 네 권의 책을 함께 썼다. 『카프카 :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이하 『카프카 소수문학』는 첫번째 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와 세번째 작업 『천개의 고원』 사이에 위치한 작품이다. 어째서 '자본주의와 분열증'들 사이에 이 책이 끼어 있는 걸까? 좀 더 깔끔한, 중심과 주변을 전제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보자면 이 책은 '자본주의와 분열증' 앞에서 그 대단한 작품들에 사용될 '개념'의 주조장으로 쓰이거나, 그 위대한 저작들의 뒤에서 그 저작들에서 탄생한 개념들의 실증에 복무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도대체 어째서 태어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다만 확실한건 이 책이 하나의 실험장이면서 동시에 실험의 예제를 보여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될,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알아두면 정말 유용할 개념이 될 '배치'의 개념이 탄생하고, '오이디푸스'에 포획되지 않는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이용하면서 작품을 읽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걸 보여줄 작가로 카프카 보다 더 좋은 작가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1강의 강의 내용이 지시하는 바가 그것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강의를 듣는 내내 왜 카프카일 수밖에 없었는가 마음속으로 물었고, 강의 내용 전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렸다. 카프카처럼 '오이디푸스' 적으로 읽기 좋은 작가가 어디에 있으며 카프카처럼 그걸 산산조각 낼 폭발력을 내장한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보라, 여기에 거기로 들어갈 수많은 입구가 있고, 이분화 된 것 중에 한 눈에 보아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부수려고 한다. 오라, 나를 해석하라. 나에게서 '원형'을 찾아보라. 아마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았을 땐 이미 원형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구조가 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대응한다. 사실은 여럿이지만.

 

내가 매번 카프카 읽기에 실패했던 이유가 들뢰즈/가타리에겐 책을 쓴 이유가 되었다. 나는 사실 실험적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뚜렷한 서사가 있고, 인물이 서사에 종속된 '수목형 소설'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 '소설'의 본령에 충실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런 소설을 싫어하기도 한다. '재미'로 치자면 그쪽이 훨씬 유리하지만, 막상 읽고난 다음에 써먹을 수 있는 게 잘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 읽기에 매번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다시 달려드는 이유는, 매번 돌아오는 실패 속에서도 무언가 얻어걸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건 의미라기 보다는 느낌에 가깝고, 교훈이라기 보다는 어떤 상태에 이르렀다는 감각에 가깝기 때문이다. 1강의 내용에 비춰 생각해 보건데,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 소수문학』에서 한 일은, 자신들의 사유의 실험이고 동시에 '카프카'를 하나의 접속가능한 '기계'로 재조직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진짜 인디언이라면,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침내는 박차도 없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마침내는 고삐 없는 말고삐를 내던질 때까지,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다음어진 광야뿐일 때까지, 벌써 말 목덜미도 말머리도 없이.


- 카프카,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 전집 1권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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