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헨드릭스 『Electric Ladyland』
- 다들 늙지만, 이미 죽은 영웅은 영원히 젊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던가. 연합고사를 마치고, 학교까지 배정받은 상태에서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여유'를 즐겼던 그때가, 아마 맞을 것이다. 다들 학원에 다니면서 이른바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지만, 뭐랄까 '긴장감'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가 끝났다는 기분에 취해 다들 연체동물이 된 듯 헐러렁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나는 그 흔한 학원조차 다니지 않았으므로 그 시기를 온전히 '사춘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의 사춘기는 '주전자 속의 끓는 물'과 같았다. 몹시 뜨거웠지만, 어디 쏟을 곳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반항'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집에서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난 덕에) 반항 같은 걸 할 필요가 없었고, 학교에서는 얻어맞는 것이 두려워서 그저 눈치나 볼 뿐, 반항 같은 것은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생각이 나곤 했었다. 그렇다고 거리를 쏘다니며 미성숙을 분출하기에는 또래보다 아주 약간 조숙했던지라…,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어찌나 건방졌는지 (가소롭게도) 거리를 쏘다니는 또래들이 우스워 보였다. 그래도 어쨌든, 물은 끓고 있었으니 그걸 어떻게든 분출하기는 해야했다.
바로 그때, '로큰롤'이라는 것이 나에게 왔다.(훌쩍)
또래들보다 아주 약간 조숙해서 그랬던 걸까?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너바나'는 내 마음속에 씨앗을 심어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나에게 하나의 '통과점'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내가 몰두했던 것은 '고전'들이었다(지금은 너바나마저 고전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엔 그야말로 핫한 소장 밴드였다).
이 역시, '조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약간 더 건방져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는' 습성은 그대로 남아서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는 한데, 어쨌든, 그래서, 덕분에, 나는 또래들이 거의 듣지 않던 레드 제플린, 딥 퍼플, 티렉스, 레인보우, 롤링 스톤즈 따위를 듣곤 했다. 리치 블랙모어와 지미 페이지는 금세 나를 사로잡았고, 조금 길쭉한 물건만 있으면 기타를 치는 흉내를 내곤 했었다. 코드 하나 몰랐던 때이지만, 퍼포먼스는 그때가 가장 좋았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가, 드디어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고야 말았다. 그는 말 그대로 엄청난, 위대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타리스트였다. 배철수 아저씨도 매번 지미 헨드릭스 리퀘스트가 오는 날이면 그 점을 재확인했다. 음악 잡지도, 어쩌다 나오는 신문기사에서도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하면 언제나 그를 꼽았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는가 싶어 동네 음반가게엘 가보면, 판이 없다.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상상이 점점 커져서 나중엔 꿈에 나올 정도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 차에서 뭔가 기가 막힌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버지 말씀이 '이게 지미 헨드릭스야'라고 하시거나, 시나위 전국투어 콘서트에 갔는데 신대철이 '스페셜 깜짝 게스트'라며 지미 헨드릭스를 소개한다거나 이런 식이었다. 아마, 사춘기여서 가능한 꿈인 것 같기도 하지만, 요즘도 가끔 비슷하게 얼토당토 않는 꿈을 꾸는 걸 보면, 음……, 창피하니 그만 말하기로 하자.
그렇게, 그저 '기호'가 되어버린 '지미 헨드릭스'를 열망하던 어느날, 자꾸 가게에 와서 '지미 헨드릭스는 어디있어요?'라고 묻던 중학생이 신경쓰이셨던지, 레코드가게 '골든 디스크'의 사장님께서 지미 헨드릭스 음반 서너종을 한꺼번에 가져다 놓으셨다. 나로서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지만, 몽땅 수입 CD였으므로 한 장밖에 구입할 수가 없었다. 진열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집어든 CD,『Electric Ladyland』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들어오자마자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고 음반을 오디오 걸고 듣기 시작했는데…….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까. 기대가 너무 컷던 것일까. 도대체 킹왕짱 기타리스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저, 제 꿈에 나오셨던 그 분 맞나요?'
너무 어렸던 탓일까? 뭔가 막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도무지 뭐가 대단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그 대단한 영화라던 <시민케인>을 보았을 때 느꼈던 싱거움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CD는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오지 않을) 중3 겨울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밴드부에 들어가고, 기타를 사고, 놀다가, 공부하다가, 2학년이 되고, 뭐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라디오에서는 'Long hot summer night'이 나오고 있었다. 흥얼흥얼 거리는데, 이게 일년 반만에 이렇게 좋아질 수도 있는가? 흔히 말하는 '깊은 맛'이 느껴졌다.
그래서, 묻혀버린 음반을 뒤적거리면서 찾았는데 어째서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 우리집에 들락거리던 친구들 중 누군가가 빌려가서 가지고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빌려가야지' 하고 가방에 넣은 후에 다만 '빌려간다'는 그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만 않았을 뿐이거나 그랬을 것이다. 뭐든 간에 다 내 탓이다. 음반에 얽힌 나의 미신 중 하나가 그때 생겼다. 마음이 떠난 음반은 진짜로 떠난다는 미신이 그것이다.
음반은 떠났다. 아니 어쩌면, 가슴속에 피어오르던 나의 '로큰롤'에 기름을 부어놓고 사라진 것일수도 있겠다. 그날 당장 수중의 모든 돈을 털어서 지미 헨드릭스 베스트 음반 한장을 샀고, 고등학교 내내 주구장창 그걸 들었다. 떠나버린 『Electric Ladyland』는 내내 아쉬웠다. 똑같은 음반 한장을 더 살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그후로도 십년 넘게 『Electric Ladyland』음반만은 다시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꽤 어른이 된 후에야 그걸 다시 사게 되었다. 이번에는 악보와 함께. 생각해보면 그날 라디오에서 나온 'Long hot summer night'을 듣고 난 후부터 나의 기타는 늘 지미 헨드릭스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무심하게 '다른 정규음반이 다 있는데 『Electric Ladyland』만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하면서 음반을 다시 구입하고, 오래간만에 그걸 듣고만 것이다. 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가슴 속의 로큰롤에 다시 불이 붙었다. 기타가 다시 치고 싶어진 것이다. 쳐박아둔 기타와 앰프를 다시 꺼내고, 줄을 갈고, 듣고 따보려고 노력하다가 도무지 안 되어서 악보까지 사고 말았다. 물론 악보를 봐도 잘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안타까운 것은 '퍼포먼스'였다. 코드도 적당히 알고, 대충 박자 좀 맞추고, 솔로도 가까스로 따라하는 정도가 되면, 온몸이 굳어버린다. 꼼짝도 못하고 그저 기타에만 집중해야 '적당히', '대충', '가까스로'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지미와 더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참 연습을 하면서 생각했다. 아마, 내 가슴 속의 로큰롤은 영영 활활 타오르지 못할 것이다. 활활 타오르기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으니까. 지미 헨드릭스가 죽을 때의 나이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그래도 뭐 괜찮다. 괜찮아야지 어쩌겠나. 지미는 그대로다. 다들 나이를 먹고 늙지만, 죽은 영웅은 영원히 젊은 법이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장.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의 공통점은? 그렇다. 왼손잡이다. 어릴 때는 내가 '왼손잡이'가 아닌 것이 어찌나 저주스러웠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독특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마는 '사춘기'여서 그랬던 것이겠지. 그래도 여전히 '왼손잡이'들을 보면 부럽기는 하다. 저 사람이 기타를 배운다면, 나보다는 지미 헨드릭스랑 더 비슷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다. 영 이상한 생각인데, 아마 '로큰롤'과 뒤섞인 채 마음 한구석에서 살고있는 나의 '사춘기'가 남겨놓은 흔적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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