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산울림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in 1977-1966] - 이게 끝이 아니었다니

산울림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in 1977-1966] 

- 이게 끝이 아니었다니


가지고 있는 많은 음반들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많이 가는 그런 음반이 한둘쯤……, 아니 서너장쯤, 음……, 아니 열 몇장쯤 있다.(더 늘어날 수도 있을 듯하지만) 오늘 소개할 음반도 그런 음반들 중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매우 '스페셜하게 특별'하다. 말하자면 VVIP 같은 음반인데, 이었는데……. 무엇인고 하니, 밴드 '산울림'의 박스셋이다. 수록된 음반이 무려 8장이나 된다는 것 빼고는 특별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음반이 그렇게나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써놓고 보니, 음반이 8장이나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특별하기는 한 것 같지만, 어쨌든 두가지 사연이 있어서다. 하나는 이 음반을 구입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이고 두번째는 말 그대로 '컴플릿'인 줄 알았는데 결국엔 스튜디오 레코딩의 오리지널 복각판이 나오는 바람에 이 특별한 앨범의 위치가 애매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음반은 내가 산 게 아니다. 부자 아버지를 둔 오래 묵은 친구의 것이다. 십여년 전 어느날엔가 나는 그 녀석에게 이 음반을 빌렸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가끔 집에 놀러와서 이 음반을 보기도 하고 심지어 꺼내서 듣기도 하지만,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 녀석이야 요즘에는 딱히 음악을 열심히 듣는 것도 아니고, 10대 시절에 함께 공유했던, 나는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찬란했던 '록 스리핏' 따위는 이미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린 후인지라 내 뱃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음반을 봐도 무덤덤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먹은' 입장인 나로서는 간혹 찝찝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합리화 기재를 작동시키곤 하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이런 것이다. '이걸 그냥 돌려줄까? 아니야, 그놈도 스무살 때 내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CD들을 가져가서 그냥 먹어버렸잖아. 쌤쌤이지 뭐.' 그렇다. 쌤쌤이다.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나는 그 십여년 동안 중고 레코드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엄밀히 내 것이 아닌)이 음반의 중고 거래가를 확인하고는 흐믓해했다. 음반 가격은 10만원에서 20만원, 30만원까지 팍팍 치솟았다. 오해하지는 마시길. 내가 기뻤던 것은 이 음반이 가진 30만원 어치의 환금성이 아니다. 30만원 어치의 환금성을 가질 만큼 희귀해져 버린 음반의 희소성이 나는 기뻤던 것이다.(여전히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렇게나 기뻤다.) 그러던 어느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뉴스가 들려왔다. '산울림 스튜디오 앨범 복각 박스세트 발매' 소식이었다. '순수한 마음'에 입각해 보자면, 그것은 정말이지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다. 도무지 구할 수 없었고, LP로는 기백만원이 왔다갔다 하던 그 '오리지널' 음반이 복각된다는 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그런데, 그 박스세트가 나오면 이 박스세트는 그다지 원하는 사람이 없어질 테고, 가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제는 중고가가 고작 7만원밖에 안 하게 되었다. 


오리지널 복각 박스세트와 이 박스셋의 결정적인 차이는, 말그대로 '오리지널'이냐 아니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리지널 판'의 경우엔 70년대 출시 당시 그대로, 앨범아트와 곡의 배열을 CD로 복원한 것이다. 이 박스세트는 김창완 아저씨가 새로 편집하고, 리마스터링한 버전이 실려 있는데, 오리지널이 '원전'이라면 이것은 '편집본' 같은 격이랄까? '덕후'라면 당연히 전자에 끌리게 마련이다. '덕력'이 더 높다면 양쪽 모두를 가지고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세트로 만족하고 있다. 


오리지널 버전이 나왔을 때,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였지만, 아무래도 손이 가질 않았다. 그걸 사고 나면 마치 골룸의 절대반지 같았던 이 박스셋이 가진 빛이 홀랑 사라질 것 같았고, 그건 어쩐지 먹어버린 이 음반과 음반을 강탈 당하고도 별 말이 없는 친구의 고마운 무심함에 대해 할 짓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돈도 없었고……. 또 마침 그때는 전자음악에 미쳐있었기도 했고…….




'산울림'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야말로 획기적인, 요즘말로는 혁신적인 밴드였다. 훌륭한 연주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멤버 모두가 독학파), 그렇다고 로큰롤의 본거지인 영미권의 밴드처럼 그 시점에서 가장 세련된 록음악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한국의 유명 밴드들을 보면 '흠, 이건 00랑 비슷한데.' 같은 식의 '전범'을 찾을 수 있지만, 산울림은 지금까지도 그 어떤 전범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만큼 독특하다. 그 독특함 때문인지 언제 꺼내 들어도 이전에 꺼내 들었을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른바 '사운드의 절대 동안'이랄까. 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차라리 들을 때마다 새롭다가 적합한 말이겠다. 초창기 녹음들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이제 막 데뷔한 인디밴드 같은 느낌마저도 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오리지널 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반들을 펼쳐놓고 보면 배가 부르다. 꽉찬 구성에 전혀 퇴색하지 않은 빛깔! 한장 꺼내서 오디오에 걸어놓고 듣다보면, 미간을 찌푸리고 가슴을 쥐게 된다.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나온 거의 모든 음악들에 불만이 몇가지 있는데, 한가지는 이곡 저곡 가리지 않는 감정과잉이 부담스럽다는 점이고, 또 한가지는 묘하게 꼬인 이상한 발음 구사가 듣기 싫다는 점이다.(예를들면 '처럼'을 '춰뤔'이라고 발음하는 뭐 그런, 에잉) 자, 그러니까, 그래서, 바로 그 점에서 산울림의 노래들이 아주 좋다. 절제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노래에 내 감정을 쉽게 투사하게 되고, 담백한 발음으로 부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절절하게 와 닿는다. 최근에 한참 유행했던 '청춘'의 경우에서도 나의 취향은 아주 분명하다. 원곡과 리메이크 중 무엇이 더 나으냐? 비교할 걸 해야지…….(많은 경우 나는 '오리지널'을 더 좋아한다)




또 한가지 '산울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한가지가 있는데, 나는 ('음악' 말고) '노래'를, '노래'가 가진 의미랄지, 그런 걸 산울림을 들으면서 배웠다. 따라서 부를 수 있고, 가사에 나를 투영하고, 와중에 곡조와 가사가 딱 붙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감 같은 것 말이다. 나중에 김민기 1집을 들으면서도 느낀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은 역시 '산울림'이었다. '아니벌써' 같은 곡을 들어보라, 그 곡조에는 그 가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이 단박에 온다. 박스셋에 실린 수록곡들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감각이 유지되는 걸 보면, 김창완 아저씨는 천재일지도 모른다.(연기도 잘 하시고)


부자인 친구가 언제 이 음반을 돌려달라고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나는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지고 오면 돌려주겠다'고 해야지. 나는 안다. 그 놈이 나의 소중한 플레이스테이션1을 대학교 MT에 가져갔다가 잃어버렸다는 걸. 그리고 맹세하건대, 오리지널 복각판도 사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산울림은 여기, 특별히 특별한 박스셋 안에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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