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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CDLP) 스토리

스매싱 펌킨스 -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찾을 수 없는 것들

by 북드라망 2020. 2. 21.

스매싱 펌킨스 -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찾을 수 없는 것들



대학교 4년에 군대 2년, 도합 6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폴더가 주류이던 핸드폰들이 슬라이드로 바뀐 것 말고도(그때 나는 키패드를 찾지 못해 얼마나 놀랐었던가….) 크게 변한 것들이 있었다. 중, 고등학교 내내 들락거렸던 동네 음반가게(상호가 '골든디스크'였다.)가 사라졌고, '오늘의 책'이 문을 닫았으며, 신촌에 있던 '신나라 레코드'가 매장 평수를 줄여서 이전하였다. 이전하면서 호화롭기 그지 없었던 별도의 클래식 코너는 아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더 놀라웠던 변화는 음반가게 진열대가 상당수의 수입반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라이센스반 자체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인터넷'이 불러온 변화였다. 판을 사는 사람이 확 줄어버려서 국내 뮤지션의 음반도 안 팔리는 마당에 외국 음반을 찍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찾는 사람도 적으니 그냥 수입해서 파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정확한 사정은 나도 잘 모르나, 수입반 천지가 된 음반가게 진열대 앞에서 직관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입반'은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이는 단어였다. 음반 자체의 물리적인 품질이 좋기도 하고(뭐랄까 판이 좀더 두껍다고 해야 하나…), 부클릿의 인쇄품질도 더 좋았으며, 라이센스 되면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한 두곡 짤린(금지곡) 곡도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이유와는 별개로, '본토'에서 왔다는 그 느낌이 '수입반'에는 있었다. 이게 참 별 것 아닌데, 앞의 이유들과 맞물리면 적게는 3~4천원, 많게는 5천원에서 1만원을 더 주고서라도 수입반을 사게 된다. 


그나마 라이센스반도 있고, 수입반도 있는 것은 운이 좋은 경우다. 아예 라이센스가 안 되는 음반들도 있다. 오늘 소개할 음반이 그랬다. 스매싱 펌킨스의 『Mellon colli and the infinite sadness』. 금지곡 투성이였는지 어쨌는지 라이센스가 되지 않았고, 서울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지방 도시의 음반가게에서는 수입음반을 구하기가 어려웠었다. 




"90년대 '얼터너티브' 흐름 속에서 몹시도 중요한 위치를 갖는 밴드 스매싱 펌킨스의 초대작(超大作)" 같은 식의 잡지 기사를 보아왔던 나로서는 이 음반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전작인 『Siamess dream』 음반도 워낙 인상적으로 들었던터라, 단골 음반가게에 가서 이 음반을 찾았지만, 입고조차 되지 않았었다. 아저씨께 물어보니 주문하면 가져다 놓겠다고 하셨고, 장장 2주의 기다림 끝에 가게에 음반이 입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바로 구입할 수가 없었다. 『Mellon colli and the infinite sadness』는 더블앨범이었다. 당시 라이센스반 기준으로 더블앨범 가격은 대략 2만5천원에서 2만8천원, 비싸면 3만원, 수입음반도 3만5천원이었는데, 이 음반만은 어찌된 일인지 무려 4만천원. 손에 쥔 돈은 2만원 남짓이었으니 그만큼을 더 모으고 천원을 보태야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뭐 지금이야 다음 달 결제일 생각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카드로 '찍' 긁으면 그만인 돈이지만 당시로서는 야간자율학습 덕분에 받는 저녁값으로 우유만 먹으면서 열흘을 넘게 버텨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것도 지금이라면 더 잘 모을 수 있을텐데 그때는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는지….(더군다나 당시 학교 매점은 야심차게 저녁 특별 메뉴 '순두부'를 천5백원에 출시했었다. 마치 나의 '고난'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려는 듯이…)


음반가게 아저씨는 나의 주문만 믿고 악성재고가 될지도 모르는 수입반을 가게에 가져다 두셨던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게 앞도 지나기가 껄끄러웠다. 일부러 멀리 돌아서 가기도 하고 하면서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고, 결국 한달쯤 후에 그렇게 고대하던 이 음반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가게에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얼마나 두근두근 했던지. 국산과는 떼깔부터 달랐던 인쇄, 수입반 특유의 밀봉 스티커까지 붙어있던 케이스, 더블앨범 특유의(아니 다른 더블앨범들 보다 더했던) 묵직함까지. 보시다시피 앨범아트도 몹시 훌륭해서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오른쪽 하단에 떡하니 박혀있는 "printed in the usa"의 위엄.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본토', 'original' 이건 기호들에 목을 매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CD플레이어에 걸어놓고 돌리면 수입반이나 라이센스반이나 아무 차이없다. 물론 LP는 수입반이 확실히 내구성이 좋아서 나은 음질로 오래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CD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신호여서 바늘이 소리골을 긁어가며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플레이어 속에만 들어가면 다른 것이 정말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음반을 모으는 것은 확실히 음악을 듣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행위인듯 하다. 음반을 모으는 것은 물질화된 '기호'를 모으는 것이고, 그것을 소비하며 만족감을 얻는 행위가 아닐까. 



비싼만큼 구성도 상당하다...가 아니라, 뭐 그럭저럭이다. 보쉬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렸을 법한 일러스트가 수록된 부클릿과 별도의 가사집, 그리고 두장의 음반이 들어있다. 그래도 가사집에 조금씩 들어가 있는 그림이나, 손에 닿는 촉감, 가사집의 두께 같은 것들 전체적으로 고려한다면 아주 빠지지도 않는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스매싱 펌킨스는 90년대 한참 유행한 여느 얼터너티브, 그런지 밴드들과는 한참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이 사운드는 마치 60년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현대화 버전 같은 느낌을 준다. 거기에 약간 '환상적'인 느낌을 버무린달까. 정말 오래간만에 꺼내 들었음에도 전혀 낡은 감이 없다. 오히려 아직도 이 앨범이 2015년 '현재'보다도 앞서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약간 놀랐던 것은 '더블앨범', 그러니까 이 앨범의 '규모'를 견디지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처음 이 앨범을 들었을 때는 빼곡하게 실려있는 28곡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만큼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고, 트랙 하나하나에 놀랐었건만…. 사실 '더블앨범' 뿐이 아니다. '앨범'이라는 형식 자체를 견디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언젠가부터 꼼꼼하게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나, 애플에서 자동화해서 넣어주는 'Genius' 같은 형식으로 음악을 듣게 되면서 뮤지션이 '전체'로서 제시하는 작품인 '앨범'을 듣는 것이 낯설어지고 말았다. 


약 두시간 정도의 앨범을 집중해서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약간 씁쓸했다. '특별한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달까. 그런 씁쓸한 기분을 속에서 '수입반'에 집착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고, 이 앨범을 사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그 때가 생각났고, 결국 손에 넣어서 돌아오던 날이 생각났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는데…. 단 한순간도 2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지만, 이럴 땐 하루 이틀쯤 10대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 그러나 '골든디스크'는 이미 거기에 없다. 꽤 컸던 그 가게를 품고 있던 '길'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없어져 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나 설레하던 내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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