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구경꾼에서 생산자로’
안혜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왜 하필 글쓰기?’
2011년이 저물어가던 이맘때쯤이었던가, 처음 곰샘(저자 고미숙을 감이당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의 강연을 접했다. 곰샘의 또 다른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출간 기념 강연이었다. 그 당시 난 앞이 꽉 막힌 듯 막막한 삶에 돌파구를 이리저리 찾고 있었던 차였다. 그때의 강연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건 ‘글쓰기가 삶의 비전이자 구원’이라는 저자의 말이었다. 웬 글쓰기? 너무 비약하는 것 아닌가? 저자가 글을 잘 써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따위의 두서없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뜬금없게 느끼는 이런 내 맘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그로부터 8년이 지나 그에 명쾌하게 답하는 책이 나왔다. “… 아마 이 지점에서 좀 뜨악할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개혁하고 실천할 것이 많은데 하필 글쓰기야? 그렇다. 하필 왈 글쓰기다. 글쓰기만이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105쪽)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으로서의 글쓰기! 난 ‘웬 글쓰기?’ 하면서도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감이당 대중지성에 접속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만난 이 책,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는 읽고 써왔던 내 지난 여정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게 했다.
읽기의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동서양의 고전들. 사주명리, 『동의보감』, 『주역』을 비롯해 니체, 루쉰, 장자와 노자, 푸코, 인류학…. 읽기는 전방위적이었다. 혼자가 아닌 스승과 동료들과 함께 읽는 고전은 이전의 책 읽기와 달랐다. 바로 내 일상에 보탬이 되었다. 명리공부는 내 욕망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동의보감』은 내 몸이 어떻게 천지자연과 연동되어 있는지를 보게 했다. 처음 듣는 사상가들의 언어와 사유들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아의 벽 안에 갇혀 살아왔는지를 자각하게 했다. 이해할 수 없으면 없는 대로 감동을 주면 주는 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 생동감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고전, 즉 책이란 무엇인가? “책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늘의 경이와 땅의 후덕함, 삶의 비전, 그 모든 것이. 인류가 그 지도를 찾기 위해 해온 분투와 모험이, 지나온 길과 지나가야 할 길이 … 이것이 바로 별의 떨림이고 대지의 울림이다. 이 울림과 떨림 속에 인간의 살림이 있다.(앞의 책, 71쪽) … 길을 찾으려면 하늘과 땅, 즉 천지가 다시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천지인을 잇는 것이 진리다.(74쪽)” 그렇구나! 내 삶이 답답하고 막막했던 것은 ‘천지’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구나! 내 삶의 현장이 천지인을 잇는 진리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구나! 왜 내가 진작 이런 세상을 몰랐던가!
질문이 없는 구경꾼
감이당은 한 학기가 끝날 때면 꼭 글쓰기나 렉처(미니강의)로 그간의 공부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이때는 말 그대로 괴로움의 시간이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읽기는 그저 정보로 환원된다. 그 정보는 아무리 원대하고 심오해도 결국 존재의 심연에 가 닿을 수 없다. (……) 책이 신체와 접속, 감응하여 ‘활발발한 케미’가 일어나는 것이 쓰기다.”(62쪽) 처음엔 나름 쓸거리들이 있는 것 같았다.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쁨’과 놀라움만으로도.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알았다. 내게 질문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질문한다는 뜻이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그것이 앎이다. 그러니 질문이 없다는 건 책에 담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61쪽)이고 “가장 위험한 것이 질문은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158쪽)다.
난 고전을 정답처럼 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전이라 해도 그건 내 것이 아닌 남의 말이지 않은가. 스스로 그리는 내 삶의 지도가 아니었다. 천지의 이치를 한낱 매뉴얼로, 자족적인 위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고 말 정보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니었던가. 오십이 넘는 세월을 정답에 길들여진 ‘범생이’로 살아온 생각의 회로는 읽기용이었다. 책과 ‘활발발한 케미’가 일어나기는 커녕 쓰기 앞에서 막막하기 짝이 없는 ‘구경꾼’의 회로.--;; 글쓰기가 아니었으면 대충 넘어가고 말았을 뿌리깊은 자신의 심층에 대한 발견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어렵고 힘들다. 저자의 말대로 “글쓰기야말로 존재의 심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본래면목이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115쪽)
생산자가 되는 길
“인문학은 삶의 지도를 그리는 행위다. 적당히, 대충, 할 수가 없다. (……) 인생에 대한 탐구를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죽음에 대한 탐구없이 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갈 길은 없다. 죽음을 탐구하려면 삶이 달라져야 한다. … 몇 걸음을 가던 궁극의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108쪽)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 때 삶은 막막하다. 읽고 쓰는 건 자신이 가야할 궁극의 지평선을 발견하는 길이다. 그 길로 방향을 틀기 위해서도 읽기와 쓰기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은 그 방향으로 열심히 간다고 착각하지만 글을 써보면 아닌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위대한 멘토들-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공자, 노자-이 알려준 삶의 길은 유목과 출가와 혁명!이다. “유목, 출가, 혁명—하나같이 존재의 변환을 요구하는 키워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로 살아가기. 다른 존재가 되기.” 하여 이 비전은 “일상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이전과는 다른 곳을 향하는 것, 그리고 그 지평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 해서 ‘글쓰기로 수련하기’다.”(105쪽)
이들 인류의 멘토들이 이룬 ‘지혜’라는 무형의 자산이 지금까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서 잠시 멈추어졌다. 너무 당연하게 이 스승들의 양식을 받아먹어 왔기에. “그것은 마치 물과 공기, 그리고 밥처럼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자파처럼 미립자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한계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고 가늠할 수도 없다.”(169쪽) 저자인 곰샘은 일찌감치 이 지혜의 파동에 접속해 읽고 쓰고 말하며 지혜의 전령사 노릇을 해왔다. 인류의 스승들이 “시공을 넘어 지금까지 무수한 중생들을 ‘멕여 살리듯’”(169쪽), 읽고 쓰는 것으로서 그들의 ‘자비와 공감’을 실천하라고. 무엇보다 지혜의 전령사인 책을 낳는 생산자가 되라고.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는 저자 자신의 그러한 삶의 생산물이다. 동시에 이 책은 살아있는 지혜의 전달자가 되어 무수한 이들에게 스스로 삶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하리라. 삶의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되어. 읽고 쓴다는 것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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