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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두 번 읽은 책, 한 번은 삐딱하게 한 번은 호기심으로

by 북드라망 2019. 11. 19.

두 번 읽은 책, 한 번은 삐딱하게 한 번은 호기심으로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박연옥(글쓰기강사, 문탁네트워크 북앤톡 팀)



나는 십여 년째 대학에서 글쓰기강사로 일하고 있다. 교양수업이지만 글쓰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 강의평가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수업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과목이!). SNS에는 ‘책 출간을 쉽게 시작하는 코칭 클래스’와 같은 글쓰기와 출판 관련 프로그램 홍보가 언제나 한두 개쯤은 올라온다. 대학 안팎으로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넘친다. ‘1인1닭’처럼 ‘1인1책’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자신의 글을 쓰고 책을 내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의 저자 고미숙은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경제활동’(21쪽)이라고 말한다. 나의 경제활동도 저자와 다르지 않다. 삼십대에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로 나에게 허용된 밥벌이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지만, 현재 나는 가족의 경제력에 기대어 살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글을 써서 생활을 하려면 일 년 한 권씩은 책을 내고, 그 책이 이만 부 정도는 팔려야 인세로 이천만 원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연봉 이천만 원으로 생활하기도 쉽지 않지만,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 것도 그 책이 이만 부 팔리는 것도 내게는 요원한 일이다. 아마 글을 써서 살아가려는 이들 대부분이 이런 계산을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둘 것인가 알바를 구할 것인가 하는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이런 얘기는 확실히 우울하다. 


나는 요즘 우울하다. 우울한 나에게 이 책이 말하는 ‘밥벌이와 양생과 구도로서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거룩함과 통쾌함’은 너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개념과 정서다. 이렇게 품격 있고 호방한 문장을 떠올리기에 내 생활은 간장 종지만큼 얕고 협소하다. 어디에서 이런 간극이 발생한 것일까? 고미숙의 글쓰기와 나의 글쓰기는 왜 이렇게 다른가? “빅뱅에서 블랙홀까지, 존재의 심연에서 뉴런의 미세한 연결망까지”(155쪽) 가로지르는 그의 광대무변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글쓰기는 왜 이렇게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가? 이렇게 이 책의 독서는 원한의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삐딱하게 그리고 한 번은 호기심을 품고. 그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


고미숙의 문장은 명료하다. “일상은 튼실하되,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 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28쪽) 이런 명료한 문장은 그가 발 딛고 있는 지반을 보여 준다. 지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길을 찾아갔다. 무수한 인공조명으로 밤하늘의 별을 찾을 수 없는 오늘날 우리는 책이라는 GPS로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헤매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열하일기』, 『동의보감』, 『임꺽정』,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고 주역과 불경까지 고미숙의 GPS에는 별처럼 빛나는 고전의 목록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상을 GPS에 맞춰 리셋한다. 그래서 고미숙의 문장은 클래식하고 래디컬하다. 단박에 읽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운전이 미숙한 나는 GPS가 지시하는 대로 가지 못한다. 왠지 먼 길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고, 교통체증에서 자유로운 이면도로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GPS는 무용지물이다. 이십여 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살고 있지만, 책과 나의 일상은 엇박자다. 왜 책에서 읽은 대로 살지 못하는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힘은 크다.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함이 없다는 것이 무지의 가장 큰 폐해다. 어느 순간 나에게 “감히 알고자” 애쓰는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초보운전’ 딱지처럼 붙어 있던 그 마음이 언제부턴가 진부하고 지겨워졌다. 내 문장은 애매하고 잘 읽히지 않는다.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재미가 없다. 내 우울증의 원인은 돈이 안 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이런 답답함에 있다.


그래서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등등. 이것은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질문과 호기심과 앎의 욕구는 열국 언어의 회로, 문자의 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항심과 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항심이 시간을 통과하는 힘이라면, 하심은 어디서건 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131쪽


고미숙은 말한다. 자신은 소질이 없고 게으르지만 천천히 끈질기게 하늘의 경이와 땅의 후덕함을 읽기와 쓰기를 통해 터득해간다고.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곤 “앎에 대한 절실함과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는 체력밖에 없”(132쪽)다고. 고미숙의 문장이 늘 그렇듯이 그의 조언도 간명하다. 절실함을 가지고 묻고 읽고 쓰라. 이십년이니 이천만원이니 이만부니 의미 없는 계산은 그만두고, 체력을 기르라. 그는 용가리통뼈고 나는 물렁살이다. 맷집과 펀치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와 나는 확연히 다르다. 




11월 SNS 상태메시지를 ‘수렴과 집중’으로 바꾸었다. 나는 고미숙의 체력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되도록 오전에 한 시간쯤 공원을 걷기로 했다. 걸으며 오고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나무와 전단지에 관심을 갖기로. 그리고 그것들에 질문을 갖기로. 그런 시간들은 산만한 일상에 작은 규칙을 만들어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생활에 질서를 잡고 생각의 ‘차서(次序)’를 잡는 일로부터 근력과 항심을 길러보려 한다. 뼈가 튼튼해지고 발걸음이 가벼지는 그날까지. 


모든 거룩한 것들은 통쾌함을 선사하고, 통쾌한 것들에는 거룩함이 빛난다.

같은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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