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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 동의보감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1)

by 북드라망 2019. 7. 23.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1)



나홀로족과 살롱 문화


요즘 청년들은 혼자인 걸 편안해한다.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 ‘혼코노’(혼자 코인 노래방 가기). ‘혼영’(혼자 영화) 마저 익숙해졌다. 홀로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함께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나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기 싫으며,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 쓰고 싶다. 청년들에게 사람들과 만나는 건 귀찮고 피곤한 일이 돼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들 사이에서 혼자인 생활을 벗어나 소통의 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살롱 문화’라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취미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기보다 취미를 공유하는 게 먼저이다. 그렇기에 ‘살롱 문화’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름, 나이, 직업 등 그 사람의 생활에 관해 묻지 않는다. 서로의 선을 지키며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겉보기에 ‘나홀로 문화’와 ‘살롱 문화’는 많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혼자인 걸 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문화에 깔린 마음은 같다. 혼자 있든 같이 있든 간에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거나 간섭받는 걸 불편해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관계 맺는 일은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아예 만나질 않든지 혹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만난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왠지 밋밋한 느낌이다. 여기에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몸,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소


『동의보감』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 몸은 ‘타자들의 집합’이다. 놀랍게도 이 타자는 바로 충이다! 헐~ 몸에 벌레가 있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이 충들은 우리 몸과 좌충우돌 관계를 맺고 있다. 몸 안에서 우리를 조종하기도 하고, 아프게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몸속에 지내는 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물, 과일, 채소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가지각색의 충이 수시로 우리 몸을 들락날락한다. 이 중 재미있었던 충은 노채충이다. 노채는 노곤해서 지친다는 뜻이다. 이 병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흔히 소년 시기, 즉 혈기가 안정되기 전에 주색에 상하면 열독이 쌓이고 뭉쳐서 괴상한 벌레가 생긴다. 이것이 장부를 파먹고 정혈을 변화시켜 여러 가지 괴상한 것들을 만든다. 이런 환자의 시중을 오랫동안 들어 좋지 못한 기운을 받아도 옮게 된다. 그러므로 기가 허하고 배가 고플 때에는 노채를 앓은 집에 병문안 가거나 조상가는 것을 금해야 한다. 허하면 환자의 옷이나 소지품이나 그릇을 만져도 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임경아 이민정, 북드라망, p230)


어렸을 때 술과 여자에 빠지면 괴상한 벌레가 생긴다니?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감각이다. 우리는 술을 마시면 곧바로 간이 안 좋아지고 여자에 빠지면 정이 고갈된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동의보감에서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벌레가 생겨 장부를 파먹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채충은 우리의 감정까지 조종한다. 이들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기를 좋아하고 늘 불평불만을 품게’ 만든다. 우리는 감정을 내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시선에서 보면 마치 충들이 우리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몸을 아프게 하고, 감정을 들쑤시기도 하는 충들과 우리는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서양 의학에서도 우리 몸 안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미생물은 우리 몸의 소화 기관뿐만 아니라 눈, 코, 입, 피부 어디서든 거주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장내 미생물의 경우 우리의 감정을 변화시킨다. 위장 속에 있는 미생물은 ‘세로토닌’의 분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세로토닌’은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도록 해주는 호르몬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은 장내 미생물들에게 달린 것이다!




초식 동물들의 장 안에도 식물의 섬유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있다. 그들이 사라지면 초식 동물들은 모두 굶어 죽게 된다. 식물 말고도 대부분에 음식물의 소화에는 미생물이 관여한다. 우리 또한 미생물이 없으면 우리가 먹는 음식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충이나 미생물처럼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나를 아프게도 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다. 몸은 이런 타자들과 서로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간섭받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그런데 대중문화에서는 마치 우리가 혼자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여준다, 혼자 사는 것을 주제로 한 ‘나 혼자 산다’라는 예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 혼자 산다’조차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홀로 집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사람들과 만나서 춤추고, 노래하며, 운동하는 모습들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나 혼자 산다’의 주인공들은 ‘함께’ 영상을 시청하면서 웃고 떠든다. 1인 방송을 하는 유튜브 스타들 또한 그렇다. 겉보기에는 혼자 즐겁게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게 즐거우면 굳이 영상을 찍어서 공유하는 이유는 뭔가? 대중문화는 혼자 살아도 즐겁다고 말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 관계 속에서 웃고 떠들고 있다.


우리도 사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건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혼자 있는 걸 잠시도 즐기지 못한다. 집에 혼자 있으면 방에 들어가 스마트폰을 켠다. 그리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나의 프로필 사진이 바뀐 걸 좀 알아 봐줬으면 바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와 댓글이 얼마나 달렸는지 계속 신경을 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앞서 본 것처럼 우리 몸 자체가 이미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혼자 있으려고 할까?


우리 이전 세대는 관계 맺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집에서만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형제자매 등 많은 식구와 섞여 지냈고, 수시로 바깥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대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혀 본 경험이 많지 않다. 나만 해도 그렇다. 가족 구성원의 수도 적었고, 친구와 바깥에서 놀기보다 집 안에서 TV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잘 몰랐다. 심리학 서적을 읽고 관계에 대해 공부해야 할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우리 청년 세대가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험이 적다 보니 청년들은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에만 익숙하고 편하게 생각한다. ‘내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취존’이란 유행어도,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는 ‘싫존주의’라는 말도 다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사람들과 섞이고는 싶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관계는 싫고,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람과만 만나고 싶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하기는 한가?



상생상극의 흐름 타기


『동의보감』에서 우리 몸은 간, 심, 비, 폐, 신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된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들의 관계가 상생상극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상생은 돕고 보완하며 기르는 힘이고, 상극은 제압하고 억제하며 기르는 힘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의 몸은 이 두 개의 힘을 다 필요로 한다.


상생의 예로 심은 비를 돕는다. 심장의 따뜻한 기운이 비장을 도와 소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극의 예로 간은 비를 제압한다. 비는 영양소를 담아두는 역할을 하는데, 간이 그 영양소를 다 분해해버린다. 비의 입장에서는 기껏 모아둔 것을 낱낱이 쪼개서 해체해버리니 불편하고 힘들다. 하지만 몸 전체의 입장으로 봤을 때 간이 비에 담긴 영양소를 분해해줘야 몸 구석구석까지 에너지가 전달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몸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오장육부의 관계 속에 상생과 상극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래야 몸 안에 기운들이 적절히 순환한다. 그렇지 않고 상생과 상극 중 하나의 흐름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거나 혹은 모자라게 된다면? 어떤 장부에 있는 기운이 치우치거나 막혀서 우리 몸에 병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 오장육부의 관계처럼 인간관계에서도 상생과 상극의 작용이 둘 다 필요하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상생만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없다! 오장육부에 상생이 과도해지면 병이 생기듯 인간관계에 상생이 과도해지면 일단 삶이 너무 지루해진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그러한 사람들과 매일 반복되는 수다를 떤다고 생각해보라. 세상은 한없이 좁아지고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 되어 결국엔 권태로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한 것을 뚫어주는 힘이 바로 상극이다. 상극의 힘은 나를 제어하며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은 그동안 몰랐던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며,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꽃샘추위가 필요하듯이 내가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상극의 힘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상생상극의 흐름을 타는 것이 바로 관계를 맺는 핵심이다.



관계가 전부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삶에서 관계를 부수적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게다가 거기서 상극의 관계는 아예 배제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즐거워야 하고, 내 지위만 상승하길 바라고, 내 능력만 향상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 상황은 다 나를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잘난 사람’이 되면 관계는 저절로 뒤따라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 나의 지위, 나의 능력이 사실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나온다고는 왜 생각하지 못할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라는 관계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서부터 선생님,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다. 직장에 들어가면 직장 내의 관계가 있고 또 연애를 시작하면 연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뿐이랴? 일상적으로 내가 먹는 음식, 내가 보는 영화, 내가 듣는 노래 등등은 수많은 인연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다양한 관계로 겹겹이 쌓여있다. 아니 관계가 전부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은 관계가 막혀 있다. 그러한 관계는 우리 몸에도 영향을 끼친다. 요즘 청년들이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것도 그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동의보감』의 관점으로 지금 청년들의 관계와 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일상적으로 청년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청년들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말이다.


글_Moon 빈(청스_의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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