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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 동의보감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2)

by 북드라망 2019. 8. 20.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2)



증오하면서 의존하는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늘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비쳤다. 그런 나에게도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심하게 앉아 수업을 듣던 학생에서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으며 짜증을 쏟아내는 분노의 화신으로! 이처럼 바깥에서는 온순한 양으로 지내면서, 집에서는 무서운 헐크로 변신하는 청년들이 요즘 많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청년들을 일컬어 ‘방구석 여포’라는 말이 나왔을 지경이다.




그와 동시에 자립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님께 기대어 사는 ‘캥거루족’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거비 부담이 크고, 경제적인 독립이 어렵고, 취업이 힘들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부모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청년들도 있다. 부모님이 아침마다 깨워줘야 하고, 밥을 차려줘야만 먹고, 차로 데려다줘야 하는! 나이로는 어른이지만 생활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어린’ 청년들인 것이다.


‘방구석 여포’는 가족을 향해 분노를 쏘아댄다. ‘캥거루족’은 가족에게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한다. 두 양상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깊이 상통한다. 그래서 가족을 막 대하는 것과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은 함께 간다. 나 역시 그랬다. 아버지를 미워하며 방안에서 ‘폭정’을 일삼으면서도 집을 뛰쳐나오진 않았다. 아니, 내가 집 밖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시대 청년들은 왜 이렇게 가족을 미워할까? 또 미워하면서 왜 떠나지 못할까?



쌓이기만 하는 감정


청년들은 대부분 부모와 형제자매 한두 명으로 구성된 ‘핵가족’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몇 안 되는 가족과 매일 얼굴을 맞대며 지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너무 빈곤하다. 반복되는 주제와 동일한 패턴으로만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서로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보이고, 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귀를 닫아 버리기도 한다. 이렇듯 ‘아빠-엄마-자식’으로만 구성된 ‘가족 삼각형’ 안에서의 대화는 너무 지겹고 따분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핵가족은 콘크리트 벽으로 사방이 꽉 막힌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2중, 3중의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좌우로 CCTV가 지켜보고 있다. 친한 친구 집에 가더라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지만 들어갈 수 있다. 당연히 이웃 관계는 불가능하다. 고독사가 매년 증가하는 것도 아파트의 이런 폐쇄성 때문이다.


가족이 왜소해지고 아파트에 갇히게 되면서 서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과민해져 있다. 불편한 감정을 느껴도 그것을 편안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혹시 이 말을 하면 상처받진 않을까 걱정하고, 말을 해도 바뀌는 건 없다며 미리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이 쉽게 쌓이고 뭉친다. 감정은 사람들과 떠들고, 활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지나간다. 이전 세대의 경우,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그런 역할을 했다. 일단 집과 학교의 거리가 굉장히 멀었고 두 발로 걸어 다녔다. 걷는 것 자체로 기순환이 됐고, 등교하는 동안에도 친구, 형, 누나 할 것 없이 두루 어울렸다. 집밖엔 왁자지껄한 ‘골목’도 존재했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복작복작 지내다 보면 집에서 생긴 감정을 많이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로 가는 길이 순식간이다. 대부분 엄마 차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걷질 않으니 뭉친 기운은 그대로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다. 집에선 나갈 곳도 마땅치 않다. ‘골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을 보는 게 전부다.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이 오면 따로 시간을 내서 상담소에 간다. 그런데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대부분 감정을 꾹꾹 참는다. 그러다 임계치를 넘어서면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하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폐는 외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호흡이 가장 대표적이다. 천기(공기)를 몸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내뱉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폐는 호흡을 통해 하늘의 기운과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숨을 쉬면 무작위로 천기가 들어오는데, 거기서 폐는 우리 몸에 필요한 기운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기운에 대해서는 방어한다. 폐는 외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소통해 가며 몸의 순환을 돕는다.


그런데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은 주변이 꽉 막혀있다. 특히 여름이나 겨울에는 창문을 닫고 에어컨과 난방을 틀기 때문에 더 갑갑하다. 더군다나 실내는 장롱, 냉장고, TV, 쇼파, 침대 등 인테리어로 꽉 차 있다. 쓸만한 물건이 꽤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계속 사 모은다. 그래서 방 안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된다.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물품들은 공기의 흐름을 막는다. 이런 조건에서 호흡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리 없다. 공기가 순환되지 않는 곳에서 폐는 약해지기 쉽다. 폐가 위축되면 외부로부터 몸을 방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즉, 면역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때 폐로 외사가 쉽게 침입한다. 코가 막히고 기침과 재채기를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외부의 자극에 민감해진다. 이는 생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말에 쉽게 상처받게 되고, 또 그것을 편안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만 커지는 것이다. 이렇듯 가족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여 있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 할 사정’이 넘쳐난다.



스카이캐슬, 탐욕의 성

  

핵가족에서 벌어지는 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다. 2019년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캐슬’이다. ‘캐슬’에 사는 부모들의 지상과제는 자녀 교육이다. 고액 과외부터 봉사 활동 관리까지 부모들은 자녀를 명문대생으로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을 다 쓴다. 이러한 욕망은 ‘입시 코디’라는 무서운 직업을 불러들인다. ‘코디’는 학생의 친구와 연인 관계뿐 아니라 심리까지 세밀히 분석하고 이용한다. 부모들은 ‘SKY대학’을 위해 자녀의 영혼까지 맡길 기세다.


“예서야! 엄만, 네 인생 절대로 포기 못 해.” 드라마의 후반부, 예서 엄마가 딸에게 한 말이다. 대사로만 보면 딸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그런데 이 말을 내뱉은 상황은?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죄 없는 친구가 감옥에 갔다. 엄마와 딸은 ‘코디’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코디’를 함부로 고발할 순 없다. ‘코디’만이 예서를 의대에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엄마의 눈에는 딸의 대학 입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가족의 슬픔도, 망가지는 관계도, 딸의 아픔까지도! 사실상 엄마가 했던 저 말은 명문대를 위해 범죄를 묵인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딸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저 딸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엄마의 탐욕일 뿐이다.


‘스카이캐슬’은 상류사회의 문화만 다뤘지만, 사실 부모들의 욕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하다. 드라마가 끝난 후 학원가에는 ‘스카이캐슬 공부법’이 유행하고, ‘입시 코디’에 대한 문의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쓰던 1인용 독서실은 ‘스카이캐슬 독서실’로 불리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욕심으로 자녀의 삶이 파괴된다는 드라마 속 메시지는 보지 않고, 자녀를 명문대생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입시비법을 획득한 듯하다.


그런데 부모의 욕망을 강제로 주입받은 자식의 입장은 어떨까? ‘스카이캐슬’ 영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재의 부모님은 ‘3대째 의사 집안’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영재를 심하게 쪼아댄다. 부모님의 기대가 영재에게는 너무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어느 날 영재는 자신의 답답함을 분노로 표출한다. 화분을 깨고, 고함을 지르며. 하지만 부모님은 영재의 마음을 살펴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기말고사를 걱정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사냥용 총을 겨눌 뿐이다. 이렇게 탐욕적인 부모를 아이는 존경할 수 있을까. 없다. 영재가 쓴 일기장을 보자. “날 사랑한다고? 차라리 솔직히 말해. 자랑거리가 필요하다고. (…) 저따위가 무슨 의사야?? 저런 것들이 내 부모라는 게 끔찍하다!!” 부모에 대한 분노를 넘어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대부분 떠나질 못한다. 왜? 거기에는 부모 곁에 기생하여 쇼핑에 대한 욕구, 아파트가 주는 편리함을 충족하려는 자식의 탐욕도 있다. 이 탐욕은 자신이 경멸하는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럴 때 어떻게 될까. 막살아 버린다! 밤새 게임을 하고,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식으로. 이것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짓이다. 생활이 방만해질수록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렇게 된 원인을 모두 부모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래서 다들 억울해한다. 내가 어쩌다 이런 부모를 만났냐며.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서로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는다.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분노를 일으킨다. “도대체 왜 내 뜻대로 살아주질 않느냐고!” 양쪽 다 그렇다. 서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것은 가족을 생명체로 보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내 것’으로만 생각하는 지독한 소유욕이다. 이러한 소유욕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두려운 감정은 신장을 병들게 한다. 신장은 몸 안에 있는 물을 다루는데, 신장이 물을 조절하지 못하면 심장의 화(火) 기운을 제어하지 못한다. 고삐 풀린 심장은 활활 타오르며,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럴 때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한 마음이 생겨난다. 이러한 불안은 존재를 위축시키고 자존감을 떨어트린다. 그럴수록 가족은 서로에 대한 집착과 분노를 반복하게 된다.



상처의 온상, 집을 떠나라


무능력한 아버지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는 어머니 때문에, 매일 괴롭히는 형 때문에, 잘난 언니 때문에. 등. 우리 시대 청년들 대부분은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집을 떠나면서부터였다. 3년 전쯤 나는 집을 나와 남산강학원에 접속했다. 이곳은 10대부터 6080세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공부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전까진 내 상처가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내 안에 ‘아버지라면 어때야 한다’는 고정된 상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거기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무작정 싫어했던 것이다. 그 후로 공부를 더 해나가면서 알게 됐다. 내가 아버지의 삶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한테도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아버지와의 관계가 한결 편안해졌다.


가족 관계가 상처인 이유는 서로를 의무와 희생으로 묶어놨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아버지는 돈을 잘 벌어와야 하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성실히 해야 하며, 자식은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렇기에 가족은 ‘상처의 온상’이 된다. 이 배치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집을 나와야 한다. 그래야 소유와 집착으로 덧칠되지 않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불편한 일들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난관을 하나씩 뚫고 지나가다 보면 면역력이 향상되고 ‘패기(霸氣)’를 기를 수 있다. ‘패기’는 존재를 당당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으면 누군가를 소유하고, 집착하려는 마음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즉, 폐와 신장이 튼튼해지는 것이다.


글_Moon 빈 (청스_의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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