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라는 망망대해
청년, 반양생적 시대를 살다 - 4)
어두컴컴한 배경, 한사람이 검은 장갑을 끼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통연어. 장갑을 낀 손으로 물컹한 연어를 집어 입에 넣는다. 느끼한 표정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며 연어를 천천히 탐닉한다. 끈적끈적한 소리와 더불어. 설정이며 행동을 보아하니 포르노가 따로 없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먹방 내용이다. 이름도 ‘욕망의 연어’다. 욕망을 가차 없이 자극한다. 요즘 먹방의 최신 트렌드는 ‘희소성’이다. 절대 평범하게 먹지 않는다. 더 많이, 더 맵게, 더 기이하게 먹으려고 한다. 그래야 이슈화되면서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산낙지에서 돼지머리와 생간까지, 음식을 ‘통째로’ 먹는다. 그것도 최대한 잔인하게. 음식의 ‘맛’보다는 ‘자극’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생명에 대한 존중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청년들은 왜 이 자극적인 먹방을 찍고, 또 찾아서 보는 것일까?
나 홀로 방구석에서 - 먹방 아니면 ASMR
모든 정보의 집합소인 유튜브. 음악, 교육,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다. 누구나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와 연결될 수 있다. 요즘 세대의 검색창은 바로 유튜브다. 피자 박스 접는 법에서부터 연애하는 법까지 찾으면 다 나온다.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는 국경을 넘어 모두가 모인다. 20세기 말 디지털 혁명은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인에게 포르노를 쥐여 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이전보다 ‘자극’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오감을 하나하나 집중 공략하는 엄청난 자극을 말이다. 예전에는 황제만이 누릴 수 있었던 감각적 쾌락을 이제는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 그것도 방구석에서 나 홀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쉴 틈 없이 자극하는 영상에 빠져 헤어 나올 길이 없다.
먹방,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 액체 괴물(슬라임)은 감각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콘텐츠들이다. 영상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감각을 최대한 리얼하게 묘사한다. 먹방은 주로 미각을 자극한다. 어마어마한 음식량에 저 많은 걸 어떻게 먹지 싶다가도 입 안에선 저절로 침이 고인다. ASMR의 경우 속삭이거나, 두드리는 등, 반복적인 사운드를 통해 청각을 자극한다. 처음에는 먹방 같은 과도한 자극에 지친 사람들이 편안함을 찾으려 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ASMR 없이는 잠들 수 없다는 이들까지 있다. 하지만 물론 여기에도 자극은 있다. ‘팅글’(Tingle)이라는 소름 돋는 느낌부터, 그걸 넘어서는 ‘귀르가즘’(귀와 오르가즘의 합성어)까지! 마냥 편안함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 액체 괴물의 말캉함은 촉각을 자극한다. 어떻게든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쾌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을 도파민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항상성이 있어 같은 수준의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도파민이 필요하다. 기존 트렌드를 주름잡던 먹방의 경우, 이제는 극도로 매운 음식을 먹거나 산 채로 통째로 먹는 것을 보여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빨리 먹기에 도전한 일본 유튜버가 질식사한 사례도 있다. 그 영상은 유튜브에 그대로 생중계되었다.
날씬한 먹방 유튜버
먹방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저 정도의 양을 한 번에 먹을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끝없이 들어가는 음식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넋 놓고 보다 보면 그릇까지 싹싹 닦아 먹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면서도 날씬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 많이 먹고도 날씬한 먹방 유튜버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렇게 먹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만큼의 자극적인 음식을 한꺼번에 먹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속이 더부룩하다. 조금만 매운 걸 먹으면 화장실 갈 때 고역이고, 밤에 먹으면 소화시키느라 잠도 못 잔다. 다음 날 아침에는 얼굴이 팅팅 불어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만 산다.
저녁에 야식만 먹어도 이런데, 먹방 유튜버들은 어떨까. 아침부터 쫄쫄 굶다가 저녁에는 폭식한다. 그에 따라 위장은 줄어들고 늘어나고를 반복한다. 그 많은 열량과 에너지는 운동하는데 다 소진한다. 한 유명 유튜버의 경우 하루에 10시간을 운동에 투자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기관리가 투철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몸은 정작 이중으로 혹사당하고 있다. 갑자기 들어온 많은 양의 음식을 소화시키고, 고강도의 운동을 하루 종일 해야 한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먹고 운동하고의 반복이다. 다른 생명을 통해 얻은 영양분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고, 그 안에서 희노애락을 겪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삶의 다른 과정은 축소된다. 감각의 극대화로 인해 정작 몸과 삶에 대한 감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디지털 영상을 보고 있으면 정신은 ‘이미지’에 현혹된다. 동시에 내 몸에 대한 인지력은 떨어진다. 『좀비사회학』의 저자 후지타 나오야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우리의 신체 감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신체 자체입니다. 왜인가 하면, 눈은 본인의 눈이나 신체의 내부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시각과 인터페이스를 중심으로 주체화가 이루어지면, 신체는 거기에서 빠져버린다는 말입니다.
(『좀비사회학』, 후지타 나오야, 요다, p.221)
영상을 보면서 즐거워하지만 정작 내 신체는 보이지 않는다. 밤을 꼴딱 새우면서 드라마를 정주행해도 몸의 피로감을 느낄 수 없다. 영상이 꺼질 때야 비로소 피로감이 몰려들면서 잠든다. 우리는 바로 이 피로와 권태, 고통에 시달리는 몸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 감각을 배제한 채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먹고, 더 오래 하고, 더 즐길 수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고통을 잊은 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좀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몸을 극과 극으로 과격하게 쓰는 데 익숙하다. 밤늦게 야식은 기본이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쫄쫄 굶다가 새벽에 편의점에 가서 폭식한다. 위가 쓰리고 아픈데도 매일 햄버거를 먹는다. 식이조절이 안 돼 아토피가 벌겋게 올라와 결국 단식원을 찾아간다. 소화불량, 위염, 역류성 식도염, 복부 창만 등 주위를 둘러보면 위장이 성한 사람이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면서 건강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날씬하길 바란다. 그래서 날씬한 먹방 유튜버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게 아닐까.
태과불급을 넘어서
『동의보감』에 따르면 극으로 치닫는 삶은 태과(太過)다. 무척 과하다는 의미다. 태과불급(太過不及)! 많은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 과함을 늘 부추긴다. 충동적으로 살라고 말하면서 카드빚을 내어서라도 소비하라고 말한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넘어서 이제는 ‘탕진잼’(탕진하는 재미를 일컫는 말)을 외치는 지금의 청년들. 절제하는 법이란 없다. ‘끝없이 증식하려는 자본의 무의식을 내면화한 채, 그 증식에 대한 욕망이 잉여적 습관을 생산한다. (…) 이처럼 산만한 욕망은 정기를 분산시켜 몸을 지치게 하고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동의보감』, 안도균, p,63)
요즘은 노인질환이 따로 없다. 젊은이들이 노인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비만이 주원인이라 옛날에는 귀족병이라고 불렸다는 ‘통풍’이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치맥 등 술과 고기를 지나치게 먹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남자주인공이 등장했다. 이쯤 되면 젊은이와 노인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나홀로 방구석에서 자극을 즐기는 청년들의 몸은 점점 노쇠해지고 있다. 삶도 어딘가 헛헛하다. 먹으면서도 남에게 잘 보이려고 살을 빼느라 운동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기 때문이다. 정작 관계는 뒷전이 돼버렸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에만 초점이 있다. 돈과 인기를 얻으면 나머지를 다 얻을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삶에는 당연히 먹고 운동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전부가 되면 곤란하다. 먹고 나서 몸이 편안해야 하고, 사람하고 관계도 맺고, 같이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일을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까지, 하루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관계에 대한 사유나, 삶에 대한 성찰도 있을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이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의 순환을 알고 그것과 함께 스텝을 밟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삶의 비전으로 가질 때, 감각은 저절로 조율된다. 나 역시 『동의보감』을 배우기 전까지 자연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날씨는 일기예보에 표시된 기온으로만 파악하지, 절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동의보감』의 세계에서 절기의 흐름은 매우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그 흐름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은 절대 감각의 무한증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봄에 싹이 돋고, 여름에 무성해지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모든 것을 해체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일을 시작하고, 펼치고, 결과를 내고, 휴식하는 순환의 리듬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변화와 연속성 안에 있다. 무한정 먹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여름이 계속되기만을 바라는 마음과 같다.
일 년의 리듬이 이러하듯, 한 달에도, 하루에도 이러한 흐름이 있다. 삶에도, 몸에도 이런 스텝이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능동적으로 내 삶을 조율해나가는 것이 양생의 기술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위를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의 물은 구름으로 변화하여 천하를 종횡으로 누빈다.’(동의보감 내경편, 법인문화사, p.415) 이처럼 위에 들어온 음식물은 기혈로 변하여 우리 몸에 흩뿌려지고 있다. 먹는 것과 몸과 자연의 모습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가. 몸과 삶의 측면에서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얻은 기혈로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태과불급을 넘어서 양생의 기술을 닦아보자.
풍월보감, 그 뒷면을 보라!
청나라 소설가 조설근은 『홍루몽』에서 지금으로 치면 VR에 해당하는 장면을 그렸다. 상사병에 빠진 가서라는 인물에게 절름발이 도사가 찾아와 거울을 준다. 거울의 이름은 ‘풍월보감’(風月寶鑑)! 당부의 말도 함께 전한다. 이 거울은 삿된 생각과 망령된 행동의 병을 고치는 효험이 있으나 뒷면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서가 뒷면을 보자 해골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 거울을 내려놓았다. 성이 나서 앞면을 바라보니 자신이 좋아하던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정을 나누고 돌아온다. 말이 좋아 ‘정을 나눈다’지, 거울 앞면만을 들여다보며 정액을 사정없이 쏟는다. 『동의보감』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정(精)을 하염없이 소진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에 이른다.
하물며 지금이랴. 가상에 가상을 더해 점차 몸과는 멀어지고 있다. 내 몸의 생명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음에도 감각하지 못할 정도다. 이미지로 흘러들어오는 더 큰 쾌락에 몸을 던진다. 해골과 같은 현실은 거부하며. 자극에서 벗어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그 길 또한 유튜브 안에 있다! 인문학 강의와 불교, 명상, 주역 등, 인생에 대한 길찾기를 도와주는 수많은 콘텐츠가 이미 업로드되어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접속하여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삶의 비전과 함께할 때, 유튜브라는 망망대해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글_Moon 명(청스, 의역학)
'지난 연재 ▽ > 청년 동의보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동의보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관계 – 알바 (0) | 2019.12.10 |
---|---|
[청년동의보감] 결정 장애 세대 (0) | 2019.11.05 |
[청년동의보감] 마주 보고 있지만 만나지 못하는 – 연인 (0) | 2019.10.22 |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3) (0) | 2019.09.17 |
청년, 반양생적 시대를 살다 - 3) (0) | 2019.09.03 |
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2) (0) | 2019.08.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