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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나쓰메 소세키의 질문들] 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예

by 북드라망 2019. 7. 3.

『춘분 지나고까지』 - 일상을 모험으로 만드는 삶의 기예

시시한 일상을 벗어날 수 없을까?




진정 모험을 하고 싶은가


낯선 세상을 만나 기상천외한 사건에 휩쓸리는 것. 예측 불가한 인생의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는 것. 여기에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더해졌을 때, 가슴 쫄깃한 긴장감과 살아 있음의 생동감을 느끼는 모험이 된다. 모험은 내가 갇혀 있던 좁은 지평을 벗어나서 나와 다른 삶의 현장을 만나는 활동이다. 흥분되고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은가? 솔직히 따져보자. 진정 모험을 원하는지. 말이 쉽지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긴장되고 두렵다. 우리는 불확실한 모험을 시도하기 보다는 오늘도 무사히, 안정된 삶을 지속하기를 희구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빌딩 하나 물려받아 임대료 받으며 사는 거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우리는 일상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길까봐 걱정한다. 관성의 법칙대로 굴러가는 일상은 행복한가? 안정적인 일상에는 반드시 권태가 따른다. 위험이라는 대가를 치룰 것인가, 권태라는 비용을 감수할 것인가. 삶의 셈법은 권태로운 일상과 아슬아슬한 모험, 그 사이에서 곡예를 타는 것이다.




큰딸은 몇 년 전까지 제법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대기업을 다니고 있었다. 딸은 일요일 밤  <개그콘서트>가 끝나는 시그널 뮤직이 흘러나오면 장송곡처럼 들린다고 했다. 월요일이 다가오는 소리다. 몇 시간만 지나면 별빛을 가르고 집을 나서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지하철을 타야 한다. 회사라는 조직은 연초에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높은 목표를 세우지만 연말이면 기어이 실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사이클로 돌아간다. 딸은 반복적인 그 사이클이 너무나 지루하다고 했다. 결국 딸은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3년간 모은 월급을 가지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했다. 사표를 내는 사유부터 얼마나 낭만적이며 허무맹랑해 보이는지. 딸이 20킬로그램이나 되는 엄청난 배낭을 짊어지고 몽골 초원으로 떠났을 때 나는 알았다. 내가 모험을 지극히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 자신 누구보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고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세계 일주라니 그것도 20대 미혼 여성이 혼자서? 오만 걱정이 밀려왔다. 납치, 절도, 사고, 부상, 질병, 온갖 몹쓸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말도 못하고 속으로 애태웠다. 나는 100년 전 개화기 때 현해탄을 건너 공부하러 갔던 신여성들을 떠올렸다. 어린 딸을 일본으로 보낸 어머니들이 신여성보다 더 대단하게 여겨졌다. 핸드폰도 있고 인터넷으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세상인데도 이럴진대 그 시절 조선의 어머니들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또 얼마나 담대했던가. 8개월의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딸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남미를 거쳐 멕시코에서 스킨스쿠버 자격증까지 따고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돌아왔다. 몇 개국 몇 개 도시를 거쳤는지는 일일이 알지 못한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딸은 이제 한국인이 아니라 ”지구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모험을 선택한 덕분에 딸은 세계여행에서 얻은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동력 삼아 새로운 진로를 찾았다. 


누구나 다 직장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라는 말은 아니다. 에너지가 팽창하는 젊은이가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을 못 견디는 것을 이해한다는 얘기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쓴 『춘분 지나고까지』를 읽으면서 “모험”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하고 매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100년 전의 일본의 청년도 우리와 비슷한 문화적 행태를 보여주다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험을 꿈꾸는 청년”이 상큼발랄하게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게이타로는 얼마 전부터 해온 별 성과도 없는 취직 활동과 그 분주함이 다소 지겨워졌다.” 청년은 벌써부터 삶의 권태를 느낀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게 애쓰는 일이 지루하다. 매일 먹는 하숙집 반찬도 신물이 난다. 게이타로는 따분한 일상을 벗어나 변화무쌍한 사건을 경험하고 싶다. 오죽하면 “전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소매치기도 못 만난다.”고 투덜거릴까. 소세키는 이 청년을 묘사하면서 “낭만적”이라는 단어를 10회 가까이 사용했다. 낭만(浪漫)은 로맨틱(romantic)을 일어로 번역하면서 소세키가 만든 단어라고 한다. 한자로 ‘물결이 일렁이며 흩어지다’라는 뜻이니 로맨틱을 표현하기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지금은 로맨스라는 말이 남녀사이에 오가는 달달한 연애감정을 일컫는 의미로 축소된 경향이 있지만 애초에 이 낱말이 등장했을 때는 어떤 형식적 규범과 딱딱한 질서를 벗어난 감정의 자유를 함축하고 있었다. 게이타로가 어떤 낭만적인 모험을 할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조각보처럼 이어지는 ‘귀로 듣는 모험’


게이타로는 취직 부탁을 위해 사업가를 찾아간다. 다구치는 “오늘 4시에서 5시 사이에 전차를 타고 와서 모 정거장에 내리는 마흔 살쯤 되는 사내를 미행하라”는 과제를 준다. 취업능력을 테스트하는 미션이다. 그 사내에 대해 주어진 단서는 낡은 외투와 검은 중절모, 미간에 점이 있다는 것뿐이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탐정도 아니고 남의 뒷조사라니 게이타로는 ‘낭만적인 모험’을 할 수 있을지 가슴이 설렌다. 그는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정거장에서 미간에 점이 있는 남자를 찾아냈다. 어라? 정거장에는 순백색 비단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남자와 젊은 여자라, 혹시 비밀스러운 내연의 관계가 아닐까? 게이타로는 흥미진진 긴장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몰래 뒤쫒는다. 두 남녀는 평범하게 식당에서 밥만 먹고 헤어진다. 미행은 허탈하게 끝났다.  


다음 날 게이타로가 보고를 하러가자 다구치는 두 남녀가 무슨 사이 같으냐고, 육체상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더냐고 짓궂게 다그친다. 다구치는 미간에 점이 있는 남자의 이름이 마쓰모토라는 것과 그의 집 주소를 가르쳐 준다. 마쓰모토를 찾아간 게이타로는 미행 사실을 털어놓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묻는다. 마쓰모토는 “고등매춘부라고 전해주게”라고 응수한다. 전후사정을 알고 보니 두 남자는 뜻밖에도 처남-매부지간이었다. 다구치는 자기 딸과 외삼촌이 만날 약속을 미리 알고 익살스럽게 게이타로를 골려준 것이다. 고약한 장난이지만 게이타로에겐 이것도 즐거운 모험이다. 게이타로가 끌리는 마쓰모토는 자칭 고등유민(高等遊民)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고등유민도 소세키가 만든 단어인데 돈을 벌려고 안달하지 않고 여유있게 시간을 즐기는 지식인을 일컫는다. 가난하지만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형이다. 게이타로가 세상과 접촉한 첫 모험은 싱겁게 끝났지만 품격 있는 고등유민도 알게 되었으니 성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정직한 태도를 인정받아 직장도 소개받았다. 모험도 즐기고 일자리도 얻고 정말 낭만적이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조각보 같은 소설이다. 조각보는 아무 맥락 없이 형형색색의 헝겊조각을 이어붙인 것처럼 보여도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문양을 이룬다. 일정한 패턴이 크고 작은 규모로 변주되는 프렉탈 구조이다. 이 소설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조각보처럼 짜임새 있게 얽혀 있다. 세 명의 화자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끌고나가고 있는 구성은 어찌 보면 산만하다. 기승전결로 구성되는 근대소설의 문법으로 보면 아주 생소하고 엉성한 구성이다. 소세키는 왜 이런 식으로 짜깁기를 했을까? 1912년 1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에 소설연재를 시작하면서 쓴 머리말을 보자. “예전부터 나는 각각의 단편을 쓴 뒤에 그 각각의 단편이 합쳐져 하나의 장편이 되도록 구성하면 신문소설로서 의외로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세키는 단편소설끼리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성을 시도했다. 모리모토가 게이타로에게 뱀조각 문양의 지팡이를 남겨주고, 게이타로는 그것을 들고 마쓰모토를 미행하게 되고, 그 지팡이 때문에 마쓰모토가 게이타로를 기억하게 되는 식으로 바느질이 엮어진다. 




각 인물에 대한 정보도 조금씩 감질나게 밝혀진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추리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양파처럼 한 꺼풀씩 다 벗겨내고 나서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복선이 많이 깔린 추리기법은 이 소설을 읽는 색다른 매력이다. 예컨대 스나가가 지요코를 좋아하면서도 왜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뻗대는지는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스나가의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돌연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엄마가 지금까지처럼 귀여워해줄 테니까 안심해.” 하고 말한다. 뭔가 야릇하다. 스나가의 불안과 의혹이 시작된다. 이상한 직감의 정체는 소설이 끝나갈 때야 진실이 밝혀진다. 풀릴 듯 말 듯 답답했던 스나가의 행동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하게 된다. 


오늘날 삼포세대로 일컬어지는 청년들은 스나가라는 청년과 근접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나가는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몸을 사리는 성격이다. 머리는 쉬지 않고 복잡하게 작동하지만 행동은 꾸물댄다. “자신이라는 정체가 그토록 이해하기 힘든 것일까?” 자문하며 깊은 내면으로 끌려 들어간다. 자아에 몰두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스나가는 다른 남자와 있는 지요코를 보고 질투심의 불길에 휩싸이면서도 이건 절대 질투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는 솔직하고 적극적인 여자를 대하기가 두려워서 아예 관계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좋아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면 기권이다. 그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연의 상처를 쓸쓸히 어루만진다. ‘머리와 가슴이 다툴 때마다 늘 머리의 명령에 굴종해온’ 그에게는 그야말로 가슴 뜨거운 모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보다 더 큰 모험은 없으니까. 


이 소설을 쓰기 전, 소세키는 1년 반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위궤양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몸이 회복될 무렵 갑자기 다섯째 딸 히나코가 급사한다. 소세키는 갑작스러운 딸의 죽음으로 “정신에 금이 갔다”고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소세키는 『춘분 지나고까지』를 쓰면서 딸의 이야기를 액자소설처럼 삽입해 넣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손님을 만나지 않는 마쓰모토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밥을 먹다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진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딸의 사인(死因)을 찾지 못한다.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불가사의한 운명 앞에 내던져 질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기의 장례식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에 휩싸인다. 그날 이후 마쓰모토는 비가 오는 날이면 손님을 만나지 않고 돌려보낸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애절함이 극도로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은 인생의 단면을 모아놓은 조각보 같다고나 할까.

 

이 작품은 스나가가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세상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변모하고 있다는 느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자유로운 공기를 맡게 된 것이다. 소설 맨 앞에는 모리모토라는 사내의 여행이 있다. “모든 모험은 술로 시작하네. 그리고 여자로 끝나지.” 하면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풍성한 인생역정을 들려주었던 남자다. 모리모토가 중국 따렌의 전기공원에서 일하는 소식과 장춘 도박장 풍경을 편지를 보내온다. 그는 신기한 이국풍물과 마주치며 모험가처럼 살아갈 것이다. 소세키가 소설 앞뒤로 여행과 모험을 배치시킨 수미상관의 구성이 쌈박하다.



일상의 차이를 변주하라


소설에는 다양한 성격과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나온다. 파란만장한 굴곡으로 가득 찬 모리모토의 인생이야기, 복잡한 내면으로 파고드는 스나가의 연애이야기, 유능한 실업가 다구치의 짓궂은 장난과 고등유민인 마쓰모토의 개성 있는 삶, 모두가 흥미로운 이야기꺼리이다. 소세키는 이것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로 ‘모험’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들의 인생이야기는 역동적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싶었던 게이타로에게 ‘귀로 듣는’ 모험이 된다.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사도 비타민 같이 활력을 준다. 게이타로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호기심을 대리 충족해 나간다. 모험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일상이 확장되는 과정에 있었다. 

‘귀로 듣는 모험’은 이로써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우리도 다채로운 이야기로 삶의 조각보를 채울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 질문은 어떻게 지루한 일상을 새로움이 솟아나도록 변주할 수 있을까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안으로, 안으로만 향하는 생명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 밖으로 몸을 사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5년, 312쪽)


소세키가 알려주는 팁은 생명력의 방향을 밖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서는 생명력을 발산할 수 없으니 자의식의 우물에서 빠져나와 넓은 관계망을 뻗어나가라는 말이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리좀”과 같은 작동방식이다. 리좀은 수직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수목이 아니라 사방팔방 뿌리줄기를 뻗어나가는 덩굴식물이다. 리좀은 자아라는 중심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활동을 뻗어나간다. 누구와도 접속하고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활동성 그 자체이다. 모험이란 리좀처럼 중심을 벗어나는 탈주이며,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활동성이 아니겠는가.


내 경험을 말하자면 대구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내가 감이당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탄 행위가 리좀이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책이라면 평소 혼자서도 읽어왔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들과 모여 공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모험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었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 인상적인 우화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찾으러 신을 찾아갔다. 신은 먼저 물 한 잔을 떠오라고 했다. 그 남자는 물을 뜨러 옆집에 갔는데 마침 예쁜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가 나서 아내도 아이도 다 떠내려가게 될 지경이 되었다. 다급해진 그는 다시 신을 찾아가서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때 신이 묻는다. “물은 어디 있는가?”




이 에피소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곰샘(고미숙 선생님의 애칭)이 우리에게 물었을 때, 나는 '그 신 진짜 목 말랐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곰샘은 “진리는 물 한잔처럼 쉬운 거다. 평범한 진리는 무시하고 나중에 찾겠다면서 몇 천년 동안 인류가 괴로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색다른 해석이었다. 머리를 땅 때리는 울림이 있었다. 책을 읽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에세이를 발표하고 비판하는 공부는 다른 일상을 만들어 냈다. 글을 쓰느라고 고민하는 날들이 매일매일 새로웠다. 작가라야 글을 쓴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글을 쓰면 누구나 작가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4년을 계속 다니자 내 친구들은 염려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나이에 공부할 게 뭐 그리 많으냐고, 공부가 뭐 그리 재미있냐고 미심쩍어 했다. 박사과정을 다녔으면 지금쯤 대학 강사라도 됐을 텐데 왜 그러고 있냐고 충고하는 친구도 있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학원 원장 그만두고 대학 강사가 되면 뭐가 달라져? 공부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으면 똑같은 반복이지. 나는 일상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공부만이 존재를 달라지게 한다고 믿는다. 그때 나를 염려해주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정년을 맞으면서 일상이 무료하다는 한탄을 한다. 나는 공부모임을 만들어서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세상은 넓고 책은 많다. 공부 벗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나는 대구에 있는 인문학 모임 구인회에서 철학, 문학, 인류학, 자연과학 등 종횡무진 책을 읽으며 즐거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지루할 새가 없다. 

 

같은 24시간이라도 하루를 체감하는 시간의 밀도가 달라진다. 권태로운 일상은 세월이 쏜살처럼 흐른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은 균질적인 덩어리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가치라도 생성해내고 나의 역량이 커진다는 실감이 있으면 권태를 이겨낼 수 있다. 일상의 탈주란 삶을 싱싱한 활력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활동성이다. 누군가와 활동이 연결되고 의미를 나눈다면 삶의 조각보는 풍성한 시간으로 채색될 것이다. 삶을 질적 차이가 나는 일상으로 촘촘하게 구성한다면 그것이 모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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