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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나쓰메 소세키, 『명암』 -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결혼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by 북드라망 2019. 8. 7.

나쓰메 소세키, 『명암』 -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결혼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결혼의 빛과 그림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누군가는 유행가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해 쓴 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혹은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라고 말끝을 흐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의 대답이 되겠다. 내게 같은 질문을 묻는다면 ‘사랑은 바닷물’이라고 대답하겠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게 된다. 


『명암』은 사랑과 결혼을 둘러싸고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보여준다. 『명암』은 소세키가 죽기 직전까지 신문에 연재했던 마지막 소설이다. 작가는 병마와 싸우면서 장장 600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썼다. 소설가로서 가장 완숙한 시기의 작품이다. 소세키가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우미인초』(1907년)에는 후지오라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후지오는 자기 취향대로 남편을 선택하려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돌연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만약 후지오가 죽지 않고 결혼에 골인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로부터 9년 후의 작품인 『명암』(1916년)에서 소세키는 오노부라는 신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오노부 역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주체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후지오와 달리 자기 의지대로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차를 두고 작가의 여성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되겠다.




이 소설은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쓰다가 치질 수술로 입원한 일주일을 전후로 열흘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지는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쓰다는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 먼저 문을 열어주는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아내의 교태에서 뭔가 “번뜩이는 나이프의 빛”을 본 것 같다. 쓰다는 상황판단이 빠르고 영리한 아내가 내심 두렵다. 옅은 화장을 하고 있는 아내는 아름답지만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이 든다. 호락호락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가 그를 긴장시킨다. 이 여자는 왜 나를 남편으로 선택했을까. 쓰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쓰다에게 오노부는 다루기 힘든 아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아내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타자이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이기는 오노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노부는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해 힘껏 애교를 떨며 남편 눈치를 본다. 자기 깐에는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하지만 남편의 태도는 뻣뻣하다.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존재란 말인가 오노부는 굴욕감을 느낀다. 결혼은 했으나 소유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내는 속이 쓰리다. 주변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그녀에게 자상한 남편에게 사랑받고 사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추켜세운다. 그녀는 “매일 씨름판 위에서 얼굴을 맞대고 씨름을 하고 있는 부부 관계”를 남에게 들키기 싫다. 보란 듯이 “난 행복해”를 과시하고 싶다. 오노부는 사랑의 불가능성 때문에 초조하고 잃어버린 처녀시절의 자유의 향기가 그리워 새장 속에 갇힌 작은 새처럼 희미하게 한숨을 내쉰다. 

 

『명암』은 소세키 작품 중에서 가장 두껍고, 가장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며, 가장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은밀하게 신경전을 펼치는 부부, 노골적으로 반목하는 시누이와 올케,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오지랖 대마왕들, 쓰다의 과거를 빌미삼아 삥 뜯는 친구까지 인물관계가 입체적으로 얽혀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탐색하는 이 부부의 신경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은 또 무엇인지 회의가 밀려온다. 서로를 견제하며 심리전을 펼치면서 남들 앞에서는 사랑과 행복을 연기하는 쇼 윈도우 부부는 헝클어져버린 결혼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실험하다


결혼 전 오노부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책을 빌리러 갔다가 쓰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오노부는 중매쟁이를 앞세워서 이 결혼을 성사시켰다. 좋아서 결혼하는 게 뭐 그리 특별한가 싶겠지만 때는 가부장제의 색채가 짙던 메이지 시대이다. 남편감을 선택한 오노부는 당대에 보기 드문 여성이었던 것이다.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은 보편적 사회정서가 아니었다. 결혼은 재산 상속을 위한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게 사회적 통념이었다. 쓰다의 숙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남의 딸을 부모로부터 독립한 그냥 여자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어떤 아가씨를 봐도 부   모라는 소유자가 어김없이 뒤에 붙어 있다고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아무리 반하고 싶어   도 반할 수 없는 처지 아니었겠어? 왜냐하면 반한다거나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를 이쪽이 소유   해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 이미 소유권이 있는 것에 손을 대는 것은 도둑질이니까.” (나쓰메 소세   키, 『명암』,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년, 94쪽)


그랬다. 여자에게 반하는 것은 남의 재산을 탐내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결혼은 재산과 혈통의 보전을 위한 값어치로 계산되고 거래되었다. 세계사를 봐도 자식의 통혼을 정략적인 수단으로 이용해서 영토를 확장시키고 제국을 유지해온 사례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지참금을 가진 여자는 남자에게 소유권이 양도되었다. 재산권을 양도받은 남자는 아내를 부양할 의무를 가지게 되고, 여자는 그 대가로 섹스, 출산,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얼굴도 모르고 말 한 번 나눈 적도 없이 결혼하는 마당에 누구도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풍습은 18세기 후반에 와서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연애결혼이 일반화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지금도 부의 세습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략결혼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근대에 들어서 낭만적 사랑과 결혼에 등식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쓰다와 오노부의 결혼은 희귀한 사건이었다. 남자가 결혼상대자를 돈으로 사오는 풍속이 보편적인데 오노부는 이 구도를 역전시켰다. 여자가 결혼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니 연애결혼과 비슷하게 보인다. 쓰다의 친척들이 보기에 오노부는 튀는 여자이다. 그들 눈에는 쓰다가 아내에게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 형제 가족집단을 뒷전으로 미루게 만든 ‘여우같은 여자’랄까. 주변 사람들은 오노부에게 배타적인 감정을 품는다. 

 

쓰다는 “여자에게 선택된 남자”이다. 역방향 결혼인 만큼 남편은 가장으로 군림하고 아내는 종속되는 수직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노부는 남편 말에 맞서 자기 의견을 대등하게 말하는 아내이다. 그녀는 진실을 털어놓게 하려고 능숙한 화술로 추궁해 들어간다. 이들은 수평적인 부부관계라는 종래에 없던 실험을 하게 되었다. 매일 씨름판 위에서 힘 겨루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이들 부부의 특이성이다. 소세키가 다른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주관적 시점에서 내러티브를 펼쳤던 것에 비하면 『명암』에서는 남편의 관점과 아내의 관점이 공평하게 다루어진다. 소세키는 쓰다와 오노부의 심리를 교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특별한 서술방식에는 평등한 부부관계를 실험하는 시도가 깃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음양의 조화와 불화가 만들어내는 권력관계




결혼으로 독립된 가정을 이루게 된 쓰다는 자기 월급만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하다. 쓰다는 아내에게 돈 많은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허세를 부린다. 그는 아버지에게 상여금을 받으면 갚겠다고 약조하고 매달 돈을 빌려서 생활비에 보탠다. 재력 부족으로 보여서는 아내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쓰다는 상여금을 받았지만 오노부에게 반지를 사주느라 아버지에게 돈을 갚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생활보조금을 끊는다. 치질 수술을 받게 된 쓰다는 병원비가 없어서 또 돈을 빌려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눈치를 본다. 남편의 체면과 아내의 허영심이 실 뭉치처럼 엉켜있는 결혼생활이다.


아버지나 오빠, 남편처럼 호주가 될 수 있는 남자들이 어머니나 누이, 아내의 생활비를 책임진다는 것은 메이지민법이 정한 남녀관계, 즉 남자가 여자를 경제적으로 지배한다는 권력관계의 구도일 것입니다. (고모리 요이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 한일문학연구회 옮김, 이매진, 2006년, 133쪽) 


부부관계는 일종의 권력관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관계에 세를 실어주는 매개체는 화폐이다. 남자가 경제적 부담을 지는 대신 여자에게 아내나 어머니로서 헌신하기를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만들어진다. 경제적 주도권을 확실히 쥐지 못한 남자는 감정적으로도 아내에게 열세를 느낀다. 새 가족을 이루고 사회의 보편적 제도 안에 편입되었다는 안도감이 결혼의 빛이라면 상대방에게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양보해야 한다는 상실감이 결혼의 그림자일 것이다. 


소세키가 펼치는 결혼관은 음양화합과 음양불화의 양면성이다. 재미있는 건 음양화합이 필연적이듯 음양불화도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부부관계가 성립하자마자 진리는 정반대가 된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견인력이 순식간에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으로 바뀐다. 부부는 떨어지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되기 힘들다. 음양이 태극처럼 맞물려서 돌아가는 결혼의 양면성을 쌈박하게 설명한 뒤 오노부의 고모부가 보여주는 행동은 위트가 있다. “이건 음양불화일 때 가장 잘 듣는 약이야. 대개의 경우 한 봉지만 먹으면 금방 낫는 묘약이거든” 하면서 고모부는 오노부에게 돈 봉투를 건네준다. 아닌 게 아니라 음양화합의 직효약이 맞나보다. 오노부가 얻어온 돈을 남편에게 건네주자 모처럼 부부사이에 고소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이 돈이 시누이와 올케사이를 막장으로 몰고 가는 꼬투리가 되었으니 인생 참 속수무책이다. 

 

쓰다의 여동생, 즉 오노부의 시누이는 아버지에게 빚을 못 갚는 오빠를 책망해왔다. 오노부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오빠가 사치스러운 올케에게 푹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여동생은 오빠가 가족을 무시한다고 책망하지만 그녀를 히스테리 직전까지 몰고 가는 진짜 감정은 시기질투이다. 쓰다의 여동생은 특출한 미모를 지닌 덕분에 상당한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녀는 자식을 둘 낳고 시부모와 시동생까지 모시고 살림꾼으로 헌신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자기 남편은 외도를 일삼고 성병까지 걸렸다. 겉은 번지르르한 부잣집 부인이지만 불행한 여자다. 그런데 올케언니를 보면 오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같은 여자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내가 더 예쁜데 여동생은 샘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여동생은 오노부를 괴롭히고 싶은 악의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세력가 요시카와 부인의 힘을 빌어서 오노부를 골탕 먹일 작전을 짠다. 

 

요시카와 부인은 쓰다가 다니는 회사의 상사부인으로 자본가적 권력의 대리인이다. 그녀는 쓰다를 회사직원 이상으로 편애하며 어린애처럼 등을 토닥거려주는 친밀한 관계이다. 요시카와 부인은 쓰다와 오노부가 알콩달콩 깨 볶는 모습이 아니꼽다. 행복에 총량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남이 행복하면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불쾌해진다. 요시카와 부인은 쓰다의 아내가 모르는 비밀을 쥐고 있다. 사실 쓰다는 결혼 전에 기요코라는 여자를 좋아했다. 기요코는 불현듯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렸다. 여자에게 버림받은 쓰다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요시카와 부인은 쓰다가 기요코와 재회하도록 비밀리에 주선해준다. 쓰다는 요양을 핑계로 옛 애인이 머물고 있는 온천으로 향한다. 왜 그녀가 떠났을까 한 번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잠재되어 있던 못 다한 사랑의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오노부는 악의적인 계략의 비밀스러운 낌새를 눈치 채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남편이 의심스러울 때마다 오노부는 자기 스스로 남편을 선택한 일을 떠올린다. 자기가 직접 남편을 골랐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녀는 무조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더 노력할 것을 결심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위태로운 부부사이에 균열을 가속화시키는 훼방꾼이 끼어들었다. 결혼 파탄의 징후가 다가오고 있다. 사랑을 붙들어 매려는 결혼은 덧없고 허망한 신기루로 보인다. 소세키의 소설 에는 오늘날 드라마에 넘쳐나는 외도와 갈등이 담겨 있고, 영화 <완벽한 타인>이 보여주는 대로 행복을 연출하는 부부의 이면에 존재하는 완벽한 타자성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 출구는 없을까?


쓰다가 온천으로 가서 옛 애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아쉽게도 『명암』은 미완으로 멈췄다. 소세키가 죽지 않고 소설을 끝맺었다면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까?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한 학인들은 멋대로 결말을 써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와우 육이오동란은 난리도 아니었다. 기요코와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옛 여자를 만난 사실을 아내에게 들켜 혼쭐이 난다. 입센의 노라처럼 오노부가 집을 나간다. 다들 가슴속에 이야기꾼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지 아침 드라마급 스토리가 줄줄 쏟아졌다. 그야말로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로서는 이들 부부가 계속 의심과 믿음을 오락가락하며 줄 당기기를 무한 반복한다는 쪽이다. 그게 결혼의 숙명이기도 하고, 개인의 내면을 해저까지 파고 내려가는 소세키는 쉽사리 출구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뒷얘기가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명암』은 사랑과 결혼의 실상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옛 애인을 만난 쓰다는 아내와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자신이 아내 앞에서는 수동적이 되는데 옛 여자를 상대하면 적극적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능동적인 사람 앞에서 소극적이 되고, 수동적인 사람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변한다. 타자와 어떤 힘의 관계로 만나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도 달라진다. 여기서 근대적 개인과 타자성을 면밀하게 탐구하는 작가의 탁월성을 엿볼 수 있다. 부부는 각자 독립된 개인으로 분절된 고독한 개체이다. 동일한 사건과 마주쳐도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감정이 출렁이고 의심과 질투가 엇갈린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이 결혼은 명암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결혼은 자신과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의 차이성을 감내해야 한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야말로 영원한 타자성을 확인하는 실험일지 모른다. 

 



번뇌 중에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고통도 이에 못지않다. 보고 싶은 사람과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을 했지만, 보기 싫어도 매일 봐야하는 고통, 이 두 가지 감정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결혼생활인 것 같다. 오죽하면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이 이생에서 부부가 된다는 말이 있을까. 예컨대 결혼 전에는 한 없이 매력적으로 보이던 과묵함이 결혼 후에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보인다. 종이 한 장 뒤집듯이 장점이 단점으로 전환하는 이런 모순된 감정을 겪는 관계가 부부일 것이다. 나도 결혼하고 전국 남흉모(남편 흉보는 여자들의 모임) 회장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래성을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했다. 결혼 30주년을 넘긴 나는 이제 “맹물 같은 사랑”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물고문이 아닌 다음에야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맹물이야말로 인간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생명수가 아니겠는가. 타자를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속절없음을 세월의 두께로 얻게 된 지론이다. 사랑이 바닷물이라면 짠 바닷물을 꼭 들이킬 필요는 없다. 멀리서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거나 수영을 하거나 파도를 타고 노는 걸로 충분하다. 

 

요즈음 신종 개념으로 등장한 여사친, 남사친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 사이에 굳이 ‘사람’이 들어간다. 이성일지라도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여사친, 남사친의 관계는 동성 간의 우정에서 얻을 수 없는 이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들어있다. 여사친, 남사친을 사귄다고 상대방 엄마가 나서서 돈 봉투를 내밀며 헤어지라고 물을 끼얹는 꼴불견은 연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시간과 관심, 호의를 독점하려고 하는 순간 여사친에서 여친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실망하고 다투고 헤어지는 구태의연한 모습이 재탕된다. 나는 이 단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 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관계 맺는 방식의 하나라고 본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분명히 이심이체이다. 서로 다른 마음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살아가야 한다. 개체의 다름을 유지하면서 맹물 같은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대안을 여사친, 남사친처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 보고 있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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