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나쓰메 소세키 『갱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어디로 갈까?

by 북드라망 2019. 6. 19.

『갱부』 밑바닥에서 일어서는 힘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어디로 갈까?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다


단 한 명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새로 살고 싶다든지, 이대로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세키의 『갱부』에 깊이 매료될 수 있다. 이유가 뭐든 간에 당신은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절망해본 사람임에 분명하다. 절망의 끝에서 나 몰라라 도망치고 싶을 때 어디로 가야할까? 정면 돌파할 수 없다면 삼십육계 줄행랑도 좋은 계책이라 하지 않던가. 따져보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가정주부가 ‘살림을 탕탕 뽀사 뿌리고’ 가출한들 겨우 찜질방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되돌아오듯 말이다. 대책도 없이 그냥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는 절박감만이 강렬하다. 




『갱부』는 이런 심정에 사로잡힌 19세 청년이 삶의 밑바닥으로 전락하는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전락을 통해 자아의 변화를 체험하는 이야기다. 5월의 어느 날 밤 아홉시, 해도 지고 어두운 데 한 청년이 집을 뛰쳐나온다. 갈아입을 옷도 없고 가진 돈도 없다. 청년은 밤새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릿한 세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세상을 등지고 싶다. 스무 살도 채 안 되었는데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만이 위안이 된다. 그렇다고 자살을 감행하기는 두렵다. 삶은 가깝고 죽음은 막연하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다. 이 청년에게 무슨 비극적인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는 두 소녀와 삼각관계에 얽힌 나머지 세간의 비난을 받고 도망쳐 나온 길이다. ‘지난 1년간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든지 의리, 인정, 번민 같은 것이 파열하여 대충돌을 일으킨 결과’(『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4년, 42쪽) 가출을 하게 된 것이다. 독자의 눈으로 보면 그깟 일로 무슨 가출이냐고 빈정댈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민감성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사정은 시시해 보이는 법이다. 나의 불행은 한없이 지극하고, 남의 불행은 턱없이 가소로운 게 또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가출 이틀째 아침, 청년은 길에서 만난 사내의 한 마디에 낚였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가 다가와 “임자, 일할 생각이 없나?”고 묻는 순간 청년은 속세에 집착하는 마음이 싹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생각을 하던 그였다. 그는 일하겠다고 대답한다. 지금까지 그는 부모에게 기대어 빈둥거리며 살았다. 전에는 돈만 벌면 된다는 세상의 물신주의를 비웃던 그였지만 무일푼이 되었으니 하릴없이 조조 씨를 따라간다. 조조 씨는 광산에 갱부를 소개해주고 소개료를 버는 야바위꾼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갱부를 대단한 직업인 양 돈을 아주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두 사람은 광산으로 가는 도중에 붉은 담요를 두른 사내와 떠돌이 꼬마를 만났다. 조조 씨는 그들에게 또 “임자, 일할 생각 없나?”고 묻는다.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두 사람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순히 따라나선다. 

 

일행은 캄캄해진 산 속의 산을 걷고 또 걷는다. 청년은 이틀 동안 고구마 하나 먹었을 뿐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깊은 산 속 오두막에서 이불도 없이 자고 난 다음 날도 아침밥을 거르고 또 걷기 시작한다. 청년으로서는 아침밥을 안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하루 세끼를 못 먹고 살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청년은 자신의 전락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 어떤 관념보다 배고픔이 현실을 생생하게 가르쳐준다. 가출 사흘째, 도쿄의 부잣집 도련님은 마침내 구리광산에 도착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청년이 단 하루 땅 속 깊이 내려가 갱내를 체험한 이야기이다. 이 짧은 며칠 동안 생사를 오가는 성찰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솟아난다. 

 

소세키는 마치 직접 체험한 것 같이 촘촘하게 갱부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한 컷 한 컷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는 문체다. 소세키는 주로 자신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을 소재로 소설을 썼는데 『갱부』는 유일하게 다른 사람의 체험담을 듣고 쓴 소설이다. 어디까지가 실제체험이고 소세키의 상상력과 사유가 덧붙여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느 작품보다 드라마틱하다. 막장 인생이라고 부르는 밑바닥에서 청년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은 무슨 힘으로 밑바닥에서 일어서게 될까. 이 작품은 좌절과 전락의 경험이 인생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질적인 존재와의 만남


광산에는 만 명 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갱부가 되려면 조수일 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일당 35전으로 버텨야 한다. 일당의 5퍼센트는 십장에게 내고, 이불 빌리는 데 6전, 밥값으로 14전 5리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남는 돈이 있다한들 갱부들은 주사위 도박을 하고, 색주가에 돈을 바치느라 빈털터리가 된다. 더러 학교 교육을 받은 서생이 들어왔어도 열흘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하루에 두세 명은 도망치고, 거의 매일 죽는 사람이 나온다. 청년은 도착한 첫날부터 사체를 운구하는 장례행렬을 보았다. 방 안에는 병이 들어서 진 빚 때문에 마누라를 저당 잡힌 갱부가 죽은 듯이 누워있다. 


다음 날 청년은 갱내를 견습하러 내려간다. 동굴 속은 칠흑같이 깜깜하다. 불을 밝히는 칸델라에 물이 떨어져 곧 꺼질 것처럼 지지직 소리가 난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굉음 소리와 매캐한 연기로 자욱한 진흙 굴을 기어가고, 허리까지 물에 빠지고, 90도 각도로 깎아지른 절벽을 출렁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사다리 열다섯 개를 내려가야 하는 깊은 막장이다. 청년은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의식이 희미해진다. 차라리 사다리 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거꾸로 떨어져 머리가 박살나면 좋겠다는 죽음충동에 사로잡힌다. 딱 하루지만 광산의 실상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흰 손의 지식인이 검은 갱부로 전락하는 체험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하나는 신체의 변화고 또 하나는 인식의 변화이다. 몸도 마음도 바뀌었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선 신체로 말하자면, 청년이 광산에 도착했을 때 느낀 최초의 감정은 당황스러운 이질감이다. 갱부들은 평소 그가 보아왔던 사람의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퍼렇고 새까만 안색은 도회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얼굴이다. 광대뼈는 높이 솟아있고 눈은 움푹 들어갔다. “요컨대 살이라는 살은 모두 퇴각하고 뼈라는 뼈는 모조리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갱부』, 167쪽) 짐승 같은 얼굴이다. 갱부들의 거칠고 난폭한 눈빛을 보고 청년은 완전히 기가 죽는다. 갱부들도 청년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청년이 학교 교육을 받으며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챈다. 그들은 “여기가 지옥의 입구야. 들어갈 수 있겠어?”하면서 청년을 조롱한다. 너 같이 연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한다. 막장까지 와서도 조롱과 모욕을 받는 인생이라니, 청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포장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광산에서 자던 첫 날 밤, 청년은 빈대가 물어대는 통에 이불도 못 덮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밤을 새웠다. 그런데 그토록 괴롭히던 빈대가 이삼일이 지나자 아프지가 않다. 그에게도 ‘살에 품격이 생겨’ 빈대가 두 손을 든 건지. 청년도 갱부와 ‘같은 냄새’가 나는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청년의 눈에 짐승처럼 보였던 갱부의 얼굴이 이제는 평범하게 보인다. 이질적인 타자였던 갱부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이는 변화이다. 타인에게서 동질감을 발견할 때 그의 고통이 보이고 공감할 수 있다. 이질적인 존재와 만나는 전락의 체험은 다른 신체로 거듭나게 한다.

 



인식의 변화라면 광산으로 오는 길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조 씨가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선뜻 길을 나서는 빨강 망토와 떠돌이 꼬마를 보며 청년은 자문한다. 그동안 내가 사는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걸까? 어떻게 저리 쉽게 길을 선택할 수가 있지? 청년은 놀랍기만 하다. 청년은 사람이 끌어당기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꼈다. 조금 전까지 죽음에 다가갔던 자신의 결심이 다른 사람의 힘에 끌려 쉽사리 방향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삶에 대한 의욕이 생겼다. 처음으로 그는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도 길동무가 생긴 게 고맙다. 그는 “사람이 없는 지옥보다는 요괴가 있는 지옥을 택할” 거라고 생각한다. 외롭게 혼자 있는 세상 보다는 자신을 괴롭히는 요괴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좋다는 인식의 전환이 흥미롭다.



모순된 자아를 긍정하다


여기서 뜻밖의 반전! 청년은 갱부가 되지 못한다. 건강진단을 받아보니 기관지염에 걸린 게 드러났다. 폐병으로 발전할 수 있기에 갱내는 못 들어간다. 대신 청년은 한바 관리사무실에서 장부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고, 오 개월 후 도쿄로 돌아온다. 비록 지식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낸 청년은 변모했다. 

 

소설 초반에 보여주는 청년의 자의식은 상류층의 도련님을 벗어나지 못했다. 광산에 도착한 날 청년은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 한다. 한바 책임자가 “당신은 날 때부터 노동자는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임자나 자네라고 낮춰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높여서 불러준 것만으로도 인정받은 것 같아서 감격스럽다. 소설 후반의 청년은 달라졌다. 전락의 경험은 그에게 자의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나도 그 때 가출을 하지 않고 귀여운 도련님으로서 얌전히 성인이 되었다면, 내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도 모른 채, 변하면 큰일이다, 죄악이다 하며 끙끙 앓다가 나이를 먹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청년은 생각한다. 


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 사상을 가지   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 사상이나 감정이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기회가 없으면 평생 그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   장한다. 그 증거는 이런 거라며 줄기차게 반대의 언행을 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 언행은 모   순되어 있다. (나쓰메 소세키, 『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4년, 62쪽)


그가 길 위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다. 무의식 속에 잠복되어 있는 감정과 생각을 뚜렷이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이 끝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면 변하는 자신을 자학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건과 상황을 무시하고 불변의 마음을 강요하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원망과 불신만 커진다. 


모든 고통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 자아에 집착하기에 번뇌가 자라난다. 고정불변인양 자의식에 매달리는 믿음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인간은 “신까지도 애먹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는 물건”(『갱부』, 24쪽)인 것이다. 자의식을 벗어나면 인정욕망에서도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괴로울 이유도 없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모순된 감정과 생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긍정하고 나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타인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진다. 청년은 자신이 별로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죽을 것 같이 괴로웠던 세상의 평판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자아라는 쇠사슬을 벗어던질 때 그는 한층 고양된 존재를 느낀다. 자아를 버리는 체험이 묘하게도 삶의 활력소가 된다. 청년은 그동안 집착하던 자신의 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죽음의 유혹에서 싹트는 삶의 열망


이 작품을 읽으면 절망의 끝자락에 가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하게 된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인생의 굴곡을 겪기 마련이다. 돈이 무진장 많아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을 것 같은 집안도 송사와 다툼이 끊이지 않고, 국민적으로 망신을 당하며, 승승장구 잘나가던 사람도 수치스럽게 몰락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나는 인생이 굴러가는 운동법칙은 직선 운동이 아니라 파도치듯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는 파동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논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내 친구 원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 학원에 다니던 중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전문직 직업을 가진 부모에 집안도 유복했고 학교에서 전교 1등을 줄곧 유지하던 학생이었기에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죽은 날 그의 누나가 논술학원에 수업을 하러 왔다고 한다. 동생의 장례식도 안 마쳤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학원을 올 수 있느냐고 원장이 물으니 누나는 ‘엄마가 학원 빠지면 안 된다고 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학생의 자살 못지않게 놀라운 일이다. 원장은 당장 그 엄마를 만나러 가서 “지금은 충분히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누나의 정신적 충격을 돌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몰락에 대처하는 법을 몰라 살던 대로 사는 습관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던 사건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학원을 경영하던 몇 년 전까지 특목고나 자사고를 지원하는 학생은 자기소개서를 써야했다. 소개서 항목 중에는 “내가 겪은 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가.”라는 질문이 늘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특출난 재능이 있는지 어떻게 열심히 학업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곧잘 쓰는 학생들이 이 질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위기가 있었어야지, 하다못해 우리 부모는 이혼도 안 하고...” 아이들은 투덜거렸다. 성적이 떨어지는 고민 외에는 경험의 폭이 너무 좁았다. 우리 사회는 어른들이 모든 걸 방어해주고 미리 결핍을 충족시켜주고 좌절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홈 파인 공간은 균질화된 삶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자아에 대해, 인생에 대해 실존적 고민을 피해갈 수 없는데 누가 위기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전락의 체험은 극단적인 파국으로 가기 전에 실낱같은 돌파구를 발견할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넘어질 수는 있다. 문제는 어떻게 몰락한 자리에서 일어서는가이다. 『갱부』의 청년도 광산이라는 마지막 완충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음으로 향하는 가속도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가출은 했지만 청년에게 죽음에 대한 의지는 거의 없었다. 죽고 싶다는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마음의 굴절된 표현이다. 오죽하면 죽을 때 죽더라도 폼 나게 자살해야 한다는 허영심을 보여주지 않는가. 청년은 변소나 창고에서 목을 매는 건 저속하고, 갱내에서 광석처럼 굴러 떨어져 죽는 건 개죽음이라서 기왕이면 게곤 폭포에 가서 멋지게 자살해야지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 해 사다리를 올라갔던 것이다. 

 

절망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체험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맞닿아있다. 관념으로 여겨왔던 죽음이 절실한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다. 청년이 자살하기에 딱 좋다고 목표 삼았던 게곤 폭포는 소세키와도 매우 관련이 깊은 곳이다. 게곤 폭포는 당시 유행하던 염세주의에 빠진 청년들이 자살하러 가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여기서 잠깐 “소세키와 청년”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을 소개한다. 1903년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소세키는 제일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학교에는 후지무라 미사오라는 최연소 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자살한 후 큰 아버지 집에 살고 있었다. 미사오는 공부에 뜻이 없어 발표를 시켜도 준비 해오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했기에 소세키가 예습을 해오지 않으려면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미사오는 5월 22일 게곤 폭포에 가서 투신자살했다. 유서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몸, 살아갈 가치가 없음을 느낀다”고 썼고, 폭포 옆에 있던 나무에 “삼라만상의 진실은 불가해(不可解)”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삶에 대한 번뇌와 비관을 못 이겨 자살한 제자 때문에 소세키는 큰 충격을 받았고 괴로워했다. 6월부터 소세키는 신경쇠약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한밤중이 되면 불같이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몇 개월간이나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버릴 정도였다. 소세키가 앓았던 신경쇠약은 이듬 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완화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위장병으로 고생을 한다. 부인 교코의 회상에 의하면 글을 못 쓰는 시기에는 신경쇠약이 도지고 글을 열심히 쓰는 시기에는 위장병이 악화되는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갱 안에서 청년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다. 청년에게 삶의 불씨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지하에서 만난 갱부 야스 씨이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는데 뭔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치정관계에 얽혀서 도망쳐 온 사람이다. 야스 씨는 자신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 수 없는데 죄를 묻는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광산에 숨어들었다. 갱부 생활 6년차의 야스 씨는 청년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는 청년에게 여비를 줄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학문을 한 사람이 갱부가 되는 건 일본에 손해이니 일본에 도움이 되는 직업을 구하라”고. 솔직히 이렇게 뜬금없는 충고 때문에 청년이 삶의 의지를 되찾은 건 아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 “상대가 훌륭하므로 나도 훌륭하게 행동하고 싶다”는 호감, 야스 씨가 전락했으면서도 “살아서 자신을 구원하려 하고 있다”는 걸 보며 죽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는 걸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청년은 아무리 힘들어도 전락의 수련만 쌓는다면 삶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맨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니 올라올 일만 남아있다. 죽음에 대한 욕망이 아주 작은 이유로 인해 순식간에 삶의 의욕으로 전환한다는 것도 인생 막장에 도달해서 얻은 지혜다. 암흑 속을 헤매던 청년이 야스 씨와 만나는 대목에 이르러 나는 영화 <JSA>를 떠올렸다. 적막하고 아득한 DMZ에서 소총을 든 이병헌이 길을 잃고 안개 자욱한 갈대밭을 헤매다가 지뢰를 밟는 장면이다. 사방은 광대무변의 수풀이다. 인적 하나 없는데 저 멀리 노루가 뛰어가고 어디선가 짙은 안개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그 감미로움, 그 미칠 듯이 따스한 사람소리. 삶의 밑바닥에 넘어진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힘은 그렇게 전해지는 따뜻한 에너지가 아닐까.


글_박성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