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 청춘풍속도
누가 청춘에게 길을 말해줄까?
배짱이 생기는 약으로 될까?
“너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없어서 못쓴다. 배짱이 없는 것은 손해막심이라 시험을 볼 때와 같은 경 우에는 얼마나 곤란한지 모른다. (중략) 너는 부들부들 떨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도쿄의 의사에게 배짱이 좋아지는 약을 지어달라고 해서 평소에도 가지고 다니며 먹어라. 낫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7년, 210쪽
시골에 사는 어머니가 대도시로 공부하러 간 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어머니는 성격이 소심한 아들을 생각하면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염려스럽다. 도쿄에는 분명히 ‘배짱이 좋아지는 약’이 있을 테니 처방받아서 먹으라고 충고한다. 슬그머니 웃음이 번진다. 배짱이 생기는 약? 그런 약이 있으면 나도 당장 사먹고 싶다. 이 편지를 받은 산시로는 규슈에 있는 고향 구마모토를 떠나와 도쿄에 온 23세의 새내기 대학생이다. 이 소설이 나왔을 당시 일본에는 대학교가 도쿄, 교토, 도후쿠 제국대학 세 군데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대학 진학률이 높던 시절이 아니므로 제국대학에 입학한 대학생이라면 전국에서 선발된 극히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정도로 똑똑한 아들인데도 어머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 큰 도시에 가서 겁을 먹고 떨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도쿄는 어머니도 가보지 못한 도시다. 배짱이 좋아지는 약이든 뭐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많은 어른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근대의 대도시는 신기루를 펼쳐내는 환상적인 세계다. 그만큼 무섭고 위험천만한 곳이기도 하다.
『산시로』는 나쓰메 소세키가 1908년에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풋풋한 청춘소설이다. 마흔 살 중년에 접어든 작가는 20대 청춘의 세계를 경쾌하게 그려냈다. 이야기는 산시로가 고향을 떠나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도쿄까지는 기차를 갈아타고 이틀을 가야하는 먼 여정이다. 산시로는 나고야에서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을 때 생면부지의 중년여자와 허름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된다. 그녀의 부탁을 딱 잘라서 거절할 용기가 없다보니 어쩌다 벌어진 사태다. 여자는 수줍어하는 기색도 없이 “등을 좀 밀어드릴까요?”하며 목욕탕에 들어오려고 한다. 산시로는 화들짝 놀라서 욕실에서 뛰쳐나온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려고 공책을 꺼내 일기를 쓴다. 속으로는 여자는 그토록 침착하고 태연한 존재일까 의아하기 짝이 없다. 그는 시트자락을 둘둘 말아서 방 한 가운데에 경계선을 만들고 수건을 깔고 똑바로 누워서 잔다. 다음 날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여자는 쌩긋 웃으며 말한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산시로는 깜짝 놀랐다. 23년간 숨겨왔던 약점을 단번에 들켜버린 심정이었다.
첫 에피소드부터 쇼킹하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배포를 가진 남자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진한 청년 아닌가. 산시로가 이날 체험한 충격은 앞으로 마주하게 될 미지의 세계를 알리는 전주곡이다. 그의 앞에는 낯선 사회가 펼쳐진다. 대학, 도서관, 실험실, 전차, 경양식집, 문예모임, 전람회 등등 그간 안온한 고향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낯선 세계는 여자다. 20대 청년에게 여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세계다. 배짱이 좋아지는 약으로 문제가 풀리기는 할까. 배짱이 생기는 약을 구할 수 없다면 무슨 힘으로 청춘의 시기를 통과할 것인가. 소설은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청춘을 다룬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른들은 젊은이에게 아직 젊으니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자유라는 게 청춘의 특권이라고 한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어찌 희망적인 빛만 품고 있겠는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발부터 내딛어야 하는 막막함은 어쩔 거며, 높은 장벽을 뚫고 가야 하는 불안감은 또 어쩌란 말인가.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시행착오 없이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청춘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를 건너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막에 불시착한 청춘
산시로는 ‘살아있는 세계를 죽은 강의로 가득 채워봤자 희망이 없다’는 친구의 충고대로 넓은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 돌아다닌다. 전차를 타고 거리를 쏘다니고 요릿집도 가고 극장도 가고 도서관에도 파묻힌다. 산시로가 파악한 세계는 세 개의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어머니로 상징되는 과거의 세계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도피처 같은 세계다. 두 번째는 수개월씩 지하 실험실에서 광선실험을 하고 있는 학문의 세계다. 먼지와 이끼로 덮인 대학은 격렬한 도쿄의 움직임과는 동떨어진 듯 보인다. 고요하지만 생기가 없다. 세 번 째는 환한 전등과 은수저와 샴페인, 무엇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 기쁨과 생동감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다. 산시로는 세 번째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변화에 대한 기대감과 모험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한다.
산시로가 꿈꾸는 세계는 세 개의 세계를 버무린 짬뽕이다.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고 교양과 품위를 갖춘 학생들과 교제하고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해서 세상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다. 기뻐하는 어머니를 모셔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한다. 산시로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미래는 찬란하고 근사하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어긋나기 마련. 입학하자마자 산시로는 첫사랑의 시련을 호되게 겪는다.
산시로는 대학 연못가에서 만난 미네코에게 첫 눈에 반했다. 미네코도 그를 좋아하는 눈치를 슬쩍 슬쩍 흘린다. 산시로를 바라보는 미네코의 눈에는 고통에 가까운 열정적인 호소가 있다. 미네코는 ‘입센의 여주인공’라고 불릴 정도로 성격이 당당하고 활달하다. 감정 표현도 적극적이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산시로는 이 여자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자신을 놀리는 건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어쩐지 여자에게 주눅이 든다. 고향의 어머니가 권하는 얼굴 까무잡잡한 시골여성과 결혼하자니 답답하고, 진취적인 도시여성과 자유연애를 하자니 겁이 난다. 배짱 없는 산시로는 우유부단할 수밖에. 미네코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딴청만 피우는 남자가 답답하다. 미네코는 산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stray sheep)” 그들은 사랑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다. 결국 미네코는 오빠의 친구에게 시집을 가버리고 가을 한 철의 짧은 사랑은 끝난다.
소세키는 청춘을 ‘길 잃은 양’에 비유했다. 청춘은 불가피하게 암중모색하는 존재다. 고민과 좌절, 실패와 낙담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돌아보면 나 자신도 사막에 불시착한 것 같은 20대를 보냈다. 소위 386 세대였던 내게 청춘은 푸르지 않았다. 유신독재를 고집하던 대통령은 총 맞아 죽고, 거리는 최루탄 내음으로 자욱하고, 무장한 군인이 교문을 지키고 있던 시대였다. 민족과 역사, 민주주의와 자유, 정의와 평등, 지성인의 사회적 책임과 양심 등등 우리는 지금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번민은 많았지만 세 가지의 질문은 교집합을 이루지 못했다. 천지 사방이 불확실하고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청춘의 나날들은 암울하고 괴로웠다. 힘내라고 격려하는 그 어떤 자기계발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자아와 사회에 대한 고뇌를 몸으로 아프게 통과해야 삶의 철학을 얻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세키도 자신의 젊은 날을 안개 속에 갇힌 고독한 인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하면 좋을지 조금도 어림잡을 수 없었습 니다.(...) 마치 자루 속에 갇혀서 나올 수 없는 인간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 손에 단 한 자루의 송곳만 있으면 어딘가 한 군데 뚫어 보여주고 싶은데’하며 조바심쳤지만 공교롭게 그 송곳은 남 이 전해주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발견할 수도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김정훈 옮김, 책세상, 2013 년, 51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루 속에 갇혀있던 소세키가 발견한 단 한 자루의 송곳은 펜이다. 소세키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질문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개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서양의 문학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흉내 내서는 답이 없었다. 그는 “자기본위”라는 개념을 생각해내고 “그 자기본위를 입증하기 위해 과학적인 연구와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나의 개인주의』, 54쪽) 소세키는 문예의 힘으로 삶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불시착한 사막에서 망가진 비행기를 수리한 조종사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운인가.
자기 본위의 길을 찾는 사람들
이 소설을 통해 소세키가 강조하는 자기본위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자기 본위의 삶에는 두 개의 층위가 겹쳐있다. 하나는 국가와 개인의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과 일본의 대립이다. 국가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하고,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자주적인 발전을 모색하는 길이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처럼 서양을 추종하지 말고 독자적인 지식인 집단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년기의 소세키를 짐작할 수 있는 풍경들이 『산시로』에 나온다. 소세키는 이 소설에서 젊은 지식인 집단의 풍속도를 발랄하게 그려냈다. 때는 러일전쟁 직후다. 일본은 1904년에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무적의 나폴레옹 함대도 정복하지 못한 러시아를 아시아의 조그만 섬나라가 이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세계의 패권을 잡았던 영국을 모델로 삼고 부국강병과 서구화를 추구했다. 구미에 대해서는 굴종적이고, 조선과 중국에 대해서는 침략전쟁을 도발하는 국가의 그늘 아래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회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인 문예모임에서는 자연파와 낭만파 논쟁, 위선과 위악의 풍조, 형식과 내용 등에 대한 열띤 논쟁이 오간다. 당대의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 청년들은 마음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들은 구식 일본의 압박도 싫지만 새로운 서양의 압박도 견딜 수가 없다. 서양의 문예를 연구하고 있지만 굴종하고 싶지는 않다. 신세대 청년들에게 문예는 인생의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사회의 원동력이다. 문예운동을 통해서 자유로운 사상과 개성을 추구하면서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히로타 선생이다. 히로타 선생은 10년 넘게 고등학교에서 박봉을 받으며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명망과 출세에 개의치 않는 철학자이다. 이른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초연하게 살아가는 자기본위의 삶이다. 히로타 선생은 러일전쟁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국가 시책의 홍보에 앞장서는 학자가 등잔불이라면 히로타 선생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제자들이 그를 ‘위대한 어둠’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이유다. 히로타 선생은 기차에서 만난 산시로에게 “아무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일등국이 되어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산시로는 이런 일본인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마모토에서 이런 말을 꺼내면 즉시 몰매를 맞는다. 잘못하면 역적취급을 당하기 때문이다. 산시로가 “이제부터 일본도 점차 발전하겠지요”라고 말하자 히로타 선생은 태연하게 “망할 거야”라고 대꾸한다. 마치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이 먼 훗날 원자폭탄을 맞고 전범국가로 전락할 것을 내다보는 사람 같다.
히로타 선생은 냉소적인 비평가처럼 보이지만 미친 듯이 권력과 자본의 팽창을 향해 달려갔던 전성기에 사회의 벡터를 바꿔야한다고 말하는 비판적인 지성인에 틀림없다. 산시로는 히로타 선생과 있으면 세상살이가 걱정되지 않고 마음이 느긋해진다. 산시로는 자신의 롤 모델이 될 만한 스승을 만났다. 히로타 선생과 산시로의 만남을 보면서 청춘이 불안한 방황으로 뒤범벅이 될 리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실연의 쓰라림으로 사회의 첫 걸음을 내딛긴 했지만 산시로는 앞으로 더 많은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얻고 더 큰 안목으로 세계와 마주하게 될 테니 말이다.
배움과 접속으로 열어가는 세상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산시로처럼 소심하다.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늦다. 산시로가 배짱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그 후』의 다이스케도 아버지로부터 걸핏하면 ‘너는 배짱이 없어서 글렀다’는 말을 듣는다. 아버지의 시대는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의 막부시절이다. 사무라이가 정권을 잡은 시대의 배짱이라는 단어에는 할복과 전쟁의 피비린내가 묻어난다. 다이스케는 그 때는 칼을 휘두르는 야만의 시대니까 배짱이 생존에 꼭 필요한 조건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배짱 따윈 필요 없어!’를 외친다. 그는 문명시대에는 배짱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 능력이 무엇인지 소설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일까? 요즘 시대에는 창의적 상상력이나 융합능력을 꼽을 수도 있겠다. 물질적 가치보다 인본주의적인 정신가치를 생각하는 철학적 소양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청년에게만 이런 역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력감과 위축감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 어른들이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 고작 40대 밖에 안 되었는데 컴맹을 벗어날 엄두를 못 내는 사람도 꽤 많이 봤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평생 정년까지 일자리를 보장받았던 시절은 사라지고 없다. 변화에 맞춰 계속 다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는 지역과 장르의 경계를 넘어 낯선 조우가 이루어진다. 나는 이렇게 집단 지성을 만들어가는 능력이 하나의 대안이 되리라고 본다. 끊임없이 배우고 유연하게 타자와 접속하는 노력이 새로운 세상을 창안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런 결론, 너무 당위적이고 꼰대스러운가? 큰 딸이 고등학교 때 나를 보고 한탄한 적이 있다. 8,90년대의 청년들은 민주주의나 사회정의처럼 가치 있는 꿈을 품었으니 엄마 아빠 세대가 부럽다는 것이다. IMF 이후의 자기들 세대는 안정적인 직업밖에 바라는 게 없으니 이런 초라한 꿈도 꿈이냐고 억울하다고 했다. 새파란 10대 청소년들이 장래희망란에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정규직이라고 쓰는 모습을 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우리 세대가 가르쳐준 지혜가 이 모양이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인문학 강의 요청이 오면 거절한다. 세대 간의 격차를 넘어서 비전과 지혜를 말해 줄 자신이 없다. 요즘 젊은이는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무조건 꿈을 가지라고 협박하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 누가 청춘에게 길을 말해 줄 수 있냐고? 누구든 자신이 겪은 경험적 지식을 말해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디지털 노마드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지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청년은 어른들에게 배우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성세대와 싸워 넘어서야 한다. 청춘을 탕진하는 방법은 무의미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무의미보다 위험한 적은 없다. 좌절과 실패로 지독한 청춘의 통과의례를 거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고개 들어 바라볼 별을 발견하기를 응원할 뿐이다. 별을 품고 살기에 청년은 아름답게 빛난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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