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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소세키의질문들] 『우미인초』 현대문명의 사랑법 독립적인 여성이 설 곳은 어디인가?

by 북드라망 2019. 7. 17.

『우미인초』 현대문명의 사랑법

독립적인 여성이 설 곳은 어디인가?



1. 결혼할 남자를 선택할 자유가 있을까?


『우미인초』는 소세키가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사의 전속작가가 되어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한 소설이다. 대중매체에 선보이는 첫 소설인 만큼 보편적인 대중성을 실험하는 작품이었다. 우미인초는 항우의 애첩이었던 우희가 자결한 후 무덤 앞에 핀 양귀비꽃이다. 경국지색을 상징하는 지극히 아름답고 고혹적인 꽃이다. 이 소설에서 새빨간 양귀비꽃에 해당하는 매력적인 도도녀는 후지오다. 그녀는 화려한 미모와 영리한 머리를 자랑한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화술도 뛰어나다. 후지오는 병오년 생 말띠 여자로 그려졌다. 예로부터 말띠 여자는 날뛰는 말 같아서 남편을 이겨먹는 드센 여자의 상징이다. 한마디로 후지오는 웬만한 남자는 기가 죽는 ‘쎈 언니’라 하겠다. 

 



신문연재가 시작되자마자 『우미인초』는 선풍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어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여주인공이 착용한 옷과 핸드백, 화장법, 심지어 머리핀까지 유행하듯이 그 때도 그랬다. 우미인초 반지, 우미인초 오비아게, 우미인초 유카타지와 같은 기념품이 생산되어 불티나게 팔렸다. 그만큼 후지오라는 캐릭터는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여성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풍속으로는 여성이 스무 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면 이상하다고 수근거리던 때였다. 후지오는 24세나 되었으니 결혼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노처녀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해놓은 혼처가 성에 차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양쪽 집안에서 암묵적으로 결혼상대로 인정해온 남자는 무네치카인데 그는 얼마 전 외교관 시험에 떨어졌다. 무네치카가 앞날이 불투명한 취준생이라는 것도 흡족치 않지만 후지오가 그를 남편 상대로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후지오가 보기에 무네치카는 맘대로 조종하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다. 후지오는 턱으로 신호를 보내면 달려오는 남자를 좋아한다. 강한 남자에게 자존심을 숙이면서 살아가는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집안끼리 정한 혼약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남편감을 직접 선택하려는 여성의 욕망은 성취될 수 있을까?  

 

후지오가 남자를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자기주도권이다. 그녀는 장난감처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남편을 얻고 싶다. 후지오는 자기 집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오노와 썸을 탄다. 오노는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지만 대학을 수석졸업해서 천황에게 은시계를 하사받은 수재이다. 조만간 박사학위만 따면 남편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노의 성격은 후지오의 말 한마디에 절절 매는 유순한 남자다. 여자가 길들이기 쉬운 남편감이다. 

 

두 사람만 있는 방안에는 후끈 달아오른 감정의 기류가 흐른다. “이렇게 하면 돋보여요.” 후지오는 오노의 조끼에 금시계를 달아준다. “드릴까요?” 후지오는 곁눈질로 묻고는 이내 금시계를 떼어낸다.“ 후지오는 금시계를 줄 듯 말 듯 남자를 희롱한다. 금시계는 결혼을 약속하는 사랑의 징표이다. 후지오는 오노를 사랑의 포로로 삼기 위한 ‘밀당’을 즐긴다. 원래 금시계는 아버지가 런던에서 사오면서 무네치카가 졸업하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무네치카는 금시계가 자신의 것이 될 거라 믿고 외교관이 되면 후지오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후지오는 무네치카 집안과의 정혼을 무례하지 않게 깨는 절차를 궁리 중이다. 금시계는 오노의 것이 될 것인가, 무네치카에게 돌아갈 것인가. 후지오는 자기 뜻대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결정권을 휘두를 수 있을까?



2. 자극과 욕망이 뒤섞이는 환영의 불빛


신여성과 전통적인 여성, 도의와 욕망, 근대와 과거가 충돌하는 스토리텔링은 우리에겐 낯설지 않다. 『우미인초』 는 근대소설의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제시했다. 세계는 중첩되어 있다. 후지오를 사이에 두고 오노와 무네치카라는 두 남자가 삼각관계를 이룬다. 오노를 꼭지점에 놓고 후지오와 사요코라는 두 여자가 삼각관계를 이룬다. 거기에 고노와 이토코까지 세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애정전선에 얽히고설키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여기서는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후지오의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후지오가 오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듯이 오노의 마음도 후지오에게 끌린다. 오노 입장에서 보면 곧 집과 유산을 상속받을 예정인 후지오와 결혼한다면 경제적 안정이 딸려온다. 오노가 꿈같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 그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등장한다. 오노가 집도 절도 없이 험한 꼴을 당하던 고아시절에 그를 키워준 옛 은사가 딸 사요코를 데리고 도쿄로 이사 온 것이다. 은사는 오노가 학업을 마쳤으니 자기 딸과 혼인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요코도 오노를 남편으로 여기며 5년을 기다려왔다. 은사부녀는 오노가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빚이다. 

 

오노는 번민한다. 인간이라면 신세진 도의를 갚아야 한다. 도리를 생각하면 가난한 은사부녀를 돌봐야겠지만 부와 출세를 보장해줄 여자가 따로 있다. 후지오가 도쿄를 상징한다면 사요코는 교토를 상징한다. 후지오가 금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사요코는 거문고를 가지고 다닌다. 후지오가 근대를 연다면 사요코는 전통을 이어간다. 후지오가 시대를 앞서간다면 사요코는 시대에 뒤쳐졌다. 도리와 욕망의 기로에 서서 오노는 눈을 질끈 감기로 한다. 오노의 마음은 과거의 족쇄를 버리고 욕망의 세계 쪽으로 기울어진다. 

 



여섯 명의 남녀는 우연히 박람회장에서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그들의 존재가 부딪히고 갈등이 극적으로 촉발되는 장소가 박람회장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이 연재되고 있었던 1907년,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서는 국제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개미는 단것에 모이고 사람은 새로운 것에 모인다.”는 말 그대로 박람회장은 새로운 것들의 집합체이다. 근대 서양문물의 정수가 모이는 곳이다. 박람회에 모이는 사람들도 새로운 욕망에 가득 차 있다. 


문명인만큼 자신의 활동을 자랑하는 자도, 문명인만큼 자신의 침체에 괴로워하는 자도 없다. 문명은 사람의 신경을 면도칼로 깎고 사람의 정신을 나무공이로 둔하게 한다. 자극에 마비되고, 게다가 자극에 굶주린 자는 빠짐없이 새로운 박람회에 모인다.(...) 자극의 주머니에 대고 문명을 체로 치면 박람회가 된다. 박람회를 무딘 밤 모래로 거르면 찬란한 일루미네이션이 된다. 만약 살아있다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앗 하고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에 마비된 문명인은 앗 하고 놀랄 때 비로소, 살아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나쓰메 소세키, 『우미인초』,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년, 193~194쪽)


문명인은 끝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한다. 자극은 소유의 욕망을 부추기고, 가질 수 없는 욕망은 환상처럼 부서진다. 박람회장은 욕망과 환영(幻影)이 뒤섞여서 눈부신 불빛을 이룬다. 바로 이곳에서 후지오는 자신의 포로라고 믿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오노가 은사부녀를 안내해서 박람회장에 온 것이다. 후지오는 “내 남자가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친숙하게 마주보고 있을 때, 당목으로 심장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소유라고 믿었던 실체가 한 순간에 환영으로 바뀐다. 가질 수 없는 것도 탐하는 시대에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은 더욱 참을 수가 없다.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하자 후지오는 질투의 팜므파탈로 돌변한다.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힌 후지오는 파멸로 가는 쾌속열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상대에게 진심을 드러내지도 못한다. 무네치카를 만나면 오노와 놀러간다고 살짝 내비치고, 오노를 만나면 무네치카와 박람회에 갈 거라고 살짝 흘린다. 남자의 질투심을 촉발하려는 얄팍한 책략이다. 후지오는 두 남자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이제 공중에서 헛발을 내딛는 수순만 남았다. 



3. 가부장적 관행에 맞서는 여자는 악녀인가?


소설의 결말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급반전한다. 오노가 은사의 딸 사요코와 혼인을 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오노는 느닷없이 진지하게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겠다고 한다. 남의 약혼녀를 가로채고 남자들의 세계가 던지는 비난을 감수할 만큼 오노는 후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 후지오는 오노의 배신에 당황했다. 그렇다면 어장 관리해오던 무네치카가 있지 않은가. 후지오는 무네치카에게 금시계를 건넨다. 하지만 무네치카는 사정없이 금시계를 대리석 바닥에 내팽개쳐 버린다. 감히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준 여자에게 내리는 징벌이다. 시계는 박살이 났다. 후지오가 올라타 있던 줄은 끊어졌다. 자존심도 무참하게 무너졌다. 후지오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 길로 끝이다. 드센 여자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정말 뜬금없는 비극적 결말이다. 

 

소세키는 왜 후지오를 죽여야만 했을까. 고대부터 사회는 여성을 하나의 재산권으로 소유하고 처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여성은 자기 의지대로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 아버지나 오빠가 여성의 결혼을 결정할 권리를 쥐고 있었다. 여성의 인격적 권리조차 남성에게 달려있었다. 후지오는 근대 문명이 낳은 신여성이다. 두 남자의 마음을 떠보면서 힘겨루기를 하는 후지오는 근대의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출하고 자아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새로운 여성상이 출현한 것이다. 후지오는 자기 주도적이고 당당한 여성이다. 하지만 때는 1900년대 초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인식은 찬란한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독립적인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악녀성으로 드러난다.

 

소세키는 후지오의 죽음을 오만한 클레오파트라의 파국에 비유하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후지오의 자주적인 욕망은 허영이며 교만으로 배척받았던 것이다. 후지오는 소세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팜므 파탈이다. 앞서 소개했던 『산시로』에서 산시로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겨주는 미네코도 남자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당찬 여성상이지만 결국 오빠가 정해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 미네코보다 강한 후지오는 남성들이 짜 놓은 사회적 연결망 위에 설 자리가 없다. 그녀는 견고한 남성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악녀로 비난받고 거부된다.

 

후지오의 패착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진실하게 터놓을 수 없었던 데 있다. 남자에게 먼저 고백하지 못하는 그녀는 사랑을 하나의 소유로 여기고 경쟁에 몰두한다. 근대인은 교양과 체면으로 겉모습을 포장하고 본심을 속인다.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 생존경쟁에 유리한 사랑법이다. 소세키는 20세기의 대화법이 “바늘을 스펀지에 숨기고 상대에게 꽉 쥐게 한 후 상처가 나면 고약을 발라주며 달래주는” 방식이라고 꼬집는다. 사람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진심을 드러낼 수가 없다. 겉과 속이 다르면 내면이 찢기는 형벌을 감내해야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소통 불가능한 타자로 고립되고 말았다. 소세키가 후지오의 죽음으로 모든 갈등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가도 넘어설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4. 후지오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근대처럼 변화의 속도가 극심한 시대는 없다. 20세기 초 20억 정도였던 세계 인구는 한 세기만에 60억이 넘었다. 경제적 토대도 정치체제도 전혀 다른 사회로 변했다. 개인의 인권을 바탕으로 시민사회가 형성되었지만 제도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에는 간극이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라는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녀자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여성은 아동과 비슷한 보호대상으로 취급된다. 여성은 남성이 고백해주기를 기다리며 결혼의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결혼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다. 




세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에서 복종하지 않는 아내는 희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내를 제압하는 방법을 소개하거나 역으로 권위를 휘두를 줄 모르는 남편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통속적인 문학 작품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짧은 바지를 입은 아내와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남편은 영국과 북유럽 전역에서 희극적 소책자, 만담, 목판화 등에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입바른 소리를 한 여성들은 문학과 미술 작품 속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기까지 했다.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이호영 옮김, 책과 함께, 2012년, 185쪽)


권력으로 아내를 제압하는 남편,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가 만드는 가족 삼각형은 시대가 변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남성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은 여성은 추문이 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남녀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적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고, 자기 취향이 뚜렷한 여성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놀림감이 되었다. “당신은 아내이자 엄마야!”를 강요하는 남편에게 “나는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이야!”라고 선언하며 노라는 인형의 집을 나온다. 슬프게도 노라 앞에는 굶어죽거나 거리의 여인으로 타락하는 길 밖에는 경제적 자립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21세기가 된 지금은 달라졌을까?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여자가 사회에 나와 경제활동을 하면 남자가 벌어 온 돈으로 집에서 편안하게 먹고 살지 못 하는 ‘팔자 사나운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같은 경제활동을 해도 여자는 남자들의 임금의 절반에 미치는 대접을 받았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결혼정년제가 만연해있었다. 어디까지나 여자는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식솔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90년대 말 우리나라가 IMF 경제위기에 닥쳤을 때 여자부터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남자는 가장, 여자는 부양대상이라는 인식은 지금도 남아있다. 


정년을 보장을 받던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라는 신종 개념이 등장하면서 고용시장이 불안해지자 새삼 돈 잘 버는 여자가 각광을 받고 있다. 여자도 직업이 없으면 결혼시장에 이력서를 내밀지 못한다고 한다. 팔자 사나운 여자가 일등 신붓감으로 등장한 셈인가? 자존심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마음대로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고 결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는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를 보면서 능력 있다고 부러워하는 세태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요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대세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방점은 ‘예쁜’에 찍혀 있다. 미모는 기본이고 혹시 경제력이 출중한 여자라면 나이가 많아도 봐주겠다는 말이다. 소세키가 살던 시공간에서 100년을 건너온 지금 후지오가 살고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부양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고 싶지 않다고 ‘나 혼자 산다.’를 찍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을 원하는 여성들이 가부장적 질서 대신 선택한 ‘비혼(非婚)의 역습이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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