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행인』 참을 수 없는 예민함 무엇이 부부 사이의 신뢰를 회복시킬까?

『행인』 참을 수 없는 예민함

무엇이 부부 사이의 신뢰를 회복시킬까?



가족이라서 외로워


소세키의 소설 속 남자들에게 여자는 스쳐지나가는 행인처럼 낯선 존재이다. 아내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남자들은 동성인 친구나 스승과는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지만 여자와는 문제를 공유하지 못한다. 여자를 지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해서일까? 오히려 여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여자에게 불안을 느낀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지도 못한다. 내면에는 여자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출렁인다. 여자는 알 수 없기에 더 알고 싶은 목마름의 대상이다. 두려운 남자들이 선택하는 도피처는 침묵이다. 그들은 일상의 대화를 차단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반복한다. 그럴수록 여자는 점점 더 풀 수 없는 인생의 수수께끼가 된다. 『행인』은 그런 남녀가 한 집에 살면서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다룬 가족소설이다.




청년 지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결혼한 형 내외와 어린 조카딸, 미혼의 여동생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누가 봐도 3대가 단란하게 모여 있는 유복한 대가족이다. 이 가족에게는 소세키가 흔히 갈등의 실마리로 제시하는, 아버지가 일찍 죽거나, 숙부가 유산을 가로채거나, 어머니가 계모이거나 하는 특별한 요인이 없다. 그저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로와 형, 형수가 맺고 있는 애매한 삼각구도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처럼 위태롭다. 너무나 평범하고 멀쩡한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라 더욱 서늘하다. 


어느 날 이치로는 동생 지로에게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오가 너에게 반한 게 아닐까?” 형은 자기 아내가 시동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지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형은 결백을 입증해보라고 한다. 사람 속을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치로는 동생에게 형수와 함께 휴양지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라는 미션을 준다. 자기 아내가 시동생과 둘만 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형은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제안을 할 수는 없다. 지로는 싫다고 거절하지만 형은 “안 그러면 평생 너를 의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할 수 없이 지로는 형수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휴양지로 떠난다. 두 사람은 해지기 전에 돌아올 요량으로 길을 떠났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와카야마에 도착하자마자 하필 폭풍우가 몰아치고, 전신주가 넘어지고, 전차가 멈춘다. 형수와 시동생은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기가 끊어져서 사방은 어둡고, 암흑의 밤은 한없이 길다. 한 방에 누운 시동생과 형수의 마음속에 요동치는 진실을 누가 말해 줄 수 있으랴. 말해준들 믿을 수는 있고?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운 형의 핏발 선 눈은 탄식을 자아낸다. 자신이 설정한 상황에 포획되어 뒤척이는 인간의 내면은 처절하다. 부부라는 단어 위에 남겨진 상흔은 참혹하다. “아, 지겨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 것보다 지겹다니까. 다른 가정도 다 이렇게 불쾌한 걸까?” 지로는 한숨을 내쉰다. 가족의 진면목을 스케치하는 소세키의 펜촉은 철판을 긁어대는 소리를 낸다. 소세키는 부부 사이에, 형제 사이에 진실한 믿음과 소통이 가능한가를 깊이 파고 들어간다.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므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가족은 제각기 떨어져 있는 섬처럼 외롭다. 가족도 이럴진대 낯선 행인들로 가득 찬 사회에서 사람들끼리 감정을 나누고 공감하는 일은 얼마나 무망한 일인가.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소세키는 11년간 창작활동을 했는데 『행인』을 쓴 것은 하반기에 접어들 무렵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하면서 인기 작가가 된 소세키는 위궤양이 악화된다. 1910년 요양을 하러 간 그는 엄청난 피를 토하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른바 슈젠지(修善寺)의 대환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다음 해 딸이 급사하는 불행이 겹친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상처를 딛고 쓴 소설이 『행인』이다. 『행인』은 1912년 말부터 1913년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신경쇠약과 위궤양이 재발해서 몇 달씩 연재를 중단해야 했다. 글쓰기는 한 사람의 정신을 물질화하는 과정이어서 신체성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소세키의 작품이 어두운 분위기로 바뀐다. 소세키가 초기에 쓴 소설에는 재기발랄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신랄한 문명 비판에도 불구하고 해학과 여유가 묻어난다. 남녀관계는 갈등을 겪긴 하지만 어느 정도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향기가 풍긴다. 『행인』부터 사람의 내면 풍경은 진지하다 못해 염세적인 기색을 띤다. 감정적 교류에 실패한 남녀는 서로의 영혼을 잠식한다. 


『행인』에 나오는 대학교수 이치로는 타인을 불신하면서 타인의 마음을 얻고 싶어 고뇌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모순된 욕망은 이중적인 태도로 표출된다. 동료들은 하나 같이 그를 온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치로는 기분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심사가 꼬이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이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는다. 아내에게는 유독 차갑고 냉담하다. 남 앞에 나서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신사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치로는 “아내의 영혼, 여자의 정신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신경이 날카롭다. 



아내도 냉소적인 침묵으로 대항한다. 묵묵히 도리만 할 뿐 일절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남남보다 싸늘한 냉전부부이다. 시어머니는 “아무리 남편이 인정머리 없게 굴어도 여자가 남편 기분이 좋아지도록 해줘야지” 채근하며 여자 탓을 한다. 아내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자 이치로는 급기야 아내를 손찌검하기에 이른다.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아니 이미 중증일지도 모르는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외면과 내면이 불일치하는 걸까. 

 

“사람은 보통 세상에 대한 체면이라든가 도리 때문에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말이 많을 거야. 하지만 정신병에 걸리면 말이야, 마음이 무척 편해지는 게 아니겠어? (...) 일반적인 모든 책임은 그 여자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어질 거야.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뭐든지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겠지.(...) 아아, 여자는 미치광이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걸까?” (나쓰메 소세키, 『행인』,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8년, 118~119쪽) 


이치로는 차라리 정신병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치광이가 되면 도리나 의무, 체면을 무시하고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도 진심이 담긴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 같다. 타인을 의식하는 예민함이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고 간다. 이치로는 “인간 전체의 불안을 모아서 1분 1초에 응축시킨 사람”이다. 무엇을 하고 있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초조한 기분에 쫓긴다. 이치로는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참을 수 없이 예민한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은 일상이 좌불안석이다. 아내는 웃음을 잃고 부모는 큰 아들의 눈치만 살핀다. 식구들은 이치로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로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한다. 지로는 집을 나와 하숙을 하고 모르는 여자하고 선을 본다. 모두가 무언의 압박 속에 살아가는 인간군상이다. 



근대가 낳은 시대적 질병


그렇다면 이치로는 못 말리는 의처증 환자일까? 굳이 나서서 이치로를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의 예민함이 터무니없는 광기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가 아내를 의심하는 근거가 신경질적인 망상이 아니라 어떤 위기의 전조를 간파한 것이라면 진실은 달라진다. 나오는 평소 남편 앞에서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지만 시동생과는 스스럼없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눈다. 지로는 자기에게 살갑게 구는 형수에게 호감을 느낀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여관에 묵게 된 날, 지로의 심리를 보면 확실해 보인다. 목욕을 하고 방에 돌아온 지로는 형수가 어느새 엷은 화장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지로는 형수의 요염함에 흠칫 놀란다. 한편으론 야릇한 기쁨을 느낀다. “이 기쁨이 솟아나왔을 때, 나는 바람도 비도 해일도 어머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기쁨이 또 갑자기 두려움으로 변했다.” 


지로는 그 두려움이 자신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말 예고이며 불안의 징후라는 걸 안다. 형수는 남편에게 교태를 부리지 못하는 자신을 얼간이라고 자학하며 애처롭게 눈물을 흘린다. 지로는 형수의 뺨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는다. 만약 충동적 감정에 빠져들어 한 뼘만 더 다가갔다면 이치로의 불길한 의심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인간이란 얼마나 상황적인 존재인가. 어떤 유혹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어떤 행동에 빠져들지 제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소세키의 시선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잔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다. 소세키는 히스테릭한 감정에 시달리는 이치로를 너그럽게 감싼다. 자신도 신경쇠약의 고통을 치열하게 경험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시절에 신경쇠약에 걸렸다. 일본은 서양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사회경제 발전을 수십 년 안에 달성하려고 초조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서양인을 닮으려고 일본인에게 우유를 마시고, 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한다.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오네.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그치는 것을 허락해준 적이 없지. 도보에서 인력거, 인력거에서 마차, 마차에서 기차, 기차에서 자동차, 그리고 비행선, 비행기, 아무리 가도 쉬게 해주지 않네.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지. 정말 두렵네.” (『행인』, 364쪽) 


갑자기 남녀문제에서 사회문제로 튀는 경향이 있지만,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20세기의 질병으로 바라본다. 신경쇠약은 외부의 변화와 내면의 속도감이 어긋나는 데서 온다. 인간의 감정은 사회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초조하고 불안하다. 기계문명이 아무리 발전하고 부유해진들 마음이 안절부절 못한다면 행복하다고 할 수가 없다. 소세키에게 신경쇠약은 시대의 징후를 감지하는 자의 몫이다. 그는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지불해야 할 세금”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치로처럼 예민하고 선병질적인 지식인들은 전형적인 근대인의 초상이다.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세계를 인식한 자의 고통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광기를 다그쳐서 창작열로 향하게 했다. 


나의 신경쇠약과 광기는 목숨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것들이 계속된다면 수많은 『고양이』, 『양허집』, 그리고 수많은 『메추라기 새장』을 출판할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이 신경쇠약과 광기가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나쓰메 소세키, <문학론 서(序)>, 『문학예술론』, 황지헌 옮김, 소명출판, 2010년, 43쪽)


소세키는 자신의 신경쇠약을 소설 창작이라는 내면의 고백으로 해소했지만 이치로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낼 것인가. 이 부부는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치로를 보고 있노라면 왜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 ‘삽질’을 하고 있나 속이 답답해진다. 이쯤 되면 꼭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나 반감마저 든다. 남의 마음을 다 알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라고,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먼저 정직하게 표현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아내를 불신하고 경계하는 남자의 심리는 고전 중의 고전에 속하는 이야기다. 최초의 서양문학으로 전승되어온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봐도 알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10년이나 길게 끈 트로이전쟁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또 다시 10년을 바다 위에서 떠돈다. 귀향길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짬짬이 미녀 여신 칼륍소와 살림을 차리는 등 향락의 나날을 보내느라 세월을 지체했다. 헬레네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서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요부라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정절의 화신이다. 페넬로페는 열두 명이나 되는 뭇 사내들의 청혼을 물리치느라 밤새 베틀 앞에 앉아 옷감을 짜고 날이 새면 풀어버리기를 20년. 혼자 갓난아이를 키우며 청춘을 다 보냈다. 


드디어 오디세우스가 집에 돌아온 날, 두 사람의 재회는 얼마나 극적일까?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나눈다?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오디세우스는 더러운 거지 노인으로 변장하고 집에 온다. 아내는 그를 몰라본다. 그는 나그네인 척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아내의 마음을 떠본다. 그동안 아내의 애정이 식었는지 다른 사내에게 정절을 잃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오디세우스는 자기 정체를 밝힌다. 긴 세월을 기다려준 아내를 시험해보는 야비함이라니 기분이 씁쓸하기 짝이 없다. 


3천 년 전의 문학이 증언해주는 부부의 실상이 지금인들 다르랴. 소통불가로 인한 남녀상열지사는 식상할 정도로 넘쳐난다. 신문의 사회면에는 믿을 수 없이 잔혹한 부부싸움이 매일 올라온다. 휴대폰 추적에서 토막 살인까지 의심과 불신, 배신과 복수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걸 보면 결혼은 답이 없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시험의 연속이다. 약혼(engagement)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전쟁에서의 교전을 뜻한다. 결혼을 하면 ‘사랑과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평생 변치 않는 순정한 아내,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은 각자의 관념이 만들어낸 틀이다. 그 틀을 완성시켜줄 객관적 실체가 있기는 할까. 욕망이 만든 표상을 충족시켜 줄 대상이 있을 리가. 


세계는 내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어떤 것도 나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내 눈에 허접하게 보이는 남자도 누군가의 눈에는 근사한 황태자로 보인다.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다른 내가 된다. 상대의 마음을 잘 몰라서 애태운다면 그것도 나름 좋지 않은가. 어차피 남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다고 접어두는 게 상책이다. 날마다 상대가 궁금하다면 권태기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상대를 신뢰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든지, 타인을 불신하면서 불안에 뒤척이든지 선택적 태도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지만 그건 뭐 그때 가서 대처할 일이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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