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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소세키, 『마음』 - 자기 환멸의 덫 인간의 마음을 믿을 수 있는가

by 북드라망 2019. 5. 15.

소세키, 『마음』 - 자기 환멸의 덫

인간의 마음을 믿을 수 있는가



 1. 왜 자신에게 극단적인 폭력을 행할까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끼니를 걱정하던 세대와 비교하면 더할 나위 없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나와 가까운 지인 중에도 자살한 사람이 열 명 가량이나 된다. 나는 지금도 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쓰라린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십년 전의 일이다. 한 똑똑한 친구가 세계문화기행과 책을 연결시켜서 출판사를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독창적인 사업아이디어가 좋았다. 돈이 없던 그를 도와주기 위해 친구들 대여섯 명이 모여 주주 형식으로 자금을 모아주었다. 대표를 맡은 그는 성공적인 사업비전을 장담했고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신생출판사는 겨우 책 한권을 출시하자마자 자금난에 봉착했다. 운영자금이 돌지 않았다. 그는 돈을 빌리러 다녔다. 급작스럽게 그의 자살 소식이 당도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영안실에 모인 친구들은 탄식했다. “차라리 야반도주를 하지, 돈을 떼어먹을 배짱도 없었나.” 사업을 벌이지 않았으면 죽지도 않았을 텐데 공연히 돈을 투자했다고 우리는 자책했다. 빚 청산을 해 보니 그다지 큰 액수도 아니었다. 목숨 값이 너무 비루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장례식장에서 하혈을 시작했는데 하루 낮밤을 피가 샘솟듯 솟구쳤다.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날로 나는 화끈하게 폐경이 되고 말았다. 두려움이 동반된 충격의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했더니 애도장애라고 하면서 우울증 약을 처방해주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추측이 오갔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걸까?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건만 탁월한 재능과 능력을 가졌던 친구가 왜 그렇게 실패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걸까? 남들이 평가하는 나, 내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나, 관념이 만들어낸 자의식이 휘두르는 무서운 파괴력을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세상사 요지경을 겪을 만큼 겪었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소설을 즐겨 읽는지도 모르겠다. 작중 인물의 삶과 마음을 엿보면서 해답의 실마리를 건져내고 싶어서다. 문학은 삶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구체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보여준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읽다가 나는 전율했다. 그래, 이런 게 사람이지. 인간의 본질을 이보다 잔혹하게 발가벗겨서 묘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검은 빛이 내 미래를 관통하고 한순간에 내 앞에 놓인 전 생애를 무섭게 비    추었네. 그리고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지. 그래도 나는 끝내 나를 잃을 수 없었네. 나는 곧 책상 위     에 놓여 있는 편지를 보았지. 정신없이 봉투를 뜯었네. 하지만 안에는 내가 예상한 내용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더군. 나에게 얼마나 쓰라린 문구가 쓰여 있을까 하고 예상했거든. 그리고 만약 그것이     아주머님이나 아가씨의 눈에 띤다면 경멸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네. 나는 잠깐 훑어만 보고      우선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나쓰메 소세키, 『마음』,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년, 255쪽)


소설 『마음』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선생’이 친구의 죽음을 발견하는 광경이다. 선생은 한밤중에 잠이 깨어 옆방에서 자고 있던 친구 K가 자살한 것을 알게 된다. 보통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놀라서 비명을 지르거나, 의사를 부르러 뛰어 나가거나, 친구를 흔들며 정신 차리라고 외칠 것이다. 선생은 덜덜 떨면서 유서부터 읽는다. 유서에 자기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는지가 미칠 듯이 궁금하다. 선생은 친구가 죽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세간 사람들에게 경멸을 당할까봐 공포심을 느낀다. 유서에는 다행히 선생의 이름도 없었고 하숙집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제야 장지문에 흩뿌려진 핏자국이 선생의 눈에 들어온다. 경동맥을 끊은 친구의 목덜미에서 한꺼번에 뿜어져 나온 피다. 새벽을 기다리는 시간은 무섭도록 길다.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춘 듯하다.


나는 이 대목을 덜덜 떨면서 읽었다. 죽은 친구 옆에서 남몰래 유서를 읽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면 뒷골이 서늘해진다. 친구의 생명보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까 봐 더 두려운 게 사람이구나. 이토록 세상의 이목을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란 얼마나 허약한가 가슴이 먹먹했다. 『그 후』, 『문』, 『마음』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은 사랑과 질투, 우정과 배신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마음의 행로를 추적한다. 『마음』은 윤리적 갈등의 끝장을 보여준다. 『마음』은 소세키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로 일관된 소설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수많은 죽음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선생의 부모는 중학교 때 장티푸스로 죽고, 선생의 대학교 친구 K는 자살한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노기대장이 순사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의 아버지도 신장병이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해 있다. 선생마저 자살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늙고 병들어 죽는 자연사는 그렇다 쳐도 선생과 친구 K, 두 사람의 자살은 더 없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삶을 지속하려는 생명욕구가 인간의 본능인데 무엇이 자신을 향해 그렇게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만드는 걸까.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마음의 중력은 무엇일까.



2. 자의식의 굴레, 자기 환멸의 덫


K는 자신의 의지가 박약해서 희망이 없다고 유서에 썼다. 그의 자살을 보도하는 신문기자는 K가 부모 형제로부터 의절을 당해서 죽었다고 기사를 썼다. 선생은 자신의 잘못으로 친구가 죽었다고 죄책감을 가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팩트 체크’를 할 수가 없다. 남은 자들의 해석만 구구하다. 원래 K는 진종 스님의 아들이었다. K는 태생적으로 종교적 지향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는 어릴 때 상당한 재산가에게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양부가 바라는 대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고 종교와 철학에 심취한다. 그가 돈 잘 버는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자 양부에게도 버림받는다. 오갈 데 없는 K를 선생이 자기 하숙집에 와서 같이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K에게 가난은 문제가 아니었다. K는 “도를 위해서는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 절욕이나 금욕은 물론이고, 설령 욕망을 떠난 사랑도 도에는 방해가 된다.”(『마음』, 239쪽)는 신조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는 정신의 향상을 추구하면서 몸을 채찍질했던 수행자였다. 

 

그랬던 K가 하숙집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정신적 결벽주의자인 K는 정념에 빠진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고민하던 K는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선생에게 털어놓는다. 실은 선생도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자기도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다. 외려 선생은 정진하는 사람이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친구에게 면박을 준다. K는 자신의 정신적 천박함에 대해 고통스러워한다. 한편 선생은 갑자기 질투심을 느낀다. 아가씨와 친구 K가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경쟁적인 자의식으로 다급해진 선생은 친구를 따돌리고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청한다. 과부가 되어 혼자 딸을 키우던 아주머니로서는 로또 맞은 격이다. 물려받은 유산도 있고 대학을 다니는 도련님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시부모될 사람도 돌아가셨으니 데릴사위로 같이 살기에 딱 맞는 사윗감이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K에게 선생이 청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K는 그날 밤 자살을 한다. 

 

K는 실연 때문에 죽었을까? 아니면 친구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죽었을까? 나는 K가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숙집 아가씨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는 부차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K는 선생에게서 “정신적으로 향상심이 없는 자는 바보라네”라는 뼈아픈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죽음을 결심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라는 표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충돌했다. K는 자신이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약한 인간임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는 정념도 인간의 본성이며, 삶의 의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욕망하는 신체를 부정한 나머지 자기 환멸의 덫에 걸린 것이다. 자의식이 삶의 의지를 넘어설 때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K가 자살한 후 선생은 죽은 듯 살았다. 그는 K가 자기에게 배신당한 외로움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는 수치스러운 비밀을 간직하고 “미라처럼” 살아가게 된다. 살아도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아이도 낳지 않았다. 술에 취해 엉망진창이 되기도 하고 책도 안 읽고, 일도 안한다. 아무와도 교분을 나누지 않고 고독 속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한 달에 한 번씩 친구의 무덤을 찾아가 꽃을 바치는 참회가 그가 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선생은 자신이 비겁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아무리 지독한 죄책감이라도 흐릿해 질만큼 세월이 흘렀다. 감정이 괴로우면 몸이 힘 들어서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합리화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생은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선생은 적어도 자신만은 정신적으로 순수하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는 K의 죽음으로  자기불신과 환멸에 빠진다.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더 나쁜 놈이다. 그는 치명적인 자기 부정에 강타 당했다. 자신도 믿을 수 없는데 누구를 믿겠는가.  외부와 단절된 자기만의 방에는 희망이 없다. 선생도 역시 자의식의 굴레에 갇혀 죽음을 선택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힘, 코나투스(conatus)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4년, 168쪽)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자살은 자기의 본성과 반대되는 외적 원인들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사람이다. 자신의 생명력을 부정하는 자기 환멸은 생명력과 반대되는 죽음의 방향으로 치닫게 한다. 



3. 아무도 믿지 못하는 자의 고독


 

생각해보면 선생을 망친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선생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믿을 수 없었다. 죽은 부모가 남긴 재산을 숙부가 가로채 간 후 선생은 친척과 연을 끊고 고향을 떠났다. 피를 나눈 혈연도 양심을 저버리는데 낯선 타인은 오죽하랴. 그는 돈 앞에서는 군자라도 언제든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냉소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려는 걸로 보인다. 선생은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불신하게 되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도 자기 재산을 바라고 딸을 의도적으로 접근시키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선생은 아가씨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고백을 하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은 나머지 연애다운 연애도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자는 고독에 감금된다.

 

선생은 살아생전 단 한 사람이라도 믿고 싶었다. 그는 소설 속 화자인 ‘나’에게 “자네는 뼛속까지 진실한가?”를 묻는다. 선생은 화자를 믿고 숨겨왔던 과거를 고백하는 유서를 쓴다. “용기 없는 나는 지금 자네 앞에 과거를 이야기할 자유를 얻었다고 믿네.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생은 진실 앞에 선다. 죽기 전에 누군가를 믿게 되었으니 마음의 구원을 받았을까? 과거를 고백할 용기를 냈으니 자유로워졌을까? 아닐 것이다. 선생은 끝까지 위선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는 절대로 진실을 밝히지 말 것을 부탁한다. 죽어서도 아내의 기억 속에 순백의 인간으로 남고 싶다.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참으로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자신도 믿을 수 없고, 타인도 믿을 수 없고, 끝까지 진실해질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신은 진실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그 어떤 믿음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알량한 자의식을 버리지 못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얻기 바라다니 허망하기 그지없다. 죽음 앞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자의식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자의식에 의해 몸서리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예전에 사람들은 신과 연결되어 있었고 신을 전제로 하였으며 그 아래에서 일정한 질서로 형성된 세계   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가 되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개인은 자유롭게 방면되어 자유로운 의     사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위   해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자의식이 한없이 비대해져 간 것입니다. (강상중, 「살아야 하   는 이유」, 송태욱 옮김, 사계절, 2012년, 51쪽) 

 

근대의 인간은 인류역사상 가장 외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신이나 공동체와의 연결은 끊어졌다. 나는 왜 사는지, 나는 누구인지 홀로 묻고 홀로 답해야 한다. 자아의 섬세한 떨림 앞에 서있는 군중 속의 개인, 바로 우리의 초상이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자의식이다. 자유를 얻은 대신 자신의 의지를 다해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끊임없이 탐색하게 된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시하면서 자의식이 커져 간다. 실존적 공허감도 깊어만 간다. 

 



자의식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라는 의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규정하고, 또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인정욕망도, 죽을 것 같은 열등감도 다 자의식의 산물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 비대해진 자의식은 타자와의 관계를 불통으로 만든다. 비밀번호 잠금키에 지문인식 장치까지 마음의 빗장을 겹겹이 채운다.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된 문명화된 사회가 맹수 때문에 떨던 야만적인 시대보다 더 불안하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자문해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자신의 마음도 믿을 수가 없다. 요동치는 마음의 이면에는 나도 모르는 충동이 범람한다. 미움인가 하면 가엾은 마음이 스며들고, 이유 없는 짜증에는 두려움이 깔려있고, 분노의 열기 아래에는 애증이 뒤섞여있다. 선과 악의 대결구도가 명백하고 선이 반드시 악을 이기는 단순성이 전근대의 문법이라면 현대는 선악이 중첩되어 있는 인간 마음의 복잡성을 다룬다. 그런 면에서 소세키는 상당히 세련된 작가이다. 소세키는 드높은 도덕적 이상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인간은 자의식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는 존재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호의와 악의, 강함과 약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모순덩어리다. 그는 치사한 인간 내면의 어두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신체 안에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화해하기 어려운 다면성이 주름져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성사를 이끌어온 가장 오래된 화두는 인간의 마음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윤리를 위해 분투해왔다. 정녕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을 수는 없을까. 인간이 모순된 존재라는 것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사람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인간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자신부터 타인 앞에 진실하게 서야 한다. 허상적인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의식에 갇혀버리면 사회는 더욱 고독하게 분절되고 만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된다. 경쟁과 불신으로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는 사회일지라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태도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찾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글 _ 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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