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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소세키의 질문들] 『문』 과거로부터의 자유

by 북드라망 2019. 5. 1.

『문』 과거로부터의 자유

죄의식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과거에 붙들린 사람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걱정의 태반은 이미 지나간 일이거나 어쩌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안 해도 괜찮았을 잔걱정을 하느라 남부럽지 않게 잠이 토막 난 밤을 보냈다. 걱정도 팔자라고 저 멀리 남태평양에 태풍이 분다는 뉴스만 들어도 미리 지붕 위에 올라가 자기 집기와를 살필 사람이라는 핀잔을 들었으니 혈액형으로 치면 트리플 A형이 분명하다. 소심한 성격인 만큼 지난날에 대한 회한도 많다. 과거의 편린들이 시간을 거슬러와 현재의 생활기반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두려울 때도 있다. 




비단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기술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다가올 미래의 시간은 우연성이라는 괴력으로 우리를 희롱하고, 지나간 과거의 시간은 필연성이라는 사슬을 가지고 우리를 압박한다. 일분일초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붙들린다. 망각하지도 못하고 합리화하지도 못하는 과거가 현실의 발목을 잡는다. 여기, 시간의 굴레로 인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소심한 그를 보면 동질감을 넘어 마음이 짠해진다. 지금부터 과거에 갇힌 자의 고뇌의 문을 열어보자. 


『문』은 『그 후』의 후속작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그 후』가 친구의 여자에게 끌려 마음이 흔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문』은 사회적 규범을 거슬러 정념을 택했던 그들의 결혼생활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후속작 『마음』은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나 노년기의 소실점에 이르기까지 행로를 따라간다. 흔히 소세키의 삼부작으로 『산시로』, 『그 후』, 『문』을 꼽지만 스토리라인의 연결로 보면 『그 후』, 『문』, 『마음』을 삼부작으로 치는 게 맥락상 더 일관성이 있다. 세 작품은 공히 사랑 때문에 도의를 저버렸다는 비난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형벌을 내면화한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을 추적한다. 도덕과 규범의 선을 넘었던 그들 앞에 생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소스케와 오요네, 그들은 결혼한 지 육 년차 되는 금실 좋은 부부다. 한창 깨가 쏟아질 만한 신혼이건만 그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고 있다. 전차 종점에서 20분이나 걸어가야 하는 고지대 절벽 아래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세상 끝에 다다른 사람들 같다. 소스케는 대학을 중퇴하고 관청에서 일한다. 늘 피곤에 지쳐있는 그는 일요일에 늦잠 자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 그는 내년에 월급이 얼마나 오를까 기대하기보다는 감원을 할 거라는 소문에 걱정부터 앞서는 월급쟁이다. 치통으로 아파도 병원 치료비가 많이 나올까봐 염려스럽고 비가 오면 구두 밑창에 물이 스며든다. 살림형편이 스산하다. 


삼년 만에 소스케를 본 숙모는 놀라서 남편에게 속삭인다. “원래는 저렇게 활기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 너무 까불 정도로 활발했었는데 지금은 당신보다 더 영감 같아요.” 어쩌다 소스케는 급속하게 활기를 잃고 젊은이답지 않은 분위기로 변해 버린 것일까. 소스케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집을 숙부에게 팔아달라고 맡겼다.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숙부를 찾아가지 못한다. 돈을 달라고 할 용기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룬다. 동생의 교육을 책임져달라고 유산으로 받았던 목돈을 맡겼건만 숙모는 돈이 다 떨어졌다면서 이제부터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한다. 동생의 학업이 중단될 곤경에 처했는데도 소스케는 숙모를 찾아가서 집 판돈을 달래지 못한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는 왜 이렇게 위축된 태도를 보이는 걸까? 숙부는 “그런 일을 저지르고 폐적될 처지까지 간 녀석이니까 한 푼도 받을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소스케는 자기와 같은 ‘과거를 지닌 자’는 떳떳하게 돈을 요구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 그를 폭삭 늙게 만든 것은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차라리 소소한 걱정거리에 불과하다. 그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젊은 날 한때 치정멜로의 주인공이 되었던 과거가 그의 비밀스러운 아픔이다. 그는 과거 때문에 앞으로도 좋은 날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고 자조한다. 그는 과거에 붙들린 사람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어두운 과거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어간다. 예기치 못한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과거를 개인이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까? 잘못이 있든 없든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작가는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하고 내면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자책감과 죄의식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마음의 형벌을 벗어나서 자기 구원에 이르는 문이 있을까? 있다면 그 문은 어떻게 열리는가. 



죄의식,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


친구의 동거녀를 사랑한 죄, 이것이 소스케가 미래를 저당 잡힌 이유다. 그는 대학시절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오요네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친구와 비밀리에 동거하고 있었다. 오요네는 그림자처럼 조용한 여자였다. 그녀는 젊은 여자에게 있을 법한 애교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소스케는 그녀의 차분함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혹의 눈길을 보내지도 않고 흔들림 없이 차분한 여자는 어떻게 소스케와 격정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불과 몇 쪽으로 짤막하게 압축되어 있다. 친구가 열쇠를 맡기러 잠시 옆집에 간 사이에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아주 짧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소스케는 아주 짧았던 그때의 대화를 일일이 떠올릴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고 해도 좋   을만큼 담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     새빨갛게 뒤덮었는지를 신기하게 여겼다. (...) 그 담백한 대화가 자신들의 역사를 얼마나 짙게 채색했는   지 가슴속으로 철저하게 음미하면서 평범한 사건을 중대하게 변화시키는 운명의 힘을 두려워했다.

 ( 『문』,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7, 184쪽)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두 남녀가 우연히 마주쳐서 불꽃이 튀는 장면에는 윤리나 돈이나 가족이나 사회적 체면에 대한 고민조차 끼어 들 여지가 없었다. 그저 불가사의한 운명의 힘에 의해 그들은 떠밀려 쓰러졌고 모래투성이가 된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도덕적 죄를 물었고, 그들은 불길과 같은 낙인을 온 몸으로 받았다. 부모를 버리고, 친척을 버리고, 친구도 버렸다. 부부는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도쿄에 정착해서 과거를 숨기고 산다. 사람들과의 교류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서로만 바라보며 산다. 




그토록 고적하고 쓸쓸한 결혼생활이라니. 그들 부부가 사회에서 고립된 채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나쓰메 소세키는 절묘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커다란 수반의 표면에 떨어진 단 두 방울의 기름 같았다. 물에 튕겨진 힘으로 동그랗게 바싹 달라붙은 결과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문』, 169쪽) 사회로부터 소외된 두 사람을 보면 측은할 정도로 딱하다.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고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죄인들 같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독은 사회가 내린 형벌일까. 스스로 죄의식이라는 형벌을 내리고 자신을 평생 무기징역에 가두는 것일까.  


관습이 억누르는 협소함과 규칙성 속에 처박혀 스스로를 학대했던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 자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류가 오늘날까지 치유하기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도 무시무시한 병, 즉 인간   의 인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이라는 병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9년, 432쪽)


니체에 따르면 죄(schuld)라는 개념은 부채(schulden)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죄를 지었으면, 죄값을 치루면 끝난다. 신체형이든 벌금형이든 부채를 갚는 걸로 청산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적인 형벌을 넘어서 자기의 죄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것으로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양심의 가책이다.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 인간은 스스로를 학대한다.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규칙에 따라 자신을 재단하고 노예상태로 만든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통 받고 질병을 앓고 있는 자이다. 양심과 죄의식은 병든 자아를 악화시킨다. 죄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진 객관적인 형벌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지도 못하고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도 없다. 양심의 가책으로 무기력해진 나머지 자신을 연민하거나 저주하거나 괴롭힌다. 



자신의 힘으로 문을 열어라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파괴하는지 오요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요네는 세 번이나 아이를 잃었다. 첫째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을 때 생겼다가 임신 오 개월 만에 유산되었다. 둘째 아이는 달을 채우지 못한 채 태어나서 일주일 만에 죽었다. 셋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탯줄에 감겨 질식해서 죽는다. 유산, 조산, 사산의 불행을 거듭 당하자 오요네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간다. 점쟁이는 오요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당신은 남한테 몹쓸 짓을 한 적이 있어.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아기는 절대 못 키워.” 오요네는 영원히 아이를 못 낳는다는 점쟁이의 저주를 믿는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워 남편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고 남몰래 운다. 


사실 옛 남자를 배신한 일과 아이의 죽음은 아무 관련이 없는 사건이다. 이것을 죄와 저주라는 인과관계로 엮어서 자신의 운명을 구성하는 오요네를 보면 슬프도록 처절하다. 과거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은 실제 사건의 인과관계를 왜곡시킨다. 오요네만 이럴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이 없을까? 인간은 기억과 망상으로 과거의 삶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한다. 자아라는 견고한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빚어내는 과거가 현재의 자신을 잠식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원망이든 질투든 분노든 자신을 해치는 감정의 늪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죄의식, 혹은 양심의 가책이다. 과거를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상처를 치유할 수가 없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16년, 292쪽) 니체의 말처럼 과거를 극복할 수 없으면 현재에 단단히 발 딛고 살 수 없다. 자신을 규정하고 사유하는 방식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행복한 삶도 건강한 삶도 불가능하다. 


소설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던 소스케 부부에게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왔다. 낙천적이고 활기찬 집주인과 친분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집주인이 그를 집에서 같이 식사하자고 초대한다. 드디어 소스케가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집주인에게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옛날에 오요네와 동거하던 그 친구도 식사자리에 올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집주인은 소스케와 그 친구와의 관계를 모르고 초청한 것이다. 소스케는 질겁하고 불안에 빠진다. 하마터면 옛 친구와 마주칠 뻔했다. 과거의 통한이 되살아난다. 


소스케는 우연이 하필 자기같이 약한 사람의 다리를 걸고 넘어뜨리는 것에 화가 난다. 세월이 약이라고 믿었는데, 우연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 6년 동안 한 번도 결근계를 내 본 적이 없던 그가 회사에 휴가원을 낸다. 아무 종교도 믿지 않지만 급하니까 절에 가서 마음의 평화를 구한다. 그는 굴속으로 들어가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수행을 하지만 머릿속에는 ‘우물쭈물 하지 말고 빨리 이사를 가는 게 상책이 아닐까’ 도망칠 궁리만 떠오른다. 종교는 그를 마음의 불안에서 구원해주지 못한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   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문』, 252~253쪽) 


소스케는 식사 초대를 피함으로써 겨우 친구와 마주치는 위기를 모면한다. 요행히 위기가 지나갔을 뿐 앞으로도 계속 불안이 되풀이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꽃이 피고 봄이 왔지만 어김없이 겨울이 돌아올 것을 안다.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는 실패다. 이 책을 함께 읽고 토론했던 학인들은 탄식하며 안타까워했다. “차라리 한 대 맞지.” 우연히 친구와 마주쳤다면, 그래서 한 대 얻어터졌다면 속이라도 후련했을 것이다. 이미 엎지른 물, 친구에게 욕을 먹고 잘못을 사죄한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죄책감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와 마주칠까봐 외면하고 도망친들 어딜 가겠는가. 이미 절벽 끝까지 왔는데. 


혼자 열고 들어가야 하는 구원의 문. 하지만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는 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살다보면 우연이 어디에 잠복되어 있다가 닥쳐올지 알 수 없다. 우연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때마다 온 몸으로 직면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가 가진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구차한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를 하라는 게 아니다. 죄의식에 빠져서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밤새도록 우두커니 문 앞에 서있는 일이다. 자신의 과실을 정정당당하게 인정하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존재의 문은 혼자 힘으로 열어야 한다. 




삶은 예측불가하고, 고통은 다시 다가오겠지만, 긍정의 태도만이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힘이 긍정이다. 비록 어떤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지라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힘 말이다.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고 가는 자만이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의지를 능동적으로 발휘하는 힘일 것이다. 그 힘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아무리 철통같은 문일지라도 조금이나마 밀칠 수 있지 않겠는가. 안 열리면 문을 깨부술 수도 있고.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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