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소세키의 질문들] 『그 후』, 노동은 인간의 의무일까?

노동은 인간의 의무일까?



돈을 벌지 않는 것은 죄악인가


소설 『그 후』(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2017년, 현암사)의 배경은 1900년대 초의 도쿄다. 이제 막 도입된 근대 자본주의가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도시의 풍경을 바꾸어놓고 있었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도쿄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그는 지금처럼 대학이 흔하지 않던 개화기에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다. 얼마든지 원하는 직업을 얻어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췄다. 다이스케는 몸도 건강하고 자기 용모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멋쟁이다. 승승장구하는 사업가 아버지와 형님을 두었으니 집안도 빵빵하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촉망받는 신세대 청년이다. 




문제는 다이스케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종일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예술에 탐닉하며 소일한다. 고상한 취미를 누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고급 룸펜이다. 생활비는 매달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서 해결한다. 그는 30세가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취직도 안 하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 요즘 ‘삼포세대’라고 불리는 한국사회의 청년들과 흡사한 모습이다. 차이가 있다면 결혼도, 취업도, 연애도 못하는 불우한 백수가 아니라 자발적인 백수다. 그는 취직할 생각이 없다. 취직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한량처럼 놀고먹는 아들을 꾸짖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도 생각해야 한다. 국가도 있다. 조금이라도 다른 존   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은 법이다. 너 역시 그렇게 빈둥대며 놀고 있다는 사   실이 편치 않을 테지. 교육도 받지 못한 아랫것들이라면 몰라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놀고 먹으   면서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배운 것은 실제로 써먹어야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 나쓰메 소세키, 『그 후』, 노재명 옮김, 2017년, 현암사, 47쪽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의 흐름을 타고 운 좋게 사업으로 돈을 번 신흥부르주아이다. 아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집안에 먹고 살만큼 돈이 많다. 그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모름지기 청년이라면 성실성과 열정을 가져야 하고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국가를 생각해서 일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노동을 해야 하는 명분이 매우 원대하다. 그 저변에는 노동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라는 가치관이 깔려있다. 


우리도 익히 듣던 말이다. 나 역시 놀고먹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산업화 세대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놀면서 부모에게 용돈을 얻어 쓰면 밥값을 못하는 식충이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국가에 이바지할 때”라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자랐고 나라의 일꾼이 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도 했지만 나는 노동을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로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에도 노동은 국민의 4대 의무 안에 속한다. 생각해보면 노동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라는 사실이 어리둥절하지 않은가. 최근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노동(work)과 삶(life)의 균형(balance)을 추구해야 한다는 신세대 용어다. 이 말은 곧 노동은 삶과 등식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삶과 대립각에 있는 노동이 어쩌다 모든 인간의 의무가 된 것일까? 노동하는 삶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생각은 정당한가.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인간에게 노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노동은 과연 근대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삶의 방편일까? 



떳떳한 백수의 논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해내는 사람만이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만들어낼 때만 굴러가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와 노동과 자본주의는 삼종세트로 구성되어서 돌아간다. 따라서 노동은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가 된다. 더 많이 이익을 증식시키는 사람만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재빨리 근대사회의 시류를 파악하고 잘 적응한 인물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다이스케의 논리는 무엇일까? 그에게는 나름 뚜렷한 명분이 있다. 생존을 위한 노동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만 일을 한다면, 그런 삶을 가치 있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 가슴이 뭉클해진 경험이 있는 샐러리맨이라면 이 말에 쉽게 공감할 것이다. 더 많은 연봉과 승진을 바라보며 일하면서 가치 있는 노동에 복무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퇴근 후 자신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나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지낼 여유도 없이 일상을 돈벌이에 바쳐야 한다면 노동을 신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이스케는 생존에 지장이 없는데 굳이 자기까지 나서서 돈을 벌어야 하냐고 반론을 펼친다. 돈을 많이 벌수록 좋다는 통념이 무색해진다. 그즈음 일본제당이 국회의원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준 사건이 신문에 폭로된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사회다. 그의 아버지의 사업도 그 연결고리 안에 얽혀있는 것 같은 구린 냄새를 풍긴다. 다이스케는 취직을 하지 않음으로써 맹목적으로 돈을 버는 이전투구에 대해 소극적인 반항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당장 부족한 게 없는데 뭣 하러 그런 무의미한 경험을 하겠나? 빵과 물을 떠나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는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다.”(34쪽)면서 취직을 하느니 정신적으로 고귀한 활동을 즐기겠다고 한다. 다이스케는 자면서도 동백꽃 한 송이가 다다미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하거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밤, 벚꽃놀이를 하면서 예술적 감각을 음미하는 일이 돈벌이로 연명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그가 내세우는 백수의 논리가 곱게 자란 도련님의 배부른 궤변으로 들리는가. 자본주의적 가치기준으로 보면 그는 비정상의 범주로 분류되는 문제적 인물이 맞다. 부모에게 기생하면서 놀고먹는 룸펜은 사회적으로 불편한 존재이다. 국민소득 얼마, GDP 얼마라는 수치로 국가의 지위와 행복지수를 평가하는 시대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산업기술의 발전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먼저 돈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했다. 돈을 버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등장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든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식의 윤리는 낡은 유물이 되었다. 돈은 과시용 부가 아니라 가치증식을 위해 투자해야하는 자본이 되었다. 돈을 번 신흥세력들이 부르주아계급을 형성하고 나머지는 노동자계급으로 재편되면서 견고했던 전근대의 신분제도가 해체된다. 푸코가 대감호의 시대라고 불렀던 17~8세기가 되면 노동을 하지 않는 부랑자는 미친 사람과 동격으로 취급되어 감호소에 감금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여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로 환산되는 노동을 인간을 평가하는 절대가치로 등극시킨다.

 

친구들도 다이스케의 무기력한 게으름을 질책한다. 그가 금수저 아버지를 둔 덕분에 편안하게 사는 것을 질시하고 증오하는 기색마저 보인다. 다이스케는 자신이 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왜 일하지 않느냐고?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세상 탓이지.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일본과 서양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일하지 않는 거네.” (『그 후』 104쪽) 


도쿄가 볼품없이 팽창하자 그 틈을 노려 돈도 별로 없는 자본가가 얼마 되지 않는 원금을 투자해서 2할에서 3할의 높은 이자를 받아낼 속셈으로 조밀하게 지은 생존경쟁의 기념물이라고나 할까. 오늘날의 도쿄, 특히 변두리 지역에는 가는 곳마다 그런 집들이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장마철의 벼룩처럼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다이스케는 과거 그런 현상을 ‘패망으로 나아가는 발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작금의 일본을 가장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 같은 책, 96쪽


경제성장을 몰아붙이던 일본 도쿄의 그늘진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6,70년대 산업화가 한창일 때 대도시에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날림으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게딱지처럼 모여 있었던 산동네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다이스케는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서 산업개발을 추구하는 일본을 비판한다. 일본은 선진국을 뒤따라 잡으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가고 있다. 마치 소와 경쟁하다가 곧 배가 터져버릴 것 같은 개구리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혹사를 당하고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으로 피로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이스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무비판적으로 서양을 답습하려는 일본의 전력질주에 우려를 표명한다.


현대 일본의 개화는 무엇이 다른가. 외발적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개화는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자    연스럽지만 메이지 유신 후 외국과 교섭한 이후의 일본의 개화는 다르다. 지금까지 내발적으로 전개되    던 것이 갑자기 자기본위의 능력을 잃고 외부의 힘에 눌리고 눌려서 좋든 싫든 간에 그대로 하지 않으    면 일어설 수 없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김정훈 역, 책세상, 97쪽


이것이 소세키가 줄곧 자기 본위의 속도로 살아가는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사회의 내재적인 발전조건과 성숙도에 맞춰 중심을 지탱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속도에 휩쓸려가다가 피폐해진다. 다이스케의 노동관에는 획일화된 국가주의에 대항하는 소신이 있다. 그는 직업에 의해 타락하지 않기 위해 임금노동자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과 돈의 함수관계


다이스케가 아버지와 불화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결혼이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아들이 취직할 것 같지 않자 혼사를 서두른다. 재산을 안전하게 불리기 위해서는 유력한 가문과 결혼시키는 게 최고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부잣집 규수와 아들의 혼담을 주선한다. 여러모로 보아 아들 자체가 최고급 상품이다. 다이스케는 노골적인 정략결혼에 팔려가고 싶지 않다. 그는 번번이 신붓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는다. 돈과 결혼, 그로 인한 가족과의 불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한 복제되는 상투적인 갈등이다. 

 

소세키 소설의 기본구조는 남녀의 애정관계를 뼈대로 하고 있다. 그 뼈대에 살을 입혀주는 것은 돈이다. 소세키의 소설에는 반드시 돈에 얽히는 사건이 나온다.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얻어 쓰거나, 돈을 떼이는 사건이 전개된다. 돈에 의해 인물 캐릭터가 설정되고 인간관계도 얽힌다. 돈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가족관계도, 친구관계도, 연인관계도 달라진다. 이토록 돈과 사랑의 함수관계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작가가 있을까? 돈과 사랑이 부딪치는 격랑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고르라면 서슴없이 『그 후』를 추천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스케에게 일생일대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닥친다. 대학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그를 찾아온다. 친구는 졸업 후 결혼을 했고, 은행에 취직해서 교토지점으로 이사를 갔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는 망했다. 실직을 했고, 아이는 낳자마자 죽었고 아내도 병들었다. 친구는 다이스케에게 돈을 빌려 달라며 취직 부탁을 한다. 사실 친구의 부인 미치요는 대학시절에 다이스케가 좋아하던 여자였다. 그 때 다이스케는 속으로 연모하던 여자를 친구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다이스케는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도록 적극 도와주기까지 했다. 우정과 의리라는 도의적 명분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 속마음을 감추었던 것이다. 어줍지 않은 이타주의 때문에 다이스케는 사랑을 잃었다. 

 

내가 소세키의 여러 소설들에서 발견한 공통점은 주연이든 조연이든 애정의 삼각관계에 얽혀서 지지고 볶는다는 점이다. 남녀상열지사라는 통속적 소재만으로도 재미있기 마련인데 삼각관계에 치정멜로라니 흥미진진하다. 옛 친구의 아내가 된 여자와의 재회가 스토리를 촉발시킨다. 사건의 발단은 돈이다. 친구 부부에게 돈이 있었다면 다이스케와 다시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치요가 다이스케의 집에 돈을 빌리러 온다. 두 남녀의 재회 장면은 매우 탐미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흰 백합 세 송이를 들고 온다. 옛날에 다이스케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백합꽃을 들고 갔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암시다. 치명적인 백합꽃 향기가 흩날린다. 급히 걸어 온 그녀는 숨을 헐떡인다. 물을 가지러 간 사이를 못 참고 그녀는 은방울꽃이 꽂혀 있던 수반의 물을 마신다. 그가 놀라서 꽃병 물을 마시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녀는 “괜찮아요. 향기도 난 걸요.”하고 대답한다. 창백했던 그녀의 뺨에 화색이 돈다. “다이스케는 오랜만에 자신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168쪽) 

 

곤경에 처해 있는 여자의 가녀린 모습이 그를 자극한다. 다이스케가 보기에 남편인 친구는 미치요를 사랑하지도 않고 가정에 충실하지도 않다. 다이스케는 그녀를 갖고 싶은 열정에 휩싸인다. 미적지근했던 삼각관계는 뜨거운 기운으로 치닫는다. 그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자연의 아이가 될 것인가,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여기서 재미있는 논리가 전개된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곧 하늘이다. 하늘의 뜻은 사사로운 정념과 격정을 잘 다스려서 도덕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욕망을 제어해서 천리와 인간의 본성을 일치시키는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이 유교사회의 엄격한 도덕률이다. 하지만 다이스케가 생각하는 자연의 아이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것이고, 의지의 인간은 이성으로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려면 자연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정념을 인정해야 한다. 에도시대에 일본에 유행했던 양명학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듯하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진실한 자기윤리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근대인의 인식의 틀이 달라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이스케는 친구를 이혼시키고 미치요와 결혼하고 싶다. 열정의 대가로는 도덕과 규범이 처벌하는 칼날 위에 올라서야 한다. 그 칼날은 친구의 부인을 가로챈 배신자, 불륜남이라는 낙인을 영혼 깊숙이 새길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와 절연하게 될 테고 매달 받아오던 생활비를 포기해야 한다. 평소 주장했던 떳떳한 백수의 지론도 버려야한다. 만일 이성으로 정념을 억제하고 아버지가 권하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면 돈 걱정 없이 편안한 백수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단 애정 없는 결혼을 감수해야 한다. 돈도 사랑도 다 거머쥘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이 소설은 욕망과 규범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찢겨지는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드러내 보인다. 욕망에 충실한 자기 본위의 삶은 죄의식과 충돌하고, 도덕에 따르는 타인 본위의 삶은 공허하다. 다이스케는 결심한다. 그래, 하늘의 뜻을 따르자. 패륜아라도 좋다.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버려도 좋다. 그는 도의니 가족이니 하는 모든 명분을 벗어던진다. 자기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개인주의를 선택한 후 다이스케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불꽃이 튀는 삶의 에너지


아들이 친구의 부인과 사단이 났다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분노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하라는 취직은 안 하고 유부녀와 놀아나다니 그 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할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다이스케는 사랑을 선택한 순간 빵과의 싸움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백수는 끝났다. 그는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리상태가 되어” 거리를 나선다. 새하얀 백합꽃과 창백한 그녀의 뺨으로 상징되던 세상은 활기찬 생명력으로 점화된다. 빨간 우체통, 빨간 양산, 빨간 풍선, 빨간 간판, 빨간 전차... 세상은 빨갛게 타오른다.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다이스케가 노동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온갖 고난을 물리치고 쟁취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보다는 노동을 둘러싼 화폐관계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고급 백수를 자청하는 그에게는 누가 뭐래도  자기 신념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자존심이랄까 시대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대립의식이 느껴진다.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대개 내면의 자의식과 싸우느라 답답한 캐릭터인데 반해 다이스케는 보기 드물게 자기 의지대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책만 읽던 다이스케가 인력거를 끌겠는가 밑천이 있어서 장사를 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노동은 자율적인 선택이다.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하는 노동과는 다르다. 다이스케가 노동자로 바뀐 것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만남에 의해 자기도 예상치 못했던 다른 모습이 발현된다. 소설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가 불꽃이 튀는 에너지로 자기 본위를 잃지 않고 노동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다소 낭만적인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자본주의가 노동을 소외시키고 인간 정신을 타락시킨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징은 분업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해 생산 공정이 극도로 분절되고 파편화되었다. 전체적 과정을 기획하고 책임지는 장인정신은 사라지고 개인은 각자 한정된 노동영역으로 고립된다. 인간은 하나의 부품처럼 소모되면서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쇠약해진다. 소세키는 ‘영혼이 없는 노동’으로 전락시키는 사회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나는 정규직으로 30년 넘게 일했다. 천국이 있다면 월요병이 없는 세상일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왜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면서도 보람을 느끼거나 자아실현을 했다고 자부하기가 어려웠을까. 소세키의 말대로 나는 노동의 소외현상을 겪은 건지도 모른다. 그나마 내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소속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가치를 재확인할 때 노동이 의미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본성에 맞는 노동을 자율적으로 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망에서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다면 작히 좋으랴. 

 



4차 혁명으로 인해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직업의 절반이 사라진다고 한다. 어떤 직업이 새로 생길지 상상하기 어려우니 지금의 일자리를 잃을 거라는 걱정만 늘어난다. 빅데이터와 블록체인기술, 인공지능 등으로 인해 경제적 지반이 바뀌면 노동의 양태도 변하고 삶의 질도 달라질 것이다. 종전에 가지고 있던 노동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이 삶의 전부가 아닌 다른 상상력으로 내용을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아무튼 욕망과 도덕이 충돌할 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울림에 귀 기울였던 남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의 이야기는 소설 『문』과 『마음』으로 이어진다. 세 권의 소설은 주인공의 이름과 상황 설정은 약간씩 다르지만 비슷한 정념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연속적인 동일선상에 있다. 그녀를 선택한 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글 _ 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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