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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다른 아빠] 그런 ‘아빠’에 대한 욕심

by 북드라망 2019. 4. 26.

그런 ‘아빠’에 대한 욕심



분노의 오뎅볶음


열심히 교사생활을 하던 아내는 둘째 딸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육아휴직을 했다. 아내의 휴직으로 인해 아이들의 하교 후 생활은 달라졌다. 1학년 때부터 ‘돌봄교실’과 학원을 전전하던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하교 후부터 엄마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엔 저녁을 먹고 나야 공부나 숙제할 짬이 생겼지만, 요즘엔 아이들과 놀다 와도 저녁 먹기까지 2~3시간이 남았다. 엄마가 집에 있으니 둘째는 물론이고 첫째의 일상도 안정돼 보였다. 

  

그런데 달라진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나의 육아휴직도 그랬지만, 아내도 육아와 살림하기 위해 쉬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있는 아내를 보고 내가 달리지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냉동실을 정리하다 유통기한이 염려되는 오뎅 두 봉지를 꺼냈다. 출근길에 아내에게 오뎅볶음을 부탁했다. 그런데 퇴근 후 와보니 오뎅볶음은 해 놓지도 않고, 봉지 그대로 냉장고에 다시 모셔져 있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 그날따라 아내는 외출을 했고 저녁 당번이었던 내가 결국 봉지를 뜯어서 오뎅볶음을 해 먹었다. 또 한 번은 배출날짜가 지났는데도 싱크대 옆에 모셔져 있는 쓰레기봉투를 보고 욱했다. 그때 아내 앞에서는 둘러댔지만, ‘집에서 뭐하는 거냐’는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내가 육아휴직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방과후학교에 등하원이나 하거나 아이들의 저녁식사를 챙겼다. 서로가 바쁘니 일정 조정하고 시간되는 사람이 저녁당번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아내에 비해 비교적 일정이 자유로운 회사생활을 하는 나에겐, 가끔 저녁에 생기는 문탁일정 외에는,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다. 요즘은 평일에도 엄마가 저녁밥상은 물론 수학이나 영어, 한글공부까지 챙겨준다. 비교적 내가 일찍 들어온 날에도 아이들은 엄마를 먼저 찾는다. 예전에는 수학은 아빠, 영어는 엄마였는데. 

  

그러다가 일주일에 두어 번 아내가 저녁에 외출하게 되면 예전처럼 저녁먹이고 아이들의 숙제나 공부를 봐주게 되었다. 그런데 종종 그건 엄마랑 이미 한 거라던가, 엄마는 그렇게 안 가르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생겼다. 엄마는 밥 먹을 때나 공부할 때도 부드럽게 말하는 데 아빠는 너무 탁탁 말한단다. 내가 무슨 마동탁, 독고탁도 아니고 가래가 낀 것도 아닌데 탁탁거린다니. 그리고 엄마는 집에 있고 아빠는 밖에서 일하다 온 거라는 변명이 또 올라왔다가 들어갔다. 

  

회사일이 그렇게 바빠진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저녁을 처음 먹이는 것도 아닌데, 맞벌이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아들과 딸, 전업주부인 엄마, 그리고 회사 다니는 아빠’라는 구성은 좀 올드하지만,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4인가족의 표준모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집안 일하는 엄마와 회사 다니는 아빠로서의 조건이 갖춰졌건만, 정작 오뎅볶음과 쓰레기봉투에 욱하는 걸 보며 오히려 나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엄마와 아빠 사이

  

그동안 육아휴직하면서 나름 아빠의 역할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일하느라 얼굴도 못 보는 아빠가 아니라 아이들과 잘 노는 아빠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저녁에 엄마 없을 때면 더 심심해서 그러는 건지, 아님 내가 탁탁거려서인지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고 떼 부리는 눈치일 때가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지났으니 지금의 아이들도 육아휴직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상황에 따라 아이들과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는 건데,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여전히 자상하고, 부드럽고, 아이들과 잘 놀고, 아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나보다. 어쩌면 육아휴직 때도 그런 ‘아빠’가 되고자 했던 나의 욕심으로 첫째를 바라본 적은 없었을까?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 전, 여러 벌의 옷을 입혀보며 고르는 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부모의 욕심인지도 모른다. 까꿍놀이로도 아이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데도 그런 ‘아빠’이고 싶은 욕심에 좀 더 다른 재미를 위한 놀이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어서 아빠가 보기에 재밌을 거 같은 놀이를 아이도 꼭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촬영을 위해 아이에게 일부러 티슈를 던져준 피디와 비슷했구나. 결국 사단이 난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땅콩을 프라이팬에 볶고 있었다. 이제 돌 지난 첫째가 먹을 건 아니고, 입이 심심한 내가 먹고 싶었다. 껍질이 살짝 타는 소리, 톡톡 땅콩이 튀어 오르는 모습을 아이도 재밌어할 것 같았다. 와, 이것 좀 볼래? 가스레인지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아빠 발밑에 매달려있는 첫째를 앉혔다. 등받이를 잡고 일어선 첫째가 궁금해서 프라이팬 쪽으로 몸을 내미는 순간 의자도 가스레인지 쪽으로 기울었다. 불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첫째의 손등이 닿았고 화상을 입었다. 곧바로 아파트 단지 내 가정의학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오른 손등의 흉터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때 좀 더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갈 걸, 동네병원의 의사가 아직도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의사의 문제였을까. 그걸 볼 때마다 저건 내 욕심이 만든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위한 놀이가 아니라, 좀 더 다른 재미를 위해 위험한데도 아이에게 보여주려 했던 아빠의 욕심이 만든 사고였다. 

  

‘하류지향’으로 유명한 우치다 타츠루는 이혼 후 딸아이를 혼자 키웠다. 보기에는 ‘부자 가정’이지만 진실은 ‘모자 가정’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이를 키울 때는 누구든 ‘엄마’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의 생리적인 요구를 들어주고 아이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엄마’의 일을 해야 한다. 

  

돌이켜보니 돌 지난 첫째와 잘 놀아주는 아빠도 좋지만, 일상적인 ‘엄마’역할에 좀 더 충실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이건 실질적으로 아이의 기저귀를 몇 번 갈아줬느냐와 상관없이 ‘아빠’로서의 태도문제다. 그러게 땡볕에 아이를 캐리어에 둘러매고 뭣 하러 남한산성까지 갔다 왔단 말인가. 첫째는 남한산성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정말 기억은 할까?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겐 엄마와 아빠의 구별을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에게 밥을 먹여줄, 학용품을 사주고 학교나 학원에 데려다 줄, 병원에 데려다 줄, 잘 한 일이나 잘못한 일에 대해 이야기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게 엄마든 아빠든 말이다.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영화 ‘플라워링 하트’와 ‘레이디버그’에서 누가 더 예쁜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첫째는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며 근육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묻는다. 그게 엄마든 아빠든 말이다. 

  

얼마 전 저녁 당번인 날 탁탁거리며 일찍 양치질을 시키고 재우려고 셋이 자리에 누웠다.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집에 있으니 좋으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그러면서 아빠도 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아, 그래? 뭐가 달라졌는데? 라고 물으니 계란볶음밥이란다. 뭐? 전에는 아빠가 이런 저런 요리실험을 했는데 요즘은 아니란다. 특히 예전에는 아빠표 계란볶음밥을 종종 맛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냉장고에 있는 반찬만 꺼내 먹는단다. 저녁 먹고 산책하는 시간도 줄었고, 강아지 ‘랑이’와 ‘유키’의 물밥도 잘 안 챙겨주는 것도 좀 달라졌지만, 계란볶음밥에 대한 아쉬움을 제일 먼저 이야기했다. 의외였다. 아빠에 대해 요리를 아쉬워할 줄은 몰랐는걸. 



내 품의 경계

  

원래 아이들은 손톱 자르는 걸 싫어하는 편인지, 아직도 종종 두 아이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손톱을 잘라준다. 그런데 아이들의 손이 점점 눈에서 멀어짐을 느낀다. 유아용 손톱 가위를 사용할 때는 아주 작은 손톱도 가깝게 들여다보면서 잘라주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니 아이의 손도 눈에서 자꾸만 멀어지려고 한다. 언제부터 혼자서 손톱을 자르게 될까? 나 역시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첫째는 제법 혼자 하는 게 많아졌다. 둘째는 오빠가 해 주는 계란 후라이를 제일 좋아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톡 깨서 넣는다. 노른자는 꼭 풀어줘야 한다.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뿌린 후 참깨가 있다면 솔솔 얹어준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한 꼬집 넣으면 ‘첫째표 계란 후라이’가 완성된다. 첫째표 라면에는 건더기가 안 들어간다. 스프에 들어있는 파를 제일 싫어하지만 계란은 환영한다. 열 살 때까진 매운 맛을 ‘인생라면’이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억지로 먹더니, 설사 한 번 하고는 ‘불닭’ 종류는 이제 안 먹는다.  

  

둘째도 머리감는 거 말고는 제법 혼자서 잘 한다. 혼자서 못 감는 머리를 단발로 확 잘랐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러면 귀여워진다고 절대 못 자르게 한다. 핑크색을 좋아하지만 드레스 코드는 블랙 앤 화이트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둘째는 이제 귀여운 거 보다는 예쁜 게 좋단다. 둘째를 보면 잘 하는 것과 잘 하고 싶은 것의 경계를 보게 된다. 나도 할 수 있어 혹은 내가(할래), 내가(할래)라고 하는 건 자기도 할 수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는 경우다. 실제로 할 수 있을 때는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한다. 컵을 꺼내 물 마실 때는 아무 말 없지만, 냄비에 물을 끓일 때는 이제 자기도 할 수 있단다. 

  

얼마 전 옆집에서 2층 침대를 받기 전까지 우리집에는 침대가 없었다. 그래서 4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첫째와 둘째가 오른쪽, 왼쪽 하나씩 차지하고 나는 양쪽 끝을 번갈아가며 잤다. 작은 방에 2층 침대가 들어오고 나서는 위층에는 첫째가, 아래층에는 둘째가 자기로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혼자 자는 조건으로 침대를 받아왔으나 아직까지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아직도 자기가 엄마 품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실랑이를 한다. 품안에서 아이들 재울 때면 보들보들하고 아늑해서 좋지만, 재우고 거실로 나와 밀린 영화를 보거나, 아내와 가끔 캔맥주 한 잔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그러다보면 슬슬 아이들도 혼자 잘 나이가 되어 있겠지. 품안의 자식도 걱정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자식이 품에서 벗어난다고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앞서 이야기한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말도 했다. 부모-자식관계는 원래부터가 소원한데 옛날에 비해 그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지만,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울 뿐 식사 이후에는 각자의 원하는 ‘해방’된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애정이 넘치는 부부관계가 일상이 아닌 것처럼, 부모-자식관계의 소통도 자연스럽지 되진 않는다. 




어릴 때는 아이의 옹알이를 못 알아듣고 커서는 그들의 일상어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루 종일 히어링 해야 겨우 자기 아이의 옹알이 정도 안다. 아내가 학교 다닐 때 주말마다 가요프로그램을 ‘공부’하는 이유는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아이마다 시기는 다르겠지만,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초등학교 5학년이 넘어서면 부모로부터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단다. 점점 품안의 경계가 어딘지를 확인하려고 하겠지. 


더 나중에는 아빠의 품이, 부모의 품이 넓어지거나 경계가 희미해지길 바란다. 이건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고, 앞으로 살고 싶은 곳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찾아오는 곳을 ‘부모님 집’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왠지 아이들이 찾아오는 곳이 ‘부모님 집’이면 효도라던가, 명절인사라던가, 아니면 재산을 노리고 오는, 뭐 이런 식으로 ‘부모-자식’의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 아내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진 못해서 명확하진 않다. 하지만 아내와 내가 살고 있지만 우리 부부만 사는 곳은 아닌 집, 나를 보러 오지만 나만 볼 수는 없는 집, 집에 살고 있지만 꼭 집은 아닌 곳이면 좋겠다. 그래서 와서 신나게 수다나 떨고 가면 좋겠다. 

  

첫째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한문공부를 하러 문탁에 드나든다. 나 역시 문탁에서 가끔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본다. 상상해 본다. 언젠가 첫째와 내가 문탁에서 같이 논어를 배운다면, 스피노자를 배운다면, 니체를 배운다면 어떨까? 물론 첫째는 싫어하겠지. 그러나 적어도 그때만큼은 아빠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아이나 나나 똑같이 모르는 걸 배우는 게 되니까 말이다.    부자관계가 동학관계로 바뀌는 게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문탁에도 그런 모자관계 혹은 모녀관계들이 몇몇 있다. 조금 어색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특별히 좋거나 나쁜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책을 읽어서 통하는 뭔가는 생기지 않을까? 지금 아이들과 ‘비빔툰’의 개그를 따라하거나, ‘나루토’에서 주인공의 필살기에 대해 논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부모 품의 경계가 옅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아빠’에 대한 욕심도 이미 사라지지 않을까? 


글_청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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