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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나의 직업 - 피 땀 눈물

by 북드라망 2019. 4. 5.

나의 직업  - 피 땀 눈물



나는 입시학원에서 재수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3년 12월부터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만 15년이 넘었다. 대부분의 학원 강사들이 그렇듯 내 꿈은 학원 강사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을 벌어야 하기에 이 직업을 선택했다. 학원 강사로 일하며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보냈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탈출만을 생각했다. 그러니 이 직업에서 열심히 노력해 최고가 되겠다거나 이 일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소위 소명의식이라는 것도 있을 리가 없다. 꾸역꾸역 주어진 수업을 문제없이 하자는 생각으로 지낼 뿐이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하는 것은 아니다. 효율적인 내용 전달과 재미있는 수업 방식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은 아니었지만 대충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묘한 내적 불일치로 인해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약간의 공황장애 증상도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지내다 보니 ‘일’을 통한 재미는 없었고, 매일 밤 스트레스를 핑계로 술만 퍼마셨다. 하지만 만 40세를 넘어가는 시점에, 다양한 만남과 환경의 변화로 인해 직업과 관련한 나의 생각과 태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


한 강좌에 적은 경우 10여명 많은 경우 6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강사라는 직업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수업에 들어가는 일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수업시간 오 분 전이면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기대되어서가 아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시간 동안 수업을 이어가야 하는 부담 때문이다. 강사 휴게실에 들어가 담배를 한 대 피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수업에 들어가기 싫어서 종이 친 후에도 물 한 잔 먹고 스트레칭도 해 본다. 수업에 억지로 들어가서 설명을 시작하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열강’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마구 땀이 난다. 일 년에 두 번 실시하는 강사평가에서 학생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열강하는 모습에 감사해요’라거나, ‘선생님의 열정이 멋져요’라고 의견을 적는다. 학생들의 오해다. 난 긴장과 부담 때문에 땀을 흘린다. 50분 동안 수업을 하고 나면 셔츠가 흠뻑 젖는다. 얼굴은 땀투성이가 된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반달곰처럼, 양 쪽 겨드랑이 부분은 분무기로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색깔이 변한다. 


처음엔 살이 쪄서 땀을 많이 흘린다고 생각했다. 먹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라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어 어릴 때부터 몸이 말랐던 적은 없다. 대학 입학 후 밥은 안 먹고 새우깡에 소주만 먹고 다니던 시절부터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군 복무 시절까지 잠깐 동안 의학계에서 이야기하는 정상 BMI 수치 범위에 있었다. 그밖에는 모두 비만부터 고도비만을 오가고 있다. 그래서 날이 조금 더워지거나, 여름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당연히 학생들이 많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게 되니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중에 변화는 없었지만 몇 년 전 어느 순간 더 이상 땀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신기했다. 그토록 많은 땀을 흘리며 수업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신체의 변화가 찾아왔다. 어떻게 나는 신체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상황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때문에 나의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생겨날 수 있었다. 타고난 재주, 꿈꾸는 이상과 불일치하는 직업을 선택했지만 남들 보다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싸우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내의 변화와 그로 인해 알게 된 낯선 사람들의 영향이 스스로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고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게 했다. 



강사에게 필요한 재능


강사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자질이 나에게는 부족하다. 하나를 알더라도 열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열을 알고 있어도 기껏해야 둘 셋 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이 듣는 사람들에게 참 맛깔나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그랬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 참 재미없게 이야기한다. 재미만 없으면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이 항상 두렵다. 긴장되고 떨려서 제대로 이야기 하는 것도 힘들다. 10여 년 전 강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매 시간 수업 들어가기 5분 전이 되면 긴장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겁이 많았던 성격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듯하다. 


티비 예능 프로에 나와서 말하는 강사들을 보면 두 가지 의미에서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는 타고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이다. 또 하나는 정말 습자지처럼 얄팍한 지식을 대단한 것인 양, 심지어는 편향되고 오류가 있는 지식조차도 자신 있게 전달하는 무모함이다. 난 타고난 입담을 가지지도 못했고, 항상 내가 전달하는 내용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어서 자신 있게 단정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모르더라도 정확하게 아는 척을 하며 아이들을 휘어잡아야 할 텐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설명하니 먹히겠는가? 소위 ‘일타강사’가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강사 경력이 10년을 넘어선 요 몇 년 간 초창기 보다는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척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일은 아직도 어렵다. 이번 시간에 전달해야 할 내용을 다시 한 번 연습장에 적어보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전달하지 못한 내용을 발견한다. 나조차도 내가 말할 내용에 의문을 가지고 있으니 버벅거림은 어쩔 수 없다. 수업 진행은 10여년 이상 반복해 왔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나를 정말로 곤란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 몇 년 전 코엑스 대강당에서 입시 설명회 연사로 논술전형에 대해 20여 분 간 강연한 적이 있었는데 수 천 명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의 아찔함과 긴장은 아직도 꿈에 나올 정도로 끔찍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서 전달하는데 실패 했고, 그 이후로 대형 입시 설명회에 나가서 이야기하는 일을 학원에서 더 이상 나에게 시키지 않고 나도 되도록이면 피하고 있다. 



무용한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가진 재능이 직업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일이 개인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학원 강사 일은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 신념과도 배치되는 일이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와 능력주의가 사회를 어지럽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인식 속에서 사회적 격차의 심화와 경쟁 논리는 정당화된다. ‘SKY’라는 선망의 표현에서 ‘지잡대’라는 혐오에 이르기까지 대학은 촘촘하게 서열화의 구조 속에 있다. 대학진학률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고졸자는 설 자리조차 없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왜곡된 ‘공정함’과 능력주의는 격차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확대 재생산한다. 내가 종사하는 사교육 분야는 결국 이러한 구조에 기생하며 그것을 공고화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밥벌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밥벌이는 원래 비루한 것이라 합리화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하는 일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소모적이고 불필요하며 사회에 해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고 있듯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는 일이 과거와 달리 삶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최근의 대학은 학생들이 주체적이고 대안적인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1995년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일탈’을 배웠다. 모범생의 모습에 충실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첫 경험을 했었다. 학점을 잘 받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철학과 전공 심화 수업 기웃거리기, 전공 시험 답안지에 교수가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방향성을 공격하는 내용 적기, 학생회가 점거한 대학 본부를 탈환하려는 교직원들과 싸우기 등등 정해 준 대로 살지 않으려 시도해 본 시기였다. 아직 외환위기 전이라 대충 학교를 다니다 보면 적당히 취직해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와 선후배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랬기 때문에 객기 부리기도 가능했다. 현재 거친 일탈의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일탈은 다양한 삶의 가능성들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삶에 많은 도움을 줬다. 내 앞의 많은 선배들도 지금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나보다 더 치열하게 소위 ‘껍데기를 벗는’ 경험을 했으리라. 하지만 힘든 재수생활을 거치고 대학에 입학한 후 놀러오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일탈과 저항의 냄새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대학 1학년의 중요 관심사가 학점과 취업인 시대가 되어버렸다. 수업시간에 필기를 열심히 하고 그것을 암기해 성적을 잘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좋은 곳에 취직하려는 목표를 향해 마구 달려간다. 대학에 간다고 해서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다. 그저 고등학교까지의 수험생활이 연장되어 취직을 위한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릴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전문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조차 급변하는 사회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아니다. 모든 분야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은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4년 동안 배운 지식은 졸업하자마자 과거의 것이 될 뿐이다. 게다가 정보화로 인해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이 많아졌다. 세계 대학 곳곳의 강의를 인터넷을 활용해 들을 수 있다. 인문학에서 공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쌓기 위해서라면 대학에 가는 것보다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일이 더 유용하다. 결국 대학에 가는 일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한 것도, 전문지식을 쌓기 위한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과거에도 대학의 무용함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무용함은 커져만 간다. 만들어져 있는 피라미드형 학벌 구조 속에서 조금 더 위쪽에 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학에 가고 좀 더 나은 평가를 받는 대학의 학위증을 받는 의미밖에 없다. 



무용함에 더해 거짓까지


무용하지만 대입을 준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져 양극화된 사회의 바닥에 있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학생들이 대입에 몰두하고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조 속에서 밥벌이를 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학생부 종합 전형’이라는 제도가 확대되면서 거짓말을 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주고 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은 학생의 고교 3년간 학교생활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학교생활기록부’를 입학사정관이 ‘종합적’으로 평가해 합격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대학 측의 설명을 개략적으로 정리해 보면,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충실하게 임하며 얻은 호기심을 다양한 활동으로 구체화하여 성과를 남기고 독서활동 등으로 자기 주도적으로 심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발견을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학에서 원하는 방향은 너무나 훌륭하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피라미드식 대학 서열체제하에서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 학생부 종합 전형을 통해 모순된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각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들을 존중해야 한다. 성장과정의 고유한 가치들을 존중하고 학생들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 정원에서 벗어난 학생들을 탈락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합격시켜야 한다. 학생들의 다양한 경험과 가치, 성장 가능성을 몇 명의 입학사정관이 단기간의 서류검토와 면접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백번 양보해 학생들의 가치를 입학사정관들이 예언자처럼 평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합격자와 탈락자를 가려내기 위해 많은 지원자들을 촘촘하고 정확하게 줄 세울 수는 없다. 대학들이 밝히고 있듯 학생부 종합 전형이 정량적 평가가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대학이 추구하는 선발 방향과 일치하는 학생이 특정한 해에 많이 지원한 경우에도 정원을 초과해 모두 선발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가 많지 않아도 정해진 인원은 선발해야 한다. 공고한 학벌체제와 학생들의 다양한 가치와 성장가능성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대학의 오만이 더해져 괴물 같은 제도가 만들어졌다.


입시 상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도 함께 하고 있어서 내 일에 대한 자괴감은 더 커져만 간다. 학생부 종합 전형의 좋은 취지와는 다르게 서열화 된 학벌체제 내에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학생들은 같은 곳에 지원한 학생들보다 조금이라도 돋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는 소위 명문대에 몇 명이라도 더 합격시켜야 좋은 평가를 받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학생들의 생활을 기록하는데 신경을 많이 쓴다. 그 결과 ‘학교생활기록부’는 더 이상 ‘생활’을 정직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학교생활 ‘칭찬’기록부라 부를 만큼 긍정적 평가만이 가득하다. 소위 ‘컨설팅’을 위해 많은 학생들의 학생부를 읽어보면 서류상으로만 볼 때 완벽하지 않은 친구들은 거의 없다. 수업시간에 벌어진 일을 기재하는 ‘세부특기사항’이나 동아리 활동 등을 기록하는 ‘창의체험’ 항목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에 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연계 학생들은 대학 전공 수준의 실험을 척척 해내고 관련 학술논문을 스스로 검색해 읽고 심화된 연구보고서를 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학생은 영어로 능수능란하게 문학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글을 쓰고 자신의 생각을 작문해 학교 영자신문에 발표한다. 이런 학생들이라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벌써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았고 혼자서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으니. 하지만 학생부의 많은 기재사항은 과장이거나 심지어 거짓이다. 교사가 엄청난 분량의 학생부 기재사항을 혼자 감당하는 일은 불가능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초안을 잡아오라고 하는 학교가 많다. 학생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소설을 써서 제출하고 이는 거의 그대로 학생부에 기재된다. 컨설팅을 하는 나는 어떻게 개연성 있는 소설을 쓸 것인가를 조언한다. 원서접수를 코앞에 두고 있어 학생부 기재가 완료된 학생들의 경우 주어진 기재사항을 바탕으로 학생의 고교 생활과 관련한 대하소설의 플롯을 구상한다. 대학에서는 이러한 거짓까지 모두 가려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대학은 거의 모든 학생이 거짓으로 서류 내용을 기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고한 학벌체제와 왜곡된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훌륭한 제도를 만든다고 해서 입시와 관련된 한국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입시관련 구조가 계속 유지되어야 나는 그것에 빌붙어 꾸준히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다. 





안하면 안했지 못하지는 않아


직업 선택의 이유는 단 하나 경제적 안정. 선택한 직업을 해 나가면서는 끊임없는 자괴감. 타고난 재능에 반하는 직업의 특성. 어느 하나 직업적 만족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나쁜 평가를 받기는 싫었다. 내가 있는 학원은 일 년에 두 번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사평가를 실시해 일정 기준 이하인 경우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매년 평가를 이유로 그만두게 되는 동료 강사들이 있다. 이유가 자존심일 수도 있고 생존일 수도 있지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나름 할 일을 다 했다. 강사가 천직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직업이라 생각했지만, 수업과 관련한 일을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학원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흥미롭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에 충실하게 완벽을 기하려니 스트레스는 더해갔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나쁜 습관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조금 자란 손톱을 물어뜯다가 주변의 굳은 살까지도 뜯어대기 시작했다. 열 살 무렵 시작된 습관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편안한 일상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해결하기 어렵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여지없이 손가락이 입에 들어가 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허허실실 여유 있는 척 하지만, 사실 난 매우 소심하고 민감한 성격이라 모든 일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강사 생활을 시작 한 후 이 버릇을 더 심해졌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다. 수업 준비를 하는 도중 계속 다리를 떨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뜯어 손톱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는 경우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기 싫은 일을 잘하려는 마음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기 때문에 손을 괴롭혔었다. 수업시간에 땀을 흠뻑 흘렸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사실 이런 버릇을 지금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낯선 것들과의 만남


나의 스트레스와 이상행동이 극한에 다다를 무렵 아내는 ‘문탁네트워크’라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만이 아니었다. 밀양 송전탑 싸움에 함께 하기도 하고, 녹색당 당원이 되어 원전 유치 관련 영덕 주민투표에도 가는 등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아내의 공부와 활동이 부럽고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데 넌 재미있게 공부와 활동을 하고 있구나’라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다. 그 전에도 아내는 마을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일하는 등 대안적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주말이면 함께 백화점에 나가 쇼핑하고 식당가에서 밥을 먹으며 하루를 소비하고 돌아오는 일에 우리 둘 모두 더 익숙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비루하게 벌어오는 돈으로 맘껏 소비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아내가 공부를 시작하고 낯선 사람들과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내가 공부와 활동을 시작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나도 아내가 먼저 만나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내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는 더 심해졌다. 이런 재미있는 일들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거짓말이나 가르치고 있는 나의 모습에 대한 불만도 커졌다. 미친 척 아내에게 투정하는 마음으로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나의 일상이 싫어서 일탈을 꿈꾸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여행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면서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나의 보상심리가 깔려 있었다. 재수생을 가르치는 직업의 특성상 학생들의 대학 낙방이 확정되어야 개강할 수 때문에 12월과 1월은 백수상태로 지내 시간의 여유가 있다. 하지만 사실 실제로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술잔을 기울이다 한 달여의 여행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욕만 엄청 들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내는 의외로 간단하게 ‘다녀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좀 뻘줌했다. 하지만 간다고 했으니 가야지. 부리나케 멕시코와 쿠바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데낄라, 모히또, 코로나 맥주를 마시며 살사를 출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의 장기단독여행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새롭게 시작한 공부와 활동에서의 많은 낯선 경험들이 그녀의 태도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자식을 다 버리고 혼자 한 달간 여행을 가겠다는 낯선 남편의 모습을 인정해주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녀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는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이질적인 경험들을 배척하려는 생각보다는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지냈었다. 북회귀선 부근의 따스한 기후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매우 낙천적이었다. 쿠바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물질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각자의 직업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렵다. 여행지에서는 나에게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아바나와 같은 대도시는 계획 경제보다는 시장 경제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소도시에서 만난 민박 가정의 대부분에서 젊은 남성은 쿠바에 남아있지 않고 캐나다나 북유럽등지로 나가 돈을 벌고 있었다. 경직된 태도로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라면 사회주의에 대해 호의적인 내 생각과 반대되는 면을 보이는 엉망진창의 쿠바 상황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의 어쩌면 허술하게도 보이는 낙천적인 모습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어느 순간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쿠바 야구 리그를 관람하던 나에게 가짜 시가를 팔려던 사람도 있었지만 자기는 북조선 친구가 있다며 오히려 응원을 함께 하자고 한 잔에 5CUP(우리 돈으로 200원)하던 생맥주를 땅콩과 함께 계속 사주던 할아버지도 있었다. 한 외곽 마을에 민박집을 잡으려 했을 때, 동네 인민위원회 간부(?)처럼 보이는 사람은 동네 사람들과 회의 비슷한 논의를 하더니 미혼모와 거동이 어려운 노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민박집의 개업 후 첫 손님으로 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자기 집에 그냥 머물게 하면 돈도 벌고 좋았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기 이익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민박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인 저녁식사는 자신의 집에서 하도록 했다. 이틀 묵었던 다른 민박집에서는 미국에 망명해 살고 있는 친척들이 방문해 파티를 열고 있었다. 기타와 퍼커션으로 구성된 3인조 악단을 불러 저녁 내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며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도 조금은 의아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북조선이 외부와 차단된 채 경직되어 있는 것과 달리 쿠바는 유연하게도 망명자들의 방문까지도 허용했다. 그들이 고국을 방문해 쓰는 달러 때문일까? 뭔가 뒤죽박죽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체제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매우 자본주의적 면을 보여주는, 각자의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해주고 낙천적이고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산업화된 국가에서 자란 내 시선에서는 혼란스럽게 보였지만 어찌 되었던 사회는 굴러가고 있었다. 경제 봉쇄 후 물자가 부족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아 주어진 상황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이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여행 중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내일'이라는 뜻의 'Manana'였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닥치면 사람들은 쉽게 ‘내일(언제일지 모르는)’을 외쳤다. 그래 나에게는 내일이 있지 않은가? 현재의 상황에 불만만 가지지 말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자.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살피고 함께 한다면 회사에서 짤리는 것을 겁내지 않고 또 다른 길을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관계’조(一切唯‘關係’造)!


대학원을 다니지 못하고 학원 강사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 속상함에 참 많이도 울었다. 술을 왕창 마시고 취해서 울부짖기도 했고, 침대에 누워 소리 죽여 울기도 했다. 하고 싶지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지만, 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손에서 피가 나도록 물어뜯고, 긴장감에 땀을 쏟으며 일했다. 하지만 만 40세를 넘으며 겪은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난 더 이상 손에서 피가 나게 물어뜯지 않고, 수업을 하며 땀을 쏟지도 않는다. 내 처지를 비관하면서 울지도 않는다. 


잠깐의 여행 경험은 동네에서 만난 소중한 낯선 사람들과 가족 구성원들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했다. 함께 마을 공동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 아이들 방과 후 공동육아를 함께하는 부모들, 매주 일요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야구하는 아빠들, 세미나에서 새로운 경험과 성찰을 하게 해주는 친구들, 결혼 10주년을 맞아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아내, 나이를 먹어가며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아들. 이들 모두가 앞으로 내 삶의 방향을 좌우할 사람들이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주어진 상황을 다시 인식하게 된 것은 내가 스스로 고민한 결과가 아니었다. 낯선 이들과의 경험을 혐오나 비하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나에게 다가온 사람들 덕분이었다. 사실 새로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 쉽지 않다. 하지만 겁내지만 않는다면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마을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업의 특성상 원장과 같은 경영진보다 수업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관계 맺을 기회가 더 많다. 강사를 천직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애매한 자세로 학생들을 대했었다. 그 결과 학생들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도 더뎠고, 나 자신도 재미없고 피곤한 밥벌이를 하며 피폐해져갔다. 재수를 선택하고도 학업에 열중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하와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재미없는 내 수업을 듣다가 조는 학생들을 이전처럼 호통과 함께 교실 밖으로 쫓아내지 않는다. 수업이 끝난 후 조용히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질책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를 해보려는 자세를 학생들은 정말 빠르게 눈치 챈다. 수업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와 소통을 시도하는 내가 에너지를 자신에게 쏟고 있음은 너무 쉽게 안다. 학생들과의 이러한 소소한 소통은 나에게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한다. 


내게 벌어지고 있는 직업과 관련한 상황이 내 성에 차지 않지만, 불편 불만에만 집중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겁 없고 자유로운 삶을 목표로 하는 나의 40대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과 주어진 상황들이 나의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글_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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