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아빠의 일 - 천직 대신 천개의 직업으로

by 북드라망 2019. 3. 29.

천직 대신 천개의 직업으로



직업 유전자

  

팔순을 앞둔 아버지는 백세까지 사는 세상에 새삼 놀라셨다. 그리고 사업을 정리한 지금, 다른 할 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이따금 원망을 했다. 이리 오래 살 줄 낸들 알았나. 그러시면서 앞으로 인생은 ‘이모작’이라며 나에게도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괜찮아요. 제 직업은 정년이 없어서 능력이 된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어요. 

  

꼬장꼬장했던 증조할아버지 밑에서 사과농사 짓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일들을 하셨다. 동대문에서 옷장사도 하고 수학학원 선생도 하다가 몇 개의 자격증을 따서 어느 회사의 공장장까지 근무하셨다. 사과농사, 옷장사, 수학선생, 공장장. 전혀 관련도 없는 일들을 직업으로 삼으셨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아버지의 직업유전자가 전해졌나보다.

  



그 시대의 아빠들처럼 한 직장을 평생 일할 곳으로 삼진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집에 계실 때, 사내아이 둘의 육아가 힘들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구직을 종용하진 않으셨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는 육아휴직을 하신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거나 도움을 받은 건 아닌 걸로 드러났지만 말이다. 

  

직장생활을 정리한 후 집안 거실에 작은 기계를 들여놓으시면서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다. ‘벤딩기’라고 하는 건데, 쇠로 만든 몰딩 위에 부품을 놓고 작은 훌라우프 모양의 쇠로 만든 손잡이를 돌린다. 그러면 촉이 내려오면서 홈 파인 부분을 따라 원하는 모양으로 부품을 접는 기계였다. 말 그대로 집에서 손으로 작업하는 ‘가내수공업’이었다. 차츰 일거리가 늘면서 마당과 옥상에 불법작업장을 만들고, 지하 보일러실에도 기계를 몇 대 놓았다. 결국 수원으로 이사하면서 가내수공업을 벗어나 작은 공장을 지었다. 그렇게 시작한 ‘누전차단기’ 부품 만드는 공장을 30년 넘게 하셨다. 회사를 다니기 보다는 일찌감치 사업을 시작하셨고 하나의 사업을 오랫동안 하셨다. 

  

아버지와 나의 직업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남 밑에서 일하는 직장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 여러 가지 일들을 돈버는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돈 버는 데 굉장한 재주가 있진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게 있다면 아버지는 늘 경영을 공부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동네에서 인문학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직업군


직업이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른 지속적인 사회활동을 말한다. 졸업 전 조기취업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여러 직업들을 거쳐 왔다. 그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다면 일가를 이뤘을 텐데. 어쩌겠나, 앞으로 백 살까지 살아도 한 가지만 할 순 없는 나의 성질이 그러한걸. 아버지, 다행이죠? 전 ‘사모작’은 할 거 같네요.  

  

지금까지 나의 직업군을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그나마 돈을 벌기에 유용한 직업군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건축설계’다. 직장으로 활동했던 2곳을 거쳐 지금도 작은 설계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인 것처럼 싫어도 할 줄 아는 게 이 일이다. 둘째는 돈보다는 당시의 호기심과 상황이 반반으로 작용한 직업군이다. 월간지 기자와 아버지의 프레스공장에서 일했던 경우다. 지나고 보니 다소 아쉬웠던 시간이기도 했지만, 살면서 언제 해 보나 싶었던 일들이었다. 셋째는 그저 좋아서 돈과 상관없는 하는 직업군이다. 분명 그 일을 통해 금전적인 보상은 있었으나,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들이다. 영상과 홍보물을 디자인하는 스튜디오 지음(知音, 전신은 개소리 스튜디오), 처음 시작한 보험일처럼 아직은 친구와 가족에게만 팔고 있는 목공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 직업

  

수학과외 선생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수학에 거부감은 없었고,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더러 칭찬을 받았던 기억 덕분에 건축과에 진학했다. 단순하게 ‘수학+미술=건축’이라 생각한 셈이다. 역사적인 서양건축물이 많은 이탈리아에서는 피자집 주인아저씨도 건축과 출신이라던데, 나의 꿈인 구멍가게 주인이 건축과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첫 직장이었던 주택관련 잡지사를 2년 조금 안 되게 다니다 그만 두고 작은 ‘아뜰리에’ 사무실에 들어갔다. 직원 규모가 10명 미만인 설계사무실을 통상 ‘아뜰리에’라고 부른다. 졸업연도로 보면 3년차 경력사원이겠지만, 잡지사 경력이 설계사무실에 통할 리가 없다. 다시 신입으로 시작했다. 그곳은 나까지 직원이 4명인 사무실이었다. 설계사무소 소장님의 아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았다. 직원이 1~2명인 설계사무소에는 종종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근무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이는 어리지만 경력이 많은 여성 선배 한 명, 그리고 나와 이번에 같이 입사한 세 살 어린 후배가 있었다. 

  



입사동기 후배는 근처에 자취방을 갖고 있었다. 입사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퇴근 후 남자 셋은 술을 사들고 그곳에 자주 모였다. 옛날 시트콤처럼 남자 셋은 자취방에 모여 저녁밥을 해 먹거나 조이스틱 게임을 하거나 컴퓨터와 연결해 영화를 봤다. 회사에 출근해서 같이 도시락을 먹고 저녁에 술 사들고 자취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이나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나와 나이가 같지만 먼저 들어온 한 명은 나에게 월급을 주는 소장님의 아들이고, 다른 한 명은 나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입사동기인 남자 셋의 관계. 서로 말을 놓지도 않지만 존대도 별로 없었다. 재밌었다. 그러다보니 학교 때가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만큼 긴장도 덜 됐다. 남에게 돈을 받는 직업의 경우 긴장감은 어느 정도 필수사항이다. 

  

그 사무실에서 3년 정도 있다 보니 소장님이 갖고 있던 장점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경리 없이 손수 직원들의 월급을 알뜰히 챙기는 것은 쪼잔하게 보였다. 아직까지 손으로 도면을 꼼꼼히 드로잉하는 것은 컴퓨터를 모르는 구닥다리로 느껴졌다. 점점 사무실이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제는 다른 사무실에 가더라도 기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무실로 옮기고 싶다는 이야기에 소장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아직 좀 더 배워야 하고 급여도 더 올려주마. 그러나 이미 마음은 떠났고 가고 싶은 곳도 정했다. 결국 소장님에게는 사직서 대신 감사의 이별편지를 쓰고 사무실을 떠났다. 퇴사한지 10년이 넘어서 작년에 같이 다니던 직원들과 그 소장님을 찾아뵈었다. 남자 셋은 다른 곳에서 여전히 건축일을 하고 있고, 여성 선배도 전업주부지만 이제는 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장님도 이제는 사무실을 접고 어느 교회에서 소임을 맡고 계셨다. 소장님에게 ‘이모작’은 교회였다. 

  

그렇게 옮긴 두 번째 설계사무실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자마자 적응기간 없이 바로 실무에 투입됐다. 맡은 주택이 꽤 이름 있는 양반의 집이라 소장님도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러나 소장님한테는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경력 까이고, 경력사원이라 팀장으로 배치 받았지만 밑에 직원에게 오히려 프로젝트 설명듣기 바빴다. 안 되겠다 싶어서 회의 때마다 녹음기를 챙겨갔고 전달사항이 뭔지 녹취를 해가며 받아 적었다. 사무실마다 각자 사용하는 디테일들이 다른데, 옮긴 사무실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선배들 자리를 찾아다니며 묻고 또 물었다. 물론 그때도 녹음기는 필수. 친절히 알려주는 선배도 있는 반면, 단면상세 도면 봐봐 거기 다 나와 있잖아 핀잔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쉬는 시간 옥상에서 줄담배를 피우다보면 자리로 돌아가기 싫었다. 긴장감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몰려왔다. 많은 동료들은 당시 나의 첫인상에 대해 말수 적고 굉장히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여유도 생겼다. 몇 가지를 동료들에게 제안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를 보자고. ‘공구리못’이라는 영화모임은 4달 동안 이어졌지만, 야근이 많아지면서 흐지부지 없어졌다. 대신 어차피 거의 매일 야근하는데, 건강하게 야근하자고 몇몇 동료들과 헬스장을 함께 다녔다. 저녁 먹을 시간에 운동하고 사무실 올라오는 길에 김밥을 사 먹기로 했다. 건강한 야근으로 다들 몸짱이 되고 있었다. 다만 건강한 야근은 종종 술자리로 이어진 게 문제였지만. 

  

타운하우스 개발과 아파트 설계 의뢰가 들어오면서 사무실에서는 직원을 여럿 뽑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설계사무실까지 영향을 미쳤다. 불가피하게 정리해고 당하는 직원과 남는 직원이 나뉘었다. 우리는 자주 술을 마셨고 불만과 억울함을 성토하거나 다른 대안이 없는지 논의했다.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몇몇은 운영에 대한 불만으로 스스로 퇴사했다. 2009년 첫째가 태어났을 때 나도 좀 쉬고 싶었다. 사무실 사정도 좋지 않았고 그 동안 사무실의 근무능력도 특별할 것이 없던 터라, 나의 육아휴직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년 뒤 자연스럽게 퇴사로 이어졌다. 

  

몇 년 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설계사무실을 차렸다고는 했지만, 사무실 등록은 문탁네트워크 주소로 하고 일은 카페에서 했다. 여러 인연으로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을 짓게 되면서 건축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 구성원으로서 양평, 용인, 광주, 남양주 등에 여러 주택들을 계획하고 지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만나게 되는 인연이 대부분 직장 동료들로 한정됐지만, 개인사업을 통해서는 그 범위가 엄청 넓어졌다.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누군가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점이 직장과 개인사업의 큰 차이였다. 

  

여기 어떤 땅이 있다. 대지. 누군가 새롭게 어떤 건물을 짓고 싶어 한다. 건축주. 그리고 지어 줄 누군가도 있어야 한다. 시공자. 있는 땅에 없는 건물을 상상해야 하는 직업이 건축가다. 어떤 건축가는 공간에 분위기를 만든다고 하고 또 어떤 건축가는 공간에 흐름을 넣는다고도 한다. 공통점은 그 시작이 무엇이든, 공간을 채우는 게 무엇이든 건축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건축가는 짓고 싶은 사람과도, 지어줄 사람과도 연애를 해야 한다. 삼각관계. 

  

얼마 전 세계적인 건축가가 강연을 한다고 해서 연예인 만나러 가듯 대전으로 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참 멋있게 늙었다고 생각했다. 청중에 대한 배려, 건축에 대한 이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정까지. 닮고 싶었다. 그런 건축가가 된다면 나의 수많은 직업들의 끝에 적힐 마지막 직업이 되지 않을까.  



목표 없는 직업

  

학교를 졸업하기 전 우연히 ‘메신저’에서 만난 기자분의 인연으로 들어간 한 잡지사가 나의 첫 직장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당연히 설계사무실의 취업을 생각했으나, 돌연 잡지사에 들어간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었다. 좋은 건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은 직접 짓는 것보다는 잡지가 훨씬 효과적으로 보였다. 건물을 잘 짓고 싶은 욕구도 있었으나 숨어있는 좋은 건물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써 본적이 없던 신입기자인터라 매일 빨간펜으로 첨삭지도를 받았다. 마감 전까지 늘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거꾸로 마감 덕분에 잡지사 생활을 재밌었던 것 같았다. 

  

우리 월간지팀은 편집장부터 선배기자들이 나빼고 모두 여성이었다. 매월 마감이 끝나고 선배들과 회식하는 자리는 일종의 문화혁명의 시간이었다. 학기 중에는 친구나 후배들과 같이 제도실에서 밤샘 작업하는 게 보통의 일상이었다. 방학에는 아예 침낭과 가스레인지, 밥솥을 갖다 놓고 숙식까지 해결하던 때였다. 그랬던 내가 잡지사 선배들을 따라 다니면서 패밀리레스토랑이라는 곳에도,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도, 크리스마스에 명동거리에도 가보게 되었다. 옆자리 단행본팀과도 종종 같이 회식을 했고, 카메라를 둘러매고 출사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2년이 좀 안 되었을 때, 안에서 뭔가가 꿀렁거리는 걸 느꼈다. 기획기사가 많아지고 조금씩 건축사사무소를 찾아가는 일도 늘어났다, 건축가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편집하고 글을 쓰면서 다시 설계사무실에 가고 싶어졌다. 기사를 쓰는 과정은 이러하다. 매달 기획회의를 통해 자신이 쓰고 싶은 기획안을 내놓는다. 회의를 통해 편집장의 허락이 떨어지면 자신이 낸 기획안을 갖고 자료조사에 들어간다. 직접 몸으로 뛰기도 하고 전화 인터뷰나 메일로 자료를 받기도 한다. 흰 종이 위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작업은 건축설계나 기사작성이나 유사하다. 다만 글이 아니라 도면과 모형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결국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자신의 기획이나 생각을 풀어놓고 싶었다. 

  

마침 편집장이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우리팀 선배들도 하나 둘씩 퇴사하고 나니 나의 엉덩이도 슬슬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회사로 들어온 지 얼마 후 몇몇이 퇴사하는 모습을 보고 좀 뜨악했다. 마감 끝나고 종종 술을 마셨던 바로 옆 다른 월간지 선배 한명. 그는 A4 박스 하나에 필기도구나 노트들을 챙겨 별다른 인사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현관까지 배웅하는 사람도 없었고, 2층에서 올라온 광고부 기자도 담당자가 누구로 바뀌었는지 확인만 하고 내려갔다. 새벽까지 같이 술 마실 때는 언제고 이럴 수가 있지. 우리팀 선배들도 의자 위에서 별로 다르진 않았다. 그때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굴러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팀 선배들도 결국 월급문제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별 말없이 헤어졌다. 최근 알아보니 내가 다니던 잡지도 결국 폐간되었다. 

  

지금도 가끔 잡지사 다녔던 때를 이야기하면 아내는 늘 나의 태도를 지적한다. 앞으로의 비전이나 어떠한 목표 없이 단순한 호기심에 일을 시작하지 말라는 거다. 결국 건축설계에 2년의 공백이 생긴 셈이다. 그렇다고 잡지사에 들어가 글쓰기가 늘었냐 하면 아닌 거 같다. 그저 글쓰기에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잡지사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가 정말 나에게 무의미한 시간이었을까. 

  

제대 후 1년을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다. 어차피 나라경제가 어려워 복학도 힘들 때 굳이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대신 아버지 손가락처럼 담배냄새와 기름냄새가 나게 되었다. 1년 동안 그라인더로 연마치는 법, 불량 없이 프레스기계 돌리는 법, 물건 포장하는 법 등을 배웠다. 상황도 나름의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공장에서 기름 만지는 일이 궁금했고 거부감도 없었다. 그때 설계사무실의 알바를 했다면 지금보다 나아졌을까?

  

나의 삶 속엔 이런 무의미한 시간들이 종종 끼어든다. 흑백사진도 그 중의 하나다. 잡지사를 그만두고 다른 구직활동을 하는 대신 동대문에 사진을 배우러 다녔다. 사진도 제대로 배웠다고 말하긴 어렵고, 그저 흑백사진이 궁금했고 무료로 가르쳐준다기에 부담 없이 다녔다.   사진수업을 하는 선생님도 참 독특한 분이었다. 수업료를 안 내는 대신 자신과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했다. 수업시간에 지각도 허용하지 않았고 출사를 나갈 때도 시간과 장소를 꼭 엄수해야 했다. 그분 방식을 존중하고 따라야 했다. 노트에 조리개값이며 노출값을 적은 법이라던가, 그 노트를 출사할 때는 꼭 목에 걸고 다는 것부터 현상, 인화 할 때도 자신의 방법에 철저했다. 돈도 안 되는 그 일을 그 분은 왜 하셨을까. 



본업이 아니라서 재밌는

  

첫째를 업고 문탁네트워크에 드나들고 얼마 안 되서 첫 축제가 열렸다. 그때 축제포스터를 만든 게 개소리스튜디오(gae-sorry studio)의 시작이었다. 그 스튜디오는 문탁내 홍보물을 제작할때 내가 사용한 이름, 그러니까 필명 같은 거였다. 그 뒤로 각종 포스터와 초대장, 웹자보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진들로 간단한 동영상 작업도 의뢰가 들어오면서 영상홍보물도 만들게 되었다. 청소년 단편영화도 편집하고, 어느 소박한 결혼식의 축하영상도 제작하기도 했다. 그 축하영상으로 개소리스튜디오는 처음으로 외주 제작비를 받았다. 

  

최근에 아는 형이 스타트업 회사를 차린다고 홍보작업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정부지원을 받기 위해 급하게 구색 맞추는 용도로 명함, 브로셔, 홈페이지 등을 제작했다. 지원금 중 일부를 홍보비로 받기 위해 개인사업자를 냈다. 건축사사무소는 업종이 달라 안 된단다. 개소리스튜디오를 그대로 사용하긴 어려워서 개소리의 앞 글자를 따서 G-sound 라고 지었고, 스튜디오 지음(知音)이라고 읽는다. 

  

얼마 전 마을영화제에서 준비한 영상워크숍에 참가한 후 스튜디오 지음에서는 1분 영상을 제작해서 상영을 했다. 그리고 청년예술프로젝트에서도 2분 정도의 짧은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본업도 아니고 ‘야매’로 주워들은 지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만, 가끔 돈도 번다. 재미삼아 축제포스터 만든 게 여기까지 왔다. 재미가 없어지면 모를까 굳이 이 사업장를 접을 생각은 아직 없다. 

  

재밌어서 시작한 건 목공일도 비슷하다. 연애할 때 아내에게 무슨 선물을 해 주고 싶었는데 마침 동네 상가지하에 공방이 하나 있었다. 좌식 책상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름 얕은 서랍도 있었지만, 정작 책상 다리를 잘못 만들어서 방석을 두 개 정도 깔고 앉아야 높이가 맞았다. 아내에게 선물은 해 줬는데 잘 썼는지는 모르겠다. 생뚱맞게 좌식책상이라니. 결혼 후 다시 우리집으로 건너왔고 지금은 프린터 받침대로 잘 사용하고 있다. 

  

마을 작업장 월든



마을작업장 월든이 생겼을 때 문탁식구들 몇몇이 목공수업을 들었다. 오랜만에 또 다시 기초적인 원리와 실습으로 작은 서랍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끝이었다. 한참 후에 선배 한 명이 공방을 차렸다고 해서 친구와 놀러갔다. 같은 건축과 선배인데 더 이상 회사일에 비전을 못 느끼고 퇴사 후 목공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그 선배에게 배웠다. 이번에는 그나마 조금 길게 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수종은 헷갈리고 연장은 서툴다. 나무트레이는 만들어서 어머니에게 팔렸고, 친구 분에게 주신다고 제작의뢰를 별도로 받았다. 수납 겸 스툴은 친구에게 넘어갔다. 선배는 나에게 목공을 직업으로 하겠다면 제대로 수업료 받고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아직은 망설여졌다. 그저 재미로 시작한 목공이었다. 나중에 선배처럼 공방을 차리고 싶기는 하지만 어차피 돈이 되는 직업은 아닐 것이다. 재미에 돈이 따라오는 경우는 있어도 돈에 재미가 붙는 경우는 드물다.   



직업의 경계

  

건축과는 다르게 홍보, 영상과 목공일은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만두고 싶진 않다. 건축은 어쩌면 소위 ‘전문가’라는 타이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계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건축주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또 그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어떤 직업의 전문성을 바라게 된다. 


건축일이 좋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쉽게 지치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음이나 목공일은 하다 보니 뜻밖의 무엇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난한 실습의 과정도 필요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지지자보다는 호지자가 낫고, 호지자보다는 낙지자가 낫다고(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건축이 마지막 직업이라면 나머지는 늘 처음인 직업이 되지 않을까. 돈이 나의 직업을 결정하지 않았고, 건축으로 버는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틈틈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일본배우 릴리 프랭키는 삽화가이자 작가, 수필가, 소설가, 그림책 작가, 디자이너, 음악가, 작사가, 작곡가, 방송 작가, 연출가, 라디오 DJ, 사진가, 그리고 배우이다. 그의 관심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어쩌면 직업은 무엇에 대한 관심사가 일상의 틈바구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물엿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세대는 그러했으나 요즘은 아빠들만 직업을 갖는, 돈을 버는 시절은 지났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맞벌이를 해야만 한다. 그러니 직업에 있어서 나는 어떤 경계에 있다. 돈 버는 일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맞벌이라 할 만큼의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참에 아내에게 전업주부를 선언해 버릴까? 아니야, 밖에서 돈 버는 일이 차라리 속 편할지도 몰라. 그 와중에 드는 생각. 아빠는 꼭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하나, 아내보다 적게 버는 남편은 인정받지 못하나, 제대로 된 실력이 없으면 하질 말아야 하나. 아,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괴로워서 나는 줄타기를 한다. 돈으로 직업을 구별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돈이 나를 규정해 버릴까봐 두렵다.   

 

글_청량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