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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세키의 질문들

[나쓰메 소세키의 질문들] 근대인의 불안을 파헤치다

by 북드라망 2019. 3. 20.

새연재 <소세키의 질문들>을 시작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을 '삶의 질문들'과 함께 읽어 나가는 특별한 코너, '소세키의 질문들' 연재를 새로 시작합니다. 박성옥 선생님의 조단조단하고 따뜻한 안내와 더불어 소세키 장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프롤로그  근대인의 불안을 파헤치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징후


 지금의 나는 어떻게 이 자리에 서있게 되었을까? 인생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방향이 바뀌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7년 전 나는 대구의 교육 일번지로 불리는 수성구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무 명 가까이 강사를 고용하고 수 백 명의 학생들이 들락거리는 제법 큰 학원이었다. 나는 시간을 모눈종이처럼 촘촘히 잘라서 써야했다. 바쁘고 또 바쁜 일상은 지루했다.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시간만이 지루한 건 아니다. 돈을 벌고 성과가 높아질수록 일은 늘어났다. 사업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업이 잘 될수록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더 높은 실적을 내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바퀴는 속도를 늦추는 순간 원심력을 못 이기고 튕겨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화폐-기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헛헛하지? 나는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했고 존재가 허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물질적 성취와 정신적인 충일감이 어긋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삶을 이런 식으로 탕진해도 되는 걸까 존재론적인 질문에 부딪쳤다.


감이당에서 공부하는 모습



그때 우연히 ‘감이당 대중지성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어감 상 달달한 빵집이 연상되는 감이당은 남산자락에 있는 인문학 공부공동체였다. ‘존재와 삶, 자연과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배움터’라는 소개문이 달콤하게 다가왔다. 싸늘한 바람이 가시지 않은 겨울날, 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나서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이 앉은뱅이 나무책상을 놓고 종일 무릎도 못 펴고 쪼그려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희귀한 장면을 보게 된다. 50명 남짓한 사람들이 방안에 빼곡하다. 새파란 젊은이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들이 모여 있다. 나처럼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다. 뭘까? 이 사람들의 목마름은? 이토록 허름하고, 어설프고, 아웃사이더 내음이 풀풀 나는 공간에서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인문학 공부를 하겠다고 불원천리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게 하는 힘이 궁금했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문화소비생활을 하고, 취미활동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의 허무함, 피로감, 고독감, 불안감, 울적함을 달랠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의 정체는 이런 걸까? 그렇다면 나와 같다. 그날 나는 고작 단 하루 노사문제, 교육청 감사, 세무회계, 소방점검, 진상고객 같은 골칫거리에서 벗어났는데 새털같이 가벼운 해방감을 느꼈다. 공부가 어디론가 나를 데려다주겠지 설레었다.


내가 감이당에서 처음 접하게 된 공부주제는 <글쓰기의 존재론>이다. 고전을 공부하면서 글쓰기가 자기 존재를 입증하는 전부가 된 사람들, 글쓰기로 삶의 진실과 대적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때 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작가였다. 하필 맨 처음 읽은 작품이 『마음』이었다.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자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같이 심사가 답답해지고 속에 천불, 얼음 동동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상도 하지.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소세키에게 끌려 들었다. 내침 김에 그의 소설 여섯 권을 몰아서 읽어치웠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무엇이 나를 이토록 매혹시키나 의아했다. 


소세키 소설의 매력을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렵다. 뭐랄까. 옆에서 누가 암에 걸려 아프다는 소리를 해도 당장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플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연을 투시한다고나 할까. 배짱 없고 우유부단한 사람이 겪는 마음의 지옥을 보여 준다고 할까. 나는 남의 이목을 무시할만한 뱃심은 없으나 일탈을 자제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의 행로가 궁금했지만 한편으론 진저리쳤다. 신경쇠약에 가까울 정도로 내면을 파헤치는 소세키가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왜 이 작가에게 끌리는 것일까.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불안했다. 물질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의 입구에서 소위 모던보이와 신여성이 된 사람들의 내면은 황폐했다. 소세키는 물질적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헛발질을 하고 있는 일상을 간파했다. 마치 나를 거울에 비춰본 것 같았다. 아주 우연한 마주침에서 인식의 미세한 변화가 시작된다. 정체는 불분명했지만 나는 뭔가 변화의 조짐을 포착하고 열렬하게 거머쥐었는지 모른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이듬해, 나는 전격적으로 학원을 매각했다. 삼십년간의 긴 정규직 생활을 마감하고 백수가 되었다. 나는 매주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을 가서 공부하고 밤기차를 타고 내려오기를 4년 동안 지속하게 된다. 왕복거리로 28만 킬로미터, 3만5천 시간이 넘는 그 시절을 “인문학과 찐한 연애에 빠졌다”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고질병인 소화불량에서 벗어나고 밥맛이 돌아왔다. 출근길에 자동차를 돌려 회사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월요병이 사라졌다. 왜 그렇게 ‘명함 없는 여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튕겨져 나와서 홀로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지적 탐구의 네트워크에 합류하자 새로운 인간관계가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학교 동창보다 자주 만나는 공부 벗들이 생겼다. 지금 나는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책을 읽고 벗들과 세미나를 하고, 글을 쓴다. 내가 원하던 삶이다. 공부를 한다는 소문은 저절로 퍼져나가 짬짬이 강의요청도 들어온다. 한낱 글쓰기가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는가?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아주 조금 방향을 트는 발심에서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마침내 나는 소세키의 장편소설 열네 편을 다 읽고, 이 글을 쓰기에 이른다. 



소세키는 어떤 작가인가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근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국민작가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우미인초』, 『산시로』, 『그 후』, 『문』, 『마음』 등 많은 장편소설을 쓴 소세키는 백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대중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1867년 일본의 도쿄 신주쿠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지만 22세부터 소세키(漱石)라는 호를 사용했다. ‘흐르는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고사 침류수석에서 따온 말이다. 돌로 양치질을 하다니 이름부터 세상사에 합류하기 어려운 괴짜의 성향이 엿보인다.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지방의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던 소세키의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왔다. 1900년 일본 문부성이 선정한 제1회 국비장학생으로 영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키 작고 가난한 동양의 유학생이 영국 땅에 던져졌을 때 그는 불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런던 유학 시절의 심경을 ‘오백만 기름방울 위에 혼자 떠있는 물방울 같다’고 표현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고독한 외톨이의 모습이다. 자유로운 사유를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식이 깨지는 질병을 앓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했던가. 신경쇠약이 악화되고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고국에까지 들려왔다. 


소세키를 아프게 강타한 질문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였다. 그가 접한 서양문학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한학과는 달랐다. 소세키는 영문학이 과연 모든 문학의 전형일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문학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정신의 산물인데 영문학을 그대로 답습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모든 문학서를 고리짝 안에 처넣는다. 그리고 무조건 남을 흉내 내기가 아닌 자기만의 고유한 문학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본위라는 네 문자를 가까스로 생각해 그 자기본위를 입증하기 위해 과학적인     연구와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나쓰메 소세키, <문학론 서>, 『나의 개인주의 외』,    김정훈 옮김, 책세상, 2013년, 54쪽)


영국에서 소세키가 건져 올린 단어는 “자기본위”였다. 이 네 글자는 훗날 그의 문학세계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개인주의”의 씨앗개념이 된다. 귀국 후 교편을 잡고 있던 소세키는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를 쓴다. 1905년 1월 잡지에 발표하자마자 이 소설은 대중들에게 열렬한 호평을 받았고 11회까지 연재가 이어졌다. 소세키는 작가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의 나이 38세, 중년으로 접어든 때였다. 그는 자신을 평생 괴롭혔던 신경쇠약의 광기를 다그쳐서 창작열로 향하게 했다. 

 

제국대학 졸업이라는 학벌로 보면 그는 학계는 물론 정계나 경제 각료로 출세할 수도 있고 식민지 조선이나 남만주까지도 진출할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인텔리 지식인이다. 하지만 소세키는 삶의 방향을 글쓰기로 틀었다. 그는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해 매일 소설을 쓰는 전속작가가 되었다. 소세키가 제국대학 교수의 명예를 버리고 신문사에 들어가는 걸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그만둔 다음 날부터 갑자기 등짝이 가벼워지고 폐에는 미증유의 엄청난 공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듯 맹렬하게 소설을 써내려갔다. 1916년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십년동안 그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날까지 썼던 소설 <명암>은 188회를 마지막으로 미완으로 남았다. 


소세키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굵직한 키워드는 근대문명 비판, 인간 마음의 탐구, 자기본위의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는 메이지유신과 궤적을 같이 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시발점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하고 서양식 근대화를 시작했다. 근대의 격동기에 동북아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주제의식은 국가발전이라든지 자주독립, 민족계몽과 같은 거대담론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제국주의 세력을 팽창해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소세키의 문학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고유한 색깔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아를 탐구 대상으로 삼고 성찰하는 점에서 주체철학을 잇는 작가이다. 그에게는 진실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절실한 것은 없었다. 소세키의 문학은 빠른 속도로 균질화 되어가는 근대 문명세계에서 개인주의의 가치를 외친다. 각자 자기의 본성에 맞게 자기 속도로 살아가는 삶의 윤리를 추구하고 있다. 



소세키가 던진 질문은 왜 우리와 비슷한가


소세키는 1900년대 초 근대로 진입한 일본의 풍경을 그렸다. 그의 소설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대를 구하고 민중을 계몽하려는 선구자도 없다. 소세키는 한창 잘 나가는 국가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내면을 다루었다. 국가주의와 집단주의가 대세인 일본사회에서 아주 작은 것을 클로즈업하는 시선이다. 그는 20세기 초로 건너가는 세기말적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사랑과 윤리의 틈새에서 피가 말라가는 죄책감, 신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도 거스르지도 못하는 불안감, 화폐를 중심으로 엮어지는 인간관계의 뒤틀림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내가 소세키에게 끌리는 것은 이런 지점일 것이다. 거대한 시대적 조류 속에서 개인은 각자의 고민만큼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개인이 겪는 마음의 균열은 세상사의 격랑만큼이나 거칠고 깊다는 것. 


소세키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사회의 엄청난 속도변화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문명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자기구원은 가능한가. 그의 질문들은 유례없는 디지털 문명의 변동에 휩쓸려있는 우리와 맞닿아있다. 소세키의 소설 속 인물들의 갈등은 100년이 지난 우리의 삶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인간의 고민은 다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20세기 사람에서 21세기 사람으로 건너가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1999년 12월 31일 밤, 나는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통신, 전력, 의료기관, 항공사 등등 거의 모든 직장에서 날밤을 새웠던 날이다.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가 대한민국을 휩싸고 있었다. 1999년을 99라는 숫자로 줄여서 인식하던 컴퓨터가 2000년 1월 1일을 00으로 인식해서 모든 기계작동이 오류가 나면 방송이 끊기고, 산소호흡기가 멈추고, 비행기가 추락한다는 식으로 공포의 시나리오가 퍼져나갔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정서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설령 밀레니엄 버그가 발생했다한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고장을 복구시킬 무슨 실력이나 대책도 없이 그저 긴장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 날처럼 생생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편리함과 효율성의 산물로 간주하던 컴퓨터에게 압도당하는 인간의 왜소함이라니 세상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소세키가 전기나 기차, 증기선이나 기계의 등장으로 삶의 지반이 변화하는 것을 목도했을 때의 불안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다지 멀리 오지 못했다. 그들이 고뇌했던 근대의 명암은 오늘 날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우리들은 근대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소득 3만 불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상상을 초월하는 핑크빛 미래를 가져다 줄 것처럼 예고하고 있지만, 막상 자신이 설 자리가 어디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소세키가 근대인의 행로에 대해 던진 질문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질문은 근대의 변화상과 인간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단초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즉각적인 해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소세키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진실에 대해, 삶의 윤리에 대해, 혼미한 세상에 대해 질문하는 힘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라고 말해준다. 소세키의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어가면서 내 삶의 질문과 연결시켜보고 싶다. 삶의 마디마다 스스로 건져낸 질문만이 지혜의 길이 되지 않던가. 각자 자신의 질문에 답하라.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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