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새의 추억
어릴 적 ‘쥐라기 월드컵’이란 만화를 즐겨 봤었다. 공룡 캐릭터들이 나와서 축구를 하는데, 각 캐릭터마다 공을 차는 방식이 달랐다. 그 캐릭터와 공룡 이름을 열거하며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ㅡ.ㅡ;;)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공중으로 날아 올라, 오버헤드킥을 날리는 날개 달린 공룡이었다. 그 땐, 나도 한번 그런 슛을 쏴보는 게 꿈이었다.
그 후 중학생이 되고, 교과서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다시 보았다. 물론 뼈다귀만 앙상한 형태로 말이다(^^;;). 그것은 시조새였다. 하지만 그 시조새는 내가 어릴 적 만화에서 보던 것과 조금 달랐다. 시조새는 새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닌 것이, 깃털이 있고, 다리는 2개였다. 만화 속 캐릭터는 팔, 다리, 매끈한 날개를 뽐내며, 꼬리로 차는 강슛을 자랑했는데 말이다. 쩝! 지금 생각해보니 그 캐릭터는 날아다니는 공룡, 익룡이었기 때문에 시조새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시조새는 좀 더 새에 가까워 보여 연약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 앞다리를 날개로, 비늘을 깃털로 변환한 공룡이 날 수 있다는 게 어찌나 근사해 보였던지, 그것에 열광했었다.
그런데 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시조새가 교과서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어렸을 적 열광했던 시조새가 교과서에서 삭제된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쉬운 감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과학 교과서에서 사라지는 ‘진화론’*
16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고교 과학 교과서를 출판하는 인정교과서 업체 7곳 중 교학사·천재교육·상상아카데미 등 3곳은 지난 3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가 교과부에 제출한 ‘말의 진화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청원을 받아들였다. 천재교육은 ‘말의 진화’를 ‘고래의 진화’로 대체하기로 했고 나머지 출판사는 삭제할 예정이다. 교진추는 2009년 창조과학회 교과서위원회와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가 통합한 기독교 단체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진화론의 실체를 학술적 견지에서 밝혀 궁극적으로 진화론 교과서를 개정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에도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이 아니다.’라는 청원서를 제출해 금성·천재교육·교학사·상상아카데미·더텍스트·미래엔컬처 등 6개 출판사가 관련 부분을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로 했다.
전문가유들은 이번 사태가 새로운 이론이나 논란에 수세적으로 대응해 온 과학계의 태도 때문에 빚어졌다고 보고 있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시조새나 말의 진화 등은 학계에서 실제 논란이 있는 만큼 ‘확인된 사실만 가르친다’는 교과서 집필진 입장에서는 청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문제는 교과서 집필진이 지난 수십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진화론의 실체를 외면하고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미 오래전에 조작으로 판명된 에른스트 헤켈의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발생반복설’이 지금도 교과서에 실려 있다.” 면서 “이런 태도가 진화론이 공격받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시조새 광팬으로서 의무
신문기사에 의하면 시조새 화석에 관한 내용이 교과서에서 삭제되거나 개정될 것이라 한다. 시조새에 대한 학술적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치 않은 시조새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일부 수정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논란이라는 거지? 논란의 중심엔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전이형도 아니고 진화의 증거도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엉? 이상하다. 시조새는 분명 공룡과 새의 특징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시조새는 공룡과 비슷한 부리의 이빨, 발톱 그리고 기다란 꼬리를 가지면서도, 새처럼 깃털을 지녀 휠훨 날아다닐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전체 형태가 새인 것 같은데, 자세히 뜯어보면 공룡의 특징이 군데군데 보인다. 분명 공룡이 서서히 새의 형태로 변해가는 모습 아닌가. 그래서 모습도 이렇게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난 항상 이들이 하늘을 힘겹게 날며 한번씩 까마귀처럼 ‘까악’ 울던 우스꽝스런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시조새가 공룡과 새의 중간형태가 아니라는 건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릴 적 시조새에 열광했던 사람으로서(^^) 이것 저것 시조새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허탈하게도, 시조새에 관한 논란은 정말 학술적인 것이었다. (^^;;) 시조새가 조류와 파충류의 특징 모두를 가진 것은 누구나 보다시피 공인된 바이다. 하지만 시조새 화석은 시조새가 현존하는 새의 직계 조상이 아니고, 단지 멸종한 조류이거나 혹은 깃털 달린 공룡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조새가 멸종한 조류라면, 현재 살아 있는 새들의 조상이 될 수 없다. 또 만약 시조새가 깃털 달린 공룡, 즉 수각류의 일종이라면, 시조새는 그냥 공룡일 뿐이다. 결국 엄밀히 시조새는 중생대의 공룡에서 현재를 이어주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딱 보기엔 양쪽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쩝!
어딜 감히!
그런데 시조새에 대한 기사를 찾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시조새와 관련해 단순히 교과서가 개정되나보다 생각했지만, 시조새에 관한 논란은 꽤 복잡했다. 그것은 시조새에 관련한 교과서 청원을 기독교 단체, ‘교과서진화론개정 추진위원회’(교진추)가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진추’가 제시한 청원이 합당했고, 기독교인들이 교과서 속에 있는 과학적 오류를 바로잡은 것에 대해 과학계는 적잖이 당황해하는 눈치다. ‘교진추’의 청원에는 기존 기독교들이 내놓았던 것과 같이 황당무계한 논리는 없었다. 시조새 화석이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 중간형’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하고, 그런 증거가 어디에도 없으니 교과서에서 그 내용을 빼거나, 아니면 시조새를 ‘깃털달린 공룡’이나 ‘멸종된 조류’로 기술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인정을 하면서도, 매우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일부 과학자를 필두로 진화론 지키기 운동을 본격화하고, 네티즌들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의 댓글을 쏟아내고 있다. 또 한편, 일각에선 과학이 철저하지 못해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다소 신경질적인 자책의 목소리 또한 내고 있다.
사실 과학계는 시조새 화석이 ‘진화의 증거’가 되지 못하고, ‘조류와 파충류의 중간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고 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 청원을 반박할 수 없다. 답답한 나머지 그들의 불쾌감은 다른 곳을 향했다. 이번 청원에 기독교인들의 불순한 목적과 의도가 깃들어 있다며, 기독교 전체를 비판하며 기독교로부터 진화론을 지키자는 것이다. 결국 그 목적이 어찌됐던가에, 기독교는 옆 사람 잘못을 지적했다가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히려 빰 맞은 꼴이 된 것이다. 이래서 싸우고 난 뒤엔 아무런 참견 말아야 되나?^.^
과학이 위대해지려면?
불쾌감의 발로로만 보이는 이러한 과학계 및 네티즌들의 반응은 무엇 때문일까? 한 가지 점을 생각하면, 명확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과학자가 교과서 개정 청원을 했다면 어땠을까? ‘너도 기독교인이랑 똑같아! 나쁜 놈아!’ 라며 비판했을까? 아마… 절대 아닐 것이다. 그 과학자는 그른 사실을 바로 잡으려는 너무나도 과학적인 행동을 했다며 추앙받거나, 아님 너무 당연한 일을 했다며 관심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청원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상반된 반응이 나온다. 그것은 청원 주체가 과학과 앙숙인 종교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과학 이외의 것이 과학에 개입했기 때문인가? 둘 다 그 불쾌감의 원인일 듯 싶다. 한바탕 싸워 감정의 앙금이 남은 친구가 내게 단점을 지적한다면, 고맙기는커녕 싸움을 걸어오는 듯이 보일 것이다. 또 내 영역을 침범 당하길 싫은 사람은 누가 참견하면 매우 불쾌할지도 모른다.
과학계의 지금 행태는 폐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독불장군과 유사할지 모른다! 누군가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면 불쾌해하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자책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점점 고립시키고 있다. 어느 누가 무서워서 과학에게 말 걸겠는가? 뭐? ‘제발 참견하지 말라고?’ 이런 식이다. 이번 시조새와 관련한 사태에서 보이듯 과학은 너무나 폐쇄적이고 순수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과학계 밖의 비판은 수용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한 가지 점을 기억해야 된다. 과학의 정신은 중세의 온갖 권위와 전통에 맞서며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과학은 자신들이 혐오하고 개혁하려 했던 자리에 스스로 오르려 하고 있다. 언제나 과학의 위대함은 진실을 지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함께 진실을 만들 수 있는 데에 있다. 과학이 위대하다면, 과학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되고 누구든 과학에 대해 발언해야 하는 것이다. ‘개똥철학’이 있듯 ‘개똥과학’을 말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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