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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

진화의 단계를 말할 수 있을까?!

by 북드라망 2012. 6. 27.
오만과 편견

신근영(남산강학원 Q&?)

유아기의 흑인종, 성숙한 백인종

태아 또는 유아적 특징들을 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는 성인은 그 이상으로 발달 상태가 진행된 사람보다 틀림없이 열등하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유럽 인종 또는 백인종들이 인종 목록의 가장 앞부분을 차지하고 아프리카 인종 또는 흑인종이 그 끝부분에 위치한다.

ㅡ대니얼 개리슨 브린턴,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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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은 유아기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숙한 백인종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진화에 있어 ‘반복설’이라는 이론이다.

반복설은 흔히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로 얘기된다. 좀 더 설명하자면, 단세포 생물에서 복잡한 인간으로 발전해가는 단계를, 한 인간이 생겨날 때 반복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흑인종은 백인종에 비해 유아적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흑인종이 거치는 개체 발생의 단계가 백인종에 비해 적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흑인종이 진화가 덜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복설은 1920년대가 끝날 무렵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인간과 애기 오랑우탄이 비슷해~

반복설의 몰락을 이끈 사람은 네덜란드 해부학자 루이스 볼크였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여러 특징이 다른 영장류 또는 포유류 전반의 유년단계…의 특징들 사이에 공통되는 점이 놀랄 만큼 많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가진 특징이 애기 오랑우탄이 가진 특징과 비슷하다는 거다. 볼크가 주장했던 인간의 유년적 특질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둥그스름한 전구 모양의 두개골은 ­다른 영장류의 것보다 큰 두뇌를 담고 있다. 다른 유인원과 원숭이는 인간과 비슷한 두개골을 가지고 있지만 훨씬 느리게 성장한다. 인간의 두뇌는 태아기의 급속한 성장률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커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2) 인간의 ‘어려 보이는’ 얼굴 모습. 곧은 옆얼굴, 작은 턱과 이, 튀어나오지 않은 눈 바로 위의 뼈. 유인원의 턱은 인간보다 빨리 자라 성년기에 이르면 툭 튀어나오게 된다.

3) 대후두공의 위치―척수가 뻗어 나오는 두개골 바닥의 구멍. 인간의 대후두공은 직립을 위해 다른 포유류에 비해 앞쪽에 위치한다. 다른 포유류들은 대후두공이 배 발생 단계의 위치에서 점차 두개골 뒤쪽으로 옮아가 후방으로 열리게 된다.

4) 두개골이 늦게 닫히는 것과 골격 경화가 지연되는 것으로 인간 그 밖의 징후들. 갓난아기의 정수리의 커다란 숫구멍. 인간 아기들은 태어나서 한참 후에야 이것이 닫힌다. 오직 인간 아기만이 태어날 때 장골들의 끝과 손가락 및 발가락 끝이 연골로 되어 있다.

5) 여성 생식기에서 질의 하향. 인간과 달리 모든 포유류들은 배에서는 앞을 향하고 있던 질이 성년이게 이르면 뒤쪽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6) 강하지만 돌아가지 않으며 마주 볼 수 없는 인간의 엄지발가락. 대다수 영장류의 엄지발가락은 청음에는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가 나중에 옆으로 돌아가서 물건을 쉽게 움켜잡을 수 있도록 다른 발가락들과 마주 보게 된다.

볼크가 제시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의 성장이 지연되도록 호르몬 균형이 변함으로써 생겨났다. 즉, “인간은 호르몬으로 조절되는 발달 과정에 화학적 제동이 걸림으로 해서 신의 불꽃을 거머쥐게 된, 성숙을 멈춘 유인원에 불과한 것이다.” 볼크의 이 이론이 ‘유형(幼形)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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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같은가 다른가. 이 둘 중 누가 '더' 발전했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과연 그 질문들에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귀여운데!)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덜 성숙한 존재


유형 성숙설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일명 ‘모자이크 이론’. 이 이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체 기관들은 각각 다른 적응적 요구에 의해 발달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진화가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모자이크 이론가들은 볼크가 이렇게 진화가 늦어지는 부분들만을 끄집어내서, 마치 인간이 전반적으로 성숙이 늦춰진 것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다윈 이후』의 저자인 굴드는 유형성숙설을 지지한다. “나는 신체 발달의 지연 현상이 인류 진화에서 기본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알고 있듯이 인간 아기와 일반 포유류 아기들을 비교하면, 인간 아기는 그야말로 무기력하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齒)도 없다.

작년에 태어난 우리 조카를 봐도 그렇다. 조카를 큰 수건으로 꽁꽁 싸둔 것으로 보고, 왜 그리 답답하게 놔두냐고 동생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 활. 애기들은 저렇게 묶여 있는게 편하다고. 그게 자궁 속에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란다. 그 말은 내게, 너무 일찍 나와버린 인간 아기에게 필요한 조치로 여겨졌다.

인간은 여러 모로 영장류, 심지어 포유류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아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전함으로써 진화했다.……우리 인간의 삶의 과정과 속도는 훨씬 극적으로 지연된다.……인간은 가장 긴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갖는 동물 종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유형 성숙 종 또는 늦게까지 자라는 동물이다. 전체 삶의 거의 30퍼센트가 발달에 온통 바쳐진다.

ㅡ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성숙한 흑인종, 미개한 흑인종

볼크는 유형 성숙설로 기존의 반복설을 물리쳤다. 요컨대, ‘유아적 흑인 = 덜 진화, 성숙한 백인 = 더 진화’ 의 구도는 깨졌다. 이것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미개하다’는 인종차별적 구도는 깨진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볼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내 이론에 근거할 때 인종의 불평등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흑인은 태아의 발달 과정에서 백인에게 있어서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한다. 만일 흑인들에게서 발달 지연이 계속 진행된다면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전이 단계가 그대로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인종들도 언젠가는 백인종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발달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

ㅡ루이스 볼크, 1926년
헉, 이제 흑인종은 가장 빨리 성장한 인존이 된다. 그럼으로써 가장 미개한 인간이 된다. 갑자기 인간 진화의 캐치 프레이즈가 바뀐다. “인류의 진보는 청춘의 진보였다.” 이제 이 새로운 기준에 따라, 어린아이에 가까운 민족이 우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증거들은 완전 폐기 되었고, 볼크는 백인 어른과 흑인 어린아이의 유사성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들을 찾아다녔다. 무엇이든 기를 쓰고 찾으면 나오게 마련이다. 볼크는 그런 증거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백인종은 가장 뒤쳐져 있으므로 가장 진보된 듯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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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를 '무엇'으로 여기고 그 세계 속에서 '무엇'을 보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서가 아니   라 전적으로 우리의 시선 끝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ㅡ에셔, <Water and Sky>

엎어치든 매치든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흑인은 미개하다! 백인 우월론자들에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어떤 증거나 이론도 자신들의 결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굴드에 따르면 이런 유형 성숙설과 인종 차별의 논리에는 아주 중대한 약점이 하나 있다. 그 약점은 백인의 우월성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유형’, 그러니까 어린아이의 특징을 가장 많이 가진 인종은 백인이 아니라 황인종이라는 점~. 만약 볼크가 이를 알았다면, 어떻게 백인의 우월성을 입증했을까? 이론을 버렸을까, 아님 다시 기를 쓰고 새로운 증거를 찾아 떠났을까? 궁금할 따름이다.^^

이번 글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에 나온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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