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버리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버리기
- 기호체제와 도주선 -

김해완(남산강학원 Q&?)

나(세계)를 분열분석하라

세상 앞에 내가 너무 무식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때가 있다. 나에게 선고되는 여러 명령들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던 순진한 시절이 끝나면, 벼락같은 충격+배신감과 함께 옛날의 ‘나’를 버리겠노라고 선언한다. 다른 세계, 진실을 보여 달라! 그러나 막상 공부를 시작해 보면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알면 알수록 점점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는 이 기이한 역설. 구조가 더 치밀해지고 자명해질수록, 이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한낱 개인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무력함이 업그레이드된다. 대안은 이 구조를 뒤집어엎는 것밖에는 없는 것인가? 과연 개인인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ㅠㅠ) 이래저래, 무식할 때나 유식할 때나 감이 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천 개의 고원』의 파격지점은 세계와 나를 동시에 분석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움직일 수 없는 구조가 아니고 나는 그 위에 놓인 체스말이 아니라는거. 말하기야 쉽지만 정말로 그렇게 사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들은 실제로 한다! (무서운 사람들...-_-) 중요한 것은 사회구조를 견고하게 설계해서 내 위치를 잡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 흐름을 추상화하여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다. 운동으로만 표현할 것. 지층화와 재영토화의 흐름을 따라, 내용과 표현의 형식들이 ‘나’와 ‘내 외부’를 구분하지 않은 채 펼쳐진다. “더 이상 <나>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 11쪽) 이 책처럼 내가 사는 곳을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역동성이 내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인식하는 것 자체에 윤리적인 태도도 포함되는 것일 테다. 저자들은 이것을 분열분석이라고 부른다.

분열분석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바로 이 다섯번째 고원일 것이다. 기호체제. 기호체제란 “표현의 전(全) 형식화”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범박하게 풀자면 이 세계가 작동하는 표현의 방식을 추상화하여 도표로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들도 원시인들도 자기 나름의 기호체제를 갖는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경우에는 ‘언어’가 해당될 것이다. 인간세계(?)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이 독특한 시선을 따라가 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짐 토드, <진실의 창문>


빙글빙글 도는 세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다 아니다 답하기 전에, 이 질문에는 특정한 기대가 깔려 있다. 민주주의야말로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 혹은 지금 이 세상이 부조리한 것은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동어반복!) 우리는 이 단어에 커다란 기대를 건다. 실제로 헌법상에서 나는 ‘평등한 국민’이고 세계인권선언문에서 나는 ‘준엄한 인간’이다. 하지만 이 달콤한 표현은 내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가!

잘 모르겠는 주의(主義)의 안경은 내려놓고 한 번 내가 지금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별로 자유로운 게 없다. 우리는 갈 수 있는 길만을 밟고, 할 수 있는 말만 하고, 알 수 있는 의미만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있다. 길들여진 경주마처럼 트랙을 달리다 보면 이런 질문이 든다. 도대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누가 정했나? 모른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내 질문에 답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보지만, 그러나 세계 앞에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처참하게 실패한다. 답을 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답이 끝나지 않아서다. 왜 꼭 대학에 가야 하나요? 가 보기 전에 거부하는 건 좋지 않아. 왜 아이를 위해서 많은 돈을 써야 하죠? 아기는 소중한 것이니까. ……. 끝말잇기 놀이 하듯이 말들이 줄줄 이어지지만 궁극적으로 남는 건 결국 침묵이다.

단어들이 빙글빙글 도는 원형. 실은 이것이 바로 의미의 전부다(!). 세상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이 의미의 원형을 유지하는 자, 이 세계 한가운데에 유일무이한 중심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여론이 바뀜에 따라 ‘가족’ ‘학교’ ‘돈’ ‘섹스’ ‘청소년’ 등등의 단어들은 새롭게 해석된다. 그러나 우리는 토론장에서 ‘학교 없는 사회’나 ‘가족의 해체’, ‘사유재산이 부재한 세계’를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의미와 상관없이 단어들은 그 자체로 훨씬 오랫동안 살아남을 테니까. 이 말들의 목적은 우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 모호한 안개 속에서 미끄러지는 게임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이 말들과 원형에 대해서 손댈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다. 그것은 신(神) 혹은 왕(王)의 얼굴의 힘이다. (“내 말이 곧 법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끝이 나지 않는다. 이는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무한한 빚의 비극적 체제이며, 모든 사람은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들뢰즈·가타리 지음,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19쪽

하지만 이것이 지배-피지배 사이의 억압관계일까? 그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이 무한반복 게임에 질려도 우리는 타도해야 할 초권력자의 실체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권력은 훨씬 더 섬세하게 작동한다. 신(神)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신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해석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들은 신이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아주 정교한 의미를 덧씌운다. 그래서 힘을 가진 실체는 보이지 않는데 전달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냥 따르세요~”) 해석자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국가(왕)의 모습을 어디서나 본다. 학교, 병원, 가족, 나에게서도. 왜 아버지는 나에게 “다 너를 위한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하시는가. 왜 정신분석학자는 나에게 “당신은 어렸을 때 욕망이 결핍되어서 지금 이 모양입니다”라고 말하는가. 이유가 없다. 이 체제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 자체를 체제가 만들어 내는데 어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의미의 중심지로 진입할 수 없기에, 그냥 이것을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든 고대 전제군주적 국가든 전부 다른 방식으로 이 체제의 파편들을 지니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기표작용적 체제’라고 부른다. (이름이 어렵다고 쫄지 말자. 신의 얼굴이 뱉는 말이 기표라면, 해석자가 해석해 주는 것이 기의다. 원래 소쉬르는 기의를 실제지시대상물로, 기표는 기의를 표시하는 기호로 정의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의란 없고 기표에 기의를 장전해 주는 기호체제만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을 하나로 쫙 빨아들이는 ‘초코드화(overcoding)’의 점. 그로부터 의미를 발사하는 해석자.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나. 참, 희한하다. 이 ‘빙글빙글’이 내가 사는 모습이라니. 이 세계는 나에게 부조리한 폭력을 가하거나 꼼짝 못하게 억누르지 않는다. 그저 기호체제 안으로 끌어들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 속에 사는 게 아니라 세계에 매여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것은 모자인가?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인가?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안에 세계 있다(?)

하지만 이 해석체계를 치워 버리면 되지 않는가? 신의 얼굴을 외면해 버리고 나 자신을 믿은 채 스스로 나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대사^^;) 그런 체제가 없는 게 아니다. 초월적 권력을 거부한 채 내가 직접 이해하고 해석하고 말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주체화의 체제’다. 빙글빙글 돌던 세계가 선형적으로 쭉 펴진다. 나는 신의 말씀을 벗어나 스스로 세계를 전진한다.

요즘 같은 개성화시대에 딱 들어맞는 정서 아닌가!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나는 어떻게 주체가 되는 건가. 내가 잘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호명해 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름을 갖기 위해서는 내 실존의 무게중심을 실을 출발점이 필요하다. 음식, 성적, 돈, 애인, 예술, 직업…… 뭐든 가능하다. 그것을 주체화의 점이라고 한다. 그 다음, 나는 그 점에 의거하여 나 스스로의 이름을 정한다. “나는             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이 이름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여전히 사회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거꾸로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이봐,             !”라고 부를 때 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주체화가 되는 동시에 뚜렷하고 고정된 ‘정체성’에 박히는 것이다.

우리가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이 정체성을 복제하는 과정이다. 못난 학생에서 더 나은 학생으로, 볼품없는 여성에서 진취적인 여성으로……. ‘분신’ 만들기.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배우지만 사실은 내가 기존에 손에 쥐고 있던 틀에다가 앎을 끼워 맞춘다. 앎이 나의 분신이 되는 것이다. 의식은 자기동일성을 복제하는 용도로만 쓰이고 ‘나’는 점점 더 덕지덕지 앎을 붙인 채 뚱뚱해진다. 심지어 우리는 타자를 사랑할 때조차도 상대의 분신이 되고자 한다. 상대가 내 존재이유가 되고 그렇게 상대를 내 맘대로 하려고 하니, 사랑이 잘 될 턱이 있나. 새로운 나와 옛날의 나를 일치시키면서 나아가는 이 과정은 발전도 진보도 뭣도 아니고 이 지층을 벗어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차단장치다. 이름표(주체)를 끊임없이 갱신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음을 알아챌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 자신도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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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주체화의 체제는 위에서 소개한 기표작용적 체제와 몹시 친하다. 이 둘은 언제나 서로 상호보완관계다. (실제로 저자들은 주체화의 체제를 後-기표작용적 체제라고 칭한다) 기표작용은 주체에게 해석을 부여한다. 주체는 살아남기 위해 그 이름표에 계속해서 영양을 공급한다. “의미생성과 해석은 아주 견고한 피부를 갖고 있으며 주체화를 가지고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혼합체를 만든다.”(같은 책, 265쪽)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직접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나에게만 복종한다고 믿는다. 과거에는 가시적으로 드러났던 권력이 이제는 내면화되어서 작동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똑같은 세계를 나 스스로 복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말하지 못하고 또 사유하지 못한다. 세계는 동일한 나를 통해서 항상 똑같이 표현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기호체제의 혼합물일 뿐이다.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 나의 의식과 열정이 마구 폭발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 나는 열심히 분신 메이킹(?) 중이다.

분신탈출기

기호체제,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평범한 언어활동을 거쳐 사회구성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한 번에 펼쳐져 있다. 이게 바로 ‘나’다.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나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통찰력은 동시적이다.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은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 그대로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삶을 꿈꾼다고 해서, 무조건 학교를 뛰쳐나오거나 직장에 사표를 날리거나 가족의 파탄(?)을 지향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언제든지 동일한 기호체제를 작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나’, 동일한 ‘세계’가 양산되기 때문이다.

‘분신’이 결국엔 모든 지긋지긋함의 원인이다. 지아장커의 영화 「세계」는 베이징 세계 공원에서 벌어지는 청춘남녀의 답답하고 출구 없는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그 노동환경이 요구하는 똑같은 생활방식도 답답하지만, 그들 자신의 감정 또한 계속 반복되기는 마찬가지여서 이 세계 한가운데에서 누가 잘못했고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지층은 아주 정교하게 작동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자신을 옭아매게 된다.

의식이 스스로의 분신이 되지 않게 만들고, 열정이 다른 이에 대한 분신이 되지 않게 만들자. 의식을 삶의 실험으로 만들고, 열정을 연속된 강렬함의 장(場)으로, 입자-기호들의 방출로 만들자. 의식과 사랑으로 기관 없는 몸체를 만들자. 주체화를 소멸시키기 위해 사랑과 의식을 이용하자. (같은 책,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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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촌철살인의 문장이다) 분신으로부터 탈출하기. 기관 없는 몸체를 향해서 긍정적으로 탈영토화하라는, 뭔 말인지 모르겠던 이 추상적인 문장이 갑자기 지극히 현실적인 슬로건으로 변한다. 그렇다.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 ‘다른’ 기호체제, ‘다른’ 차원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호체제란 위로부터 나를 짓누르는 구조도 아니고 미리 꽉 짜인 프로그램도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시원하게 해방구를 연다. 일반기호론은 없다. 기호체제가 저 위에 두 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며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기호체제들이 파편화되어 섞인 채로 존재한다. 이것은 ‘이’ 기호체제가 반드시 지금-여기에 존재해야 하는 근거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은 늘 혼합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쳐 보이는 기호체제는 환상적이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니, 세상은 지배-피지배관계라는 이분법이 아니다. 나의 선택지 역시 순종하느냐 거부하느냐 중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예술적인(?) 공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주하는 우리의 몸짓 또한 예술적이어야 할 테다. 기표작용이 문제다, 정념이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떠들고 사랑하고 싸우고 살아갈 것이다. 도주선은 여기에서 그려진다. 이 장 전체를 버려 버리는 것보다 그 속에서 새로운 색과 음을 발견해내는 것이 더 예술적이고, 모두를 위한 대안을 서술하는 것보다 한 발짝이라도 내 일상 속 이분법을 무력화시켜가는 것이 더 강력하다.

『천 개의 고원』이 긍정파워 100% 텍스트인 이유는 언제나 이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보여주는 이 세계 자체가 언제나 도주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 세계는 항상 나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한 발짝은 미약한 개인의 몸짓이 아니라 세계를 살아있게 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그것은 ‘나’를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를 훌훌 버림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장소,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이미 만들어진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같은 책, 266쪽) 나의 의식, 나의 열정, 나의 몸에서 시작되는 분신탈출기가 필요하다. 분석리포트가 아니라 지금-여기 기호체제 위에 그을 도주선 하나가 필요하다. 분열분석의 목적도 결국 이것을 위해서다. 그러니 모두들 각자가 지금 있는 그곳에서, 간바레! *^^*

사용자 삽입 이미지영화 「세 얼간이」의 한 장면.

천 개의 고원 - 10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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