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관 없는 신체와 욕망 -
기관 없는 신체(CsO)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명한 개념 중에 ‘기관 없는 신체’라는 것이 있다. (Corps sans Organe, 줄여서 CsO다) 험악한 네이밍 센스 때문에 이 개념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이제는 몸에 붙은 기관까지 뽑아 버릴라고? 실제로 이 고원에서는 몸을 찢고 뜯고 꿰매는 마조히스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이 고원은 도발적이지 않고 오히려 아주 신중한 고원이다. 저자들이 겨냥하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 위에서 흘러 다니는, ‘탈기관화 하려는 욕망’이므로.
한번 이렇게 물어보자. 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일까? 뇌? 심장? 척추? 아니면 잘 빠진 S라인 가슴? 허리? 엉덩이?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런 식어 빠진 상상력은 우리를 이 살덩이(육체)와 고정된 기관들로부터 더욱 도망칠 수 없게 만든다. 지금 내가 부르는 기관들은 일시적인 형상일 뿐이다. 애초에 나의 몸은 우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지층 글 참조) 우리들 최초의 모습 또한 아직 기관들로 분화되지 않은 수정란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이렇게 한 번 분화되어 기관 있는 신체(유기체)가 되면 우리는 이렇게 영영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몸 안에 고른판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고른판 위로 어떤 ‘흐름’(그것은 에너지, 욕망, 혹은 기氣라고도 이야기된다)이 지나간다. 그것은 조각조각 나뉜 기관을 넘어선다. 염주에 알알이 꿰어져 있는 구슬들이 그 안쪽으로는 단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이러한 생명의 흐름이 없다면 지층도 유지될 수 없다. 몸이 죽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로 이루어진 신체가 바로 CsO다. “CsO는 강렬함들에 의해서만 점유되고 서식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천 개의 고원』, 293쪽)
"충만한 몸체들이 아니라 텅 비어 있는 몸체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천 개의 고원』, 289쪽)
뭐 이런 이상한 신체가 다 있나. 지층이지만 동시에 고른판. 100년도 살지 못하면서 우주와의 합일을 꿈꾸는 살덩어리. 그러나 우리의 들선생과 가선생은 약 올리듯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쉬운지,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같은 책, 306쪽) ……(-_-)? 그런데 놀랍게도 이 희한한 신체가 우리의 열등감을 해소시킨다. 턱 깎고 코 높이는 것도 아닌데 그런 몸이 내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냐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들어 보자. 저자들의 이 난감한 상상력도 아무런 현실적인 긴장감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닐 테니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 일상이 도道라는 것
얼마 전 내 갓난아기 때 찍어 둔 비디오를 찾게 되었다. 20년 전 낡은 풍경에서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도저히 저게 나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쭈글쭈글한 아기가 아니라, 너무나 앳되어서 못 알아볼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나는 부모님의 싱싱했던 얼굴을 보면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돈 벌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애 키우고, 그러다 보면 이렇게 늙어 버리는 것일까. 그러면 그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남는 것일까. (이 불효막심한!)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그것이 시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시함, 그것은 어떤 종류의 공포다. 내일도 또 내일도 시시하리라는 생각처럼 기운 빠지는 것도 없다. 어쩌다 운이 좋게 21세기에 태어나서 신분제약도 없이 자유경쟁 속에 떨어졌는데, 이왕이면 열심히 노력해서 스펙터클하고 유니크한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문제는 도대체 뭐가 ‘근사한’ 것인지 헷갈린다는 거다.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되나? 아니면 급이 높은 대학에 가서 지력을 겸비한 1등급 새색시가 될까? 삶에 대한 막막한 불안감과 폼 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동전의 양면이다. 현재 우리는 자본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 주는 화려한 삶의 스타일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비디오에서 보았던 것은 부모님의 시시한 인생이 아니라 바로 이 내 삶에 대한 자신감 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안감이 커질수록 더욱더 ‘멋져 보이는 무언가’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아마 이 불안한 예감은 적중하리라. 20년 후, 청춘이 지나간 내 모습은 바로 지금 내 부모님의 모습일 테니까! (으악!)
이 사회가 하나의 지층인 이상 ‘사회적 척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기준을 따른다면 부모님까지 갈 필요도 없이 나는 이미 ‘시시한 사람’이다. 여기서 필요한 건 다른 질문, 다른 문제다.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장애물의 극복, 앞으로-던짐[pro-jection]……이다.” (같은 책, 693쪽)― 이건 어떨까? 우리들 개개인의 ‘욕망’은 시시함과 근사함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지난 20년 동안 헐벗은 나를 입히고 먹인 것 말고는 딱히 한 게 없어 보이는 우리 엄마를 보고 그 욕망까지 시시하다 말할 수 있는 걸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밑에는 이 행위 자체가 일어나게끔 해주는 힘이 존재한다. 바닥청소, 글쓰기, 산책, 강연, 속옷빨래……. 이것들은 모두 다른 행위이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나로 묶인다. 희한하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많은 종류의 일들을 넘나들 수 있는 신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행위들이 모여서 비로소 내가 된다는 생각의 전환을 하는 순간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추동력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욕망은 추잡스러운 것도 은밀한 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고자 하게 만드는 힘이다. 왜 우리는 명품이나 섹스만 욕망한다고 생각할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정신적인 것부터, 밥을 먹거나 산책을 가거나 똥을 싸는 것처럼 생리적인 현상까지도 모두 나의 욕망인 것이다. 이 추동력이 없으면 생명은 살아 있을 수 없다. 융의 말마따나 충동은 항상 실현된다. 우리는 절~대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안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내 일상을 떠난 나의 욕망은 없다. 우리 청춘들은 맨날 술판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지만…… “내 욕망이 뭔지 모르겠어. 흙흙흙……”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술 마시고 있는 나의 욕망은 그냥 ‘술 먹고 놀기’라고!
파울 클레,
사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이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다. 어떤 행동을 취하다가 타자와 접속해 변화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인 것이다. 왜 기관 없는 신체일까? 내 몸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기관들이 아니라 바로 이 살덩이들을 관통하며 흐르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팔과 다리와 눈·코·입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인간인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에, 움직이기에, 단 한 순간도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기에 나는 이렇게 계속해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나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애가 끓을 때, 할머니가 돈에 집착하실 때, 이 모든 게 그녀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확신한다. 이 앞에서 도덕적 잣대나 사회적 척도,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들이대면서 ‘시시하다’고 말하는 자는 둘 중 하나다. 아직 뭘 잘 모르거나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하지 않거나.(^^)
오르가슴은 그저 하나의 사실일 뿐으로, 자기 권리를 추구하는 욕망에게는 오히려 난처하기까지 한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중요한 것은 쾌락이 욕망 자체의 흐름, 즉 ‘내재성’의 흐름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301쪽
이 욕망의 세계에서 우리는 다른 기준을 가지게 된다. 근사하게 혹은 시시하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문제는, 나의 몸이 욕망의 흐름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욕망이 충만해질까?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욕망은 결코 쾌락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초적으로, 마음 가는 대로 막 살면 이 헛헛함이 충족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만 버리고 충만함은 갈수록 고갈된다는 것. 쾌락이란 “인격을 넘쳐흐르는 욕망의 과정에서 인격이 ‘자기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외부적 조건에 욕망을 묶어 버린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 꺼’라고 딱지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욕망이 가장 충만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바로 ‘중단되지 않을 때’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도 딱 이거 하나다. 욕망이 흘러가느냐 멈춰 있느냐(탈영토화 하느냐 지층으로 재영토화 되느냐)? 하고자 하는 이 생명의 힘을 끝까지 밀어붙인 자들에게 우리는 경외감을 느낀다. 95세의 나이에도 매일 첼로 연습을 멈추지 않았던 파블로 카잘스, 죽을 때까지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공자, 원통함을 풀기 위해 『사기』(史記) 저술에 발분했던 사마천. 강렬함의 흐름 속에서 나의 신체는 ‘내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의 복수적인 신체가 된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늘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는 것이므로, 욕망이란 언제나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생성되기에 그렇다. “강렬함들이 지나가서 더 이상 자아도 타자도 없게 되는 기관 없는 몸체 …… ‘자아’를 인식하지 않는 절대적인 ‘바깥’.”(같은 책, 300쪽)
삶의 끝자락에서 나의 평생이 너무나 평범한 일들로만 채워졌음을 깨닫는 것은 정말로 시시한 일일까? 하지만 무엇을 하느냐, 최후에 얼마나 대단해지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그 ‘생성하는 욕망’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다. 이런 생명력을 가진 자의 궤도 속에서는 우리 눈에 시시하게 보이는 자질구레한 행동들마저 근사해진다. 누가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멋진 글이 써지는 게 아니다. 속옷 빨래하고 집안 청소하고 싸우고 들볶는 이 찌질한 일상의 틈새 파편들이 모여서 한 편의 글이 되고, 또 그 글이 누군가의 일상의 틈새 속으로 비집고 끼어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일자무식이어도 청소나 농사 같은 일로 도통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나는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어느 정도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때 혹은 일상에서 도道를 찾으라고 할 때, 그것은 일상이나 잘 챙기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드넓은 세계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에 길이 있다. 저녁 밥상에 길이 있다. 이 길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나의 욕망과 생명에너지가 흐르기에, 내가 다음 발 내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현장이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CsO를 만들 수 있을까. 물론 그냥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미 지나치게 지층에 눌려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끊임없는 실천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준다. 첫째, 배치를 구성할 것. (CsO의 유형을 결정하기) 이 특정한 배치 위에서 구체적인 욕망이 생성된다. 공부하는 신체든 청소하는 신체든 그 종류는 상관없다. 원하는 것으로 골라잡으시라. 둘째, 실제로 일을 실행할 것. (CsO 위로 흐름을 만들 것) 시스템을 만들어도 가동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CsO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몸체이다.”(같은 책, 315쪽) 북적북적한 몸짓이 바로 CsO의 생동감을 만든다. 셋째, 전투. (지층으로부터 벗어나기) 뭐가 되었든 결국 기관 없는 신체로 산다는 것은 지층과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유기체-지층은 팔은 팔이요, 다리는 다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홈 파인 회로를 통해서만 욕망을 흐르게 한다. CsO는 이러한 유기체의 조직화와의 부단한 싸움이다.
"우리는 죽음 충동과는 전혀 다른 자기-파괴를 발명해낸다." (같은 책, 306쪽)
그러나 이에 앞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바로 신중해지라는 것. 위의 정의에 따른다면 마약중독자도 마조히스트도 모두 어느 정도는 CsO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기존 신체의 쓰임새와 다른 강렬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이 방법을 권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그러다가 몸 상한다.(^^) 기존 세계를 완벽하게 거부하고 달아나는 탈주는 몸에 치명적이다. 게다가 그런 도주는 의미가 없다. 다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신중해지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너의 생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기체는 매일 새벽마다 혁신될 수 있도록 충분히 보호되어야만 한다. …… 지층들을 흉내 내어야 한다. 단지 조잡하게 지층을 파괴하는 것으로서는 CsO나 고른판에 도달할 수 없다. …… 먼저 하나의 지층에 자리 잡은 다음 이것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실험해 보고, 거기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우발적인 탈영토화의 운동들, 가능한 도주선들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시험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흐름들의 접합접속들을 확립하고, 각 절편마다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시도해 보고, 항상 새로운 작은 땅뙈기를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책, 308~309쪽)
이따금씩 나는 이 세상이 고요히 멈춰 있는 것처럼 느낀다. 대립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어느새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모습들을 관찰할 때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주’가 빈말이 아니라는 것 역시 확신하게 된다. (고른판과 지층 또한 그렇게 뒤얽혀 있을 테니까) 지금-여기에서 이 세계의 경이로움을 보지 못한다면 투쟁하든 좌절하든 그게 무슨 의미일까! 세계에 싸움을 걸 때는 동시에 세계를 믿어야 한다. 이곳이 품고 있을 변이능력, 그 경이로움을 말이다. 전투는 지층을 부숴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이 계속해서 지연되는 것처럼 이 전투의 승패도 끊임없이 지연되며, 싸우고 도망가고 또 싸우는 그 과정 자체야말로 CsO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은 무한(히 생성)하기 때문에 절대로 달성될(멈출) 수 없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CsO가 뭐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것 위에 있으며, 벌레처럼 그 위를 기어 다니거나 장님처럼 더듬거리거나 미친 사람처럼, 사막 여행자나 초원의 유목민처럼 달린다. 우리는 바로 그것 위에서 잠들고, 깨어나고, 싸우고, 치고받고, 자리를 찾고, 우리의 놀라운 행복과 우리의 엄청난 전락을 인식하고, 침투하고 침투 당하고, 사랑한다. (같은 책, 287쪽)
CsO가 뭐지? 그것은 내 몸이다. 욕망이며, 우리들이며, 세계 자체다. 그러므로 나는 필요한 것들을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 ‘최소한의 땅뙈기’인 육체가 있고, 이렇게 살아 있고, 설거지나 빨래를 할 줄 알며, CsO를 만들기 위한 방법도 하나 골라잡았다. 그러면? 살면 된다. 모태솔로, 청년백수, 찌질이, 성격파탄, 신체이상자, 조울증환자? 내가 누구든 네가 누구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진짜로 시시한 삶은 자기가 스스로의 욕망으로부터 미끄러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믿는 자의 세계다. 하지만 시시할까봐 도망치고 싶었던 나의 삶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이 이미 충분히 경이로운 세계였음을 보게 된다. 시시함도 근사함도 뛰어넘는 이 충만함을 바란다!
"CsO는 알이다. 그러나 이 알은 퇴행적인 알이 아니다. 오히려 알은 철저하게 [현재와] 동시간적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알을 자신의 실험의 환경으로서, 연합된 환경으로서 안고 있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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