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ㅡ지층 속의 떨림
출구 없는 일상이 반복될 때 당연하지만 우리는 힘들어지거나 무감각해진다. 먹고 TV 보고 옷 사고 노동하고 찌그러져 자고, 그러다 보면 이런 동물적인(?) 일상을 잠시 스톱하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고 싶어지는 날이 가끔 있다. “(도대체 이 꼴로 살고 있는)나는 누구인가?!?” 물론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뭔가 철학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나’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는 순간 사고는 정지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실 답은 질문 속에 이미 존재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고, 여자고, 할 줄 아는 코디는 후드티뿐이고, 어른이고, 주민등록번호 13자리, 무직에, 솔로이고, 통장잔고는 두 자리 수 만 원. 이게 바로 나의 견고한 일상을 받들고 있는 ‘나’다.
너무 쉽게 현실에 굴복하는 게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분명히 나의 찌질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는 인생역전을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와 삽질 끝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내가 발붙인 이 현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_-;) 꿈이야 꿀 수 있지만, 결국 이곳을 떠나서 하는 말들과 생각들은 아무 소용없었고 오히려 그 간극만큼 이리저리 헤매기만 했다. 그렇다면 포기하고 그냥 지금 여기에 안주할 것인가?
지층(Stratum)의 등장
『천 개의 고원』에서 나는 바로 이 존재론적 고민과 마주한다. 견고한 현실과 그로부터 부단히 빠져나가려는 몸짓.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견고함을 ‘지층’(Stratum)이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지층은 원래 지질학적 개념이다. 지구 위에 켜켜이 쌓인 땅의 단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지질학 용어가 철학적 개념으로 탈바꿈할 때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지구라는 판 위에서 흐르는 물질들이 빽빽해지는 현상을 뜻한다. 거칠게 정리하면, 『천 개의 고원』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흐름(flux)과 그 흐름의 멈춤으로 본다. 여기서 늘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하지만 만일 세상 모든 것이 흘러 다니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하고 죄다 흩어질 것이다. 그 흐름들과 입자들을 붙들어 매서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층이다. 그래서 지층은 늘 이중적이다. 지층은 뭔가가 존재할 수 있는 지반인 동시에 자유로운 입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천 개의 고원』, 85쪽)
이 개념은 현실 속에서 곧장 적용가능하다. 깨지지 않는 사고방식, 나의 이동을 통제하는 국가, 일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가족, 학교, 직장……, 버릴 수 없는 나의 ‘몸뚱이’까지도 모두 이 지층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지층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는가? 있다면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도덕의 지질학」인 세 번째 고원의 주 내용이자, 『천 개의 고원』 전체에 깔려 있는 문제의식이며,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논의를 ‘생명’의 차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다. 지구와 몸, 가장 가깝지만 정작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곳이다.
지구에서 몸까지
겉으로 보기에 내 몸은 별 게 없다. 머리 하나, 몸통 하나, 팔 다리 두 개. (大←이 모양) 팔이 날개로 변한다거나 내 얼굴이 이나영으로 바뀔 리는 없으니 내 몸은 확실히 지층인 모양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 보면 ‘한낱 몸’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은 생각처럼 그렇게 단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심지어 홀몸도(!) 아니다. 우선, 내 몸은 무려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글로벌 60억 인구의 만 배!). 그런데 이 동네에서는 세포쯤 되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장에 속한다. 세포 속에 있는 단백질, 핵산, 미토콘드리아 등등 이런 애들마저 화학분자들이 아주 절묘하게 합성될 때만 작동되는 복잡한 기계들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몸속에서 주거하는 미생물들은 어떤가. 무려 1.3kg이나 차지하고 계신다. 미생물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내 몸은 산이나 바다와 같은 하나의 서식지다. 그 위에서 평생 살다가 알을 까고 죽고, 그 사이클이 계속 반복될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고 있으면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과연 내 몸을 지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처음부터 딱딱한 지층으로 나왔을까? 거슬러, 거슬러, 그렇게 계속해서 올라가보면 우리는 결국 어떤 것도 딱딱하게 응고시키지 않는 무한한 흐름과 만날 것 같다.
『천 개의 고원』이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전(前)지구적 스프! 아프로디테가 파도의 거품 속에서 튀어나오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 또한 이 흐름 속에서 건져졌다. 이런 사유는 추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태초의 원시지구를 생각해 보자. 뿌옇고 탁한 대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얼음 혜성에 의해 물과 탄소가 지구로 외삽되었고, 그 이후로 꾸물꾸물 생명체의 기본을 이루는 구성물질들이 합성되기 시작했다. 화학분자들 몇 개가 모여 아미노산이 생기고, 그것들끼리 또 접속하고 합체하면서 그렇게 끊임없이 진화해 갔다. 현재의 지구는 몇 십억 년 동안 미생물들의 부단한 새로운 시도와 아주 우연적으로 발생한 돌연변이들이 이래저래 계속되면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코스모스: 40억 년에 걸친 미생물들의 진화사』, 홍욱희 옮김, 김영사, 2011을 참고하시라!^^) 그렇다면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생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서식지이자 우주적 분자들이 빽빽이 응집되면서 생긴 응고체이다. 생명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컴퓨터의 키보드와 분자적 차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내 몸은 비유가 아닌 진짜 지층이다. 지층은 그냥 처박혀 있는 퇴적물이 아니다. 지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물질들이 오랫동안 축적되고 또 압착되어야 한다. 즉, 지층은 늘 지층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마찬가지다! 나의 팔다리 역시 원래부터 그 모양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지구 바깥에서 날아온 분자들로 구성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유기체의 형태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연합된 환경이 구조화, 구성된 것”(『천 개의 고원』, 107쪽)이라고 표현한다. 원시우주에서 별이 만들어진 것처럼, 원시지구의 스프 속에서 마침내 세포 한 개가 솟아오른 것처럼, 이 단단한 몸 역시 이 환경이 굳어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내 몸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생명’인데 왜 딱딱하게 죽어버린 ‘지층’이라 하느냐! 물론 지층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_-;)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해 보자. 먼저, 지층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층화’ 작용의 산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층화는 늘 영토화와 코드화라는 두 가지 운동과 함께 작동한다. 영토라는 것은 일정한 구역, 쉽게 말해서 ‘나와바리’ 같은 것이다. 코드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규칙인데, 즉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일정한 방식으로만 접속가능하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도덕’이라고도 한다). 코드와 영토는 일대일 대응관계는 아니지만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늘 정해진 영토에 안착하여 특정한 코드를 습득한다. 이것이 바로 지층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지층을 벗어나는 탈지층화의 운동이다. 영토화·코드화는 언제나 탈영토화·탈코드화와 함께간다. 뭔가를 붙잡으면 다른 뭔가는 빠져나가고, 여기와 접속하면 저기서 굴러온 돌이 어깃장을 놓게 되어 있다. 지층이라고 모든 것을 붙잡지는 못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탈-’하는 흐름이 지층화보다 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운동이라고 본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론 중요하다. 지층을 빠져나가는 운동이야말로 나의 이 몸이 숨쉬고 살아 있을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쌀이 기존의 형태로부터 탈영토화하여 내 신체로 재영토화되는 것이다. 공기를 들이쉬어 산소만 가져온 채 이산화탄소는 배출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작용이 없었다면 원시지구의 대기를 떠돌아다니던 화학분자가 지금 내 몸이 될 일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게 지층뿐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에서는 늘 사건이 빵빵 터진다.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인데, ‘지층만 있는 세계’에서는 운동이 불가능하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얼굴이 변하고, 세포가 늙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내 몸은 지구로 다시 탈영토화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 지층 속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탈지층화하는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이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
물론, 현실에서 나를 딱딱하게 가두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여타 동물들과 다르게 ‘문화’라고 부르는 영역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신체의 지층뿐만 아니라 문화의 지층도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예시는 많다. 학교, 가족, 직장, 국가, 성별……. 이 문화적 지층에서 나를 규정해 주는 그 온갖 이름표들이 태어나게 된다. (언어가 인간만의 특이성이라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그 또한 지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 지층화된다.
이 두 번의 지층화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문화, 환경-유기체, 자연-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돌파해 내기 위해서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이라는 새로운 무기[개념]을 데려온다(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해볼까 한다^^). 살짝 프롤로그만 깔아 본다면, 신체의 지층뿐만 아니라 문화적 지층에서도 역시 도주가 늘 일차적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변화가 생긴다. 어느 층위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몸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내 몸은 지층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몸은 손, 발, 머리, 다리, 가슴 등등으로 견고하게 나뉘어 있으며,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그러나 또한 몸은 늘 유기체의 지층을 벗어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이 아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몸은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고, 여자이고, 백수다. 그러나 나는 또한 별이자 땅이기도 하다. 니체는 인간을 지구 위의 뾰루지라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적확한 비유일지 모른다. 내 몸은 지구 위의 뾰루지다. 하지만 그것은 종양처럼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지구로 돌아가서 새롭게 될 무엇이다. 내 몸이 다양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바로 그 좁은 시선이 바로 내 몸을 지층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층 속에 묻혀 있지만 그 안에는 또한 떨림이 존재한다. “생명은 비유기적일 때 더욱 강렬하고 더 강력한 법이다.”(같은 책, 959쪽)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흐름들이 한곳에 모여 어쩌다가 나를 태어나게 했고, 다시 그 흐름이 흩어질 때 나는 죽을 것이다. 죽음은 무無화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몸이라는 지층에 갇혀 있던 입자들이 다시 지구를 향해 흩어지게 되는 문턱일 뿐이다. 내 몸 속 분자들은 무사히(?) 달아날 것이다. 이는 ‘나’라는 개체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인간’ 종 전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종의 99.99퍼센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마이크로코스모스』, 85쪽)다고 하니, 인간 역시 반드시 멸종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참 낯선 사실들이 내게 새로운 사유를 하게 한다. 삶과 죽음, 권태나 희열을 가르는 것은 무의미한 게 아닐까? 결국 생명에게는 ‘떨림’만 있는 게 아닐까? 지구 위에서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삶이라는 말이 쉽게 진부해지는 까닭은 오직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에만 이 말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일상은 쉽게 삶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내가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전지구적, 전우주적 차원으로 사유할 수 있다면 삶이 아주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우리는 어떻게 일상을 바꿀 수 있을까? 지층 ‘속’에서만 고민해서는 당연히 출구가 없을 것이다. 현실을 떠나지 않되 시선을 더 넓고 깊게 확장시켰을 때야 뭔가가 나올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굳이 ‘지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삶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해해 보고 또 돌파해 보려는 시도. 이 우주에는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탈코드화가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이 힘을 느낄 수만 있다면 일상이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철학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일상을 떠나지 않은 채 그 ‘너머’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지층 속 떨림을 찾아서~
ㅡ지층 속의 떨림
김해완(남산강학원 Q&?)
출구 없는 일상이 반복될 때 당연하지만 우리는 힘들어지거나 무감각해진다. 먹고 TV 보고 옷 사고 노동하고 찌그러져 자고, 그러다 보면 이런 동물적인(?) 일상을 잠시 스톱하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고 싶어지는 날이 가끔 있다. “(도대체 이 꼴로 살고 있는)나는 누구인가?!?” 물론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뭔가 철학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나’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는 순간 사고는 정지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실 답은 질문 속에 이미 존재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고, 여자고, 할 줄 아는 코디는 후드티뿐이고, 어른이고, 주민등록번호 13자리, 무직에, 솔로이고, 통장잔고는 두 자리 수 만 원. 이게 바로 나의 견고한 일상을 받들고 있는 ‘나’다.
너무 쉽게 현실에 굴복하는 게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분명히 나의 찌질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는 인생역전을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와 삽질 끝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내가 발붙인 이 현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_-;) 꿈이야 꿀 수 있지만, 결국 이곳을 떠나서 하는 말들과 생각들은 아무 소용없었고 오히려 그 간극만큼 이리저리 헤매기만 했다. 그렇다면 포기하고 그냥 지금 여기에 안주할 것인가?
지층(Stratum)의 등장
『천 개의 고원』에서 나는 바로 이 존재론적 고민과 마주한다. 견고한 현실과 그로부터 부단히 빠져나가려는 몸짓.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견고함을 ‘지층’(Stratum)이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지층은 원래 지질학적 개념이다. 지구 위에 켜켜이 쌓인 땅의 단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지질학 용어가 철학적 개념으로 탈바꿈할 때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지구라는 판 위에서 흐르는 물질들이 빽빽해지는 현상을 뜻한다. 거칠게 정리하면, 『천 개의 고원』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흐름(flux)과 그 흐름의 멈춤으로 본다. 여기서 늘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하지만 만일 세상 모든 것이 흘러 다니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하고 죄다 흩어질 것이다. 그 흐름들과 입자들을 붙들어 매서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층이다. 그래서 지층은 늘 이중적이다. 지층은 뭔가가 존재할 수 있는 지반인 동시에 자유로운 입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천 개의 고원』, 85쪽)
이 개념은 현실 속에서 곧장 적용가능하다. 깨지지 않는 사고방식, 나의 이동을 통제하는 국가, 일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가족, 학교, 직장……, 버릴 수 없는 나의 ‘몸뚱이’까지도 모두 이 지층인 셈이다.
막스 에른스트, <스코틀랜드 땅>
그렇다면 지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지층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는가? 있다면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도덕의 지질학」인 세 번째 고원의 주 내용이자, 『천 개의 고원』 전체에 깔려 있는 문제의식이며,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논의를 ‘생명’의 차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다. 지구와 몸, 가장 가깝지만 정작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곳이다.
지구에서 몸까지
겉으로 보기에 내 몸은 별 게 없다. 머리 하나, 몸통 하나, 팔 다리 두 개. (大←이 모양) 팔이 날개로 변한다거나 내 얼굴이 이나영으로 바뀔 리는 없으니 내 몸은 확실히 지층인 모양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 보면 ‘한낱 몸’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은 생각처럼 그렇게 단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심지어 홀몸도(!) 아니다. 우선, 내 몸은 무려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글로벌 60억 인구의 만 배!). 그런데 이 동네에서는 세포쯤 되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장에 속한다. 세포 속에 있는 단백질, 핵산, 미토콘드리아 등등 이런 애들마저 화학분자들이 아주 절묘하게 합성될 때만 작동되는 복잡한 기계들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몸속에서 주거하는 미생물들은 어떤가. 무려 1.3kg이나 차지하고 계신다. 미생물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내 몸은 산이나 바다와 같은 하나의 서식지다. 그 위에서 평생 살다가 알을 까고 죽고, 그 사이클이 계속 반복될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고 있으면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과연 내 몸을 지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처음부터 딱딱한 지층으로 나왔을까? 거슬러, 거슬러, 그렇게 계속해서 올라가보면 우리는 결국 어떤 것도 딱딱하게 응고시키지 않는 무한한 흐름과 만날 것 같다.
『천 개의 고원』이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전(前)지구적 스프! 아프로디테가 파도의 거품 속에서 튀어나오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 또한 이 흐름 속에서 건져졌다. 이런 사유는 추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태초의 원시지구를 생각해 보자. 뿌옇고 탁한 대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얼음 혜성에 의해 물과 탄소가 지구로 외삽되었고, 그 이후로 꾸물꾸물 생명체의 기본을 이루는 구성물질들이 합성되기 시작했다. 화학분자들 몇 개가 모여 아미노산이 생기고, 그것들끼리 또 접속하고 합체하면서 그렇게 끊임없이 진화해 갔다. 현재의 지구는 몇 십억 년 동안 미생물들의 부단한 새로운 시도와 아주 우연적으로 발생한 돌연변이들이 이래저래 계속되면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코스모스: 40억 년에 걸친 미생물들의 진화사』, 홍욱희 옮김, 김영사, 2011을 참고하시라!^^) 그렇다면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생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서식지이자 우주적 분자들이 빽빽이 응집되면서 생긴 응고체이다. 생명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컴퓨터의 키보드와 분자적 차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내 몸은 비유가 아닌 진짜 지층이다. 지층은 그냥 처박혀 있는 퇴적물이 아니다. 지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물질들이 오랫동안 축적되고 또 압착되어야 한다. 즉, 지층은 늘 지층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마찬가지다! 나의 팔다리 역시 원래부터 그 모양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지구 바깥에서 날아온 분자들로 구성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유기체의 형태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연합된 환경이 구조화, 구성된 것”(『천 개의 고원』, 107쪽)이라고 표현한다. 원시우주에서 별이 만들어진 것처럼, 원시지구의 스프 속에서 마침내 세포 한 개가 솟아오른 것처럼, 이 단단한 몸 역시 이 환경이 굳어진 것이다.
지층들은 항상 잔여물이지 그 역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것이 지층들로부터 나오는지를 묻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사물들이 거기에 들어가는지를 물어야 한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115~116쪽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내 몸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생명’인데 왜 딱딱하게 죽어버린 ‘지층’이라 하느냐! 물론 지층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_-;)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해 보자. 먼저, 지층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층화’ 작용의 산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층화는 늘 영토화와 코드화라는 두 가지 운동과 함께 작동한다. 영토라는 것은 일정한 구역, 쉽게 말해서 ‘나와바리’ 같은 것이다. 코드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규칙인데, 즉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일정한 방식으로만 접속가능하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도덕’이라고도 한다). 코드와 영토는 일대일 대응관계는 아니지만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늘 정해진 영토에 안착하여 특정한 코드를 습득한다. 이것이 바로 지층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지층을 벗어나는 탈지층화의 운동이다. 영토화·코드화는 언제나 탈영토화·탈코드화와 함께간다. 뭔가를 붙잡으면 다른 뭔가는 빠져나가고, 여기와 접속하면 저기서 굴러온 돌이 어깃장을 놓게 되어 있다. 지층이라고 모든 것을 붙잡지는 못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탈-’하는 흐름이 지층화보다 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운동이라고 본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론 중요하다. 지층을 빠져나가는 운동이야말로 나의 이 몸이 숨쉬고 살아 있을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쌀이 기존의 형태로부터 탈영토화하여 내 신체로 재영토화되는 것이다. 공기를 들이쉬어 산소만 가져온 채 이산화탄소는 배출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작용이 없었다면 원시지구의 대기를 떠돌아다니던 화학분자가 지금 내 몸이 될 일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게 지층뿐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에서는 늘 사건이 빵빵 터진다.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인데, ‘지층만 있는 세계’에서는 운동이 불가능하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얼굴이 변하고, 세포가 늙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내 몸은 지구로 다시 탈영토화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 지층 속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탈지층화하는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이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
물론, 현실에서 나를 딱딱하게 가두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여타 동물들과 다르게 ‘문화’라고 부르는 영역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신체의 지층뿐만 아니라 문화의 지층도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예시는 많다. 학교, 가족, 직장, 국가, 성별……. 이 문화적 지층에서 나를 규정해 주는 그 온갖 이름표들이 태어나게 된다. (언어가 인간만의 특이성이라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그 또한 지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 지층화된다.
학교, 직장, 국가……. '나'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지층화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문화, 환경-유기체, 자연-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돌파해 내기 위해서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이라는 새로운 무기[개념]을 데려온다(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해볼까 한다^^). 살짝 프롤로그만 깔아 본다면, 신체의 지층뿐만 아니라 문화적 지층에서도 역시 도주가 늘 일차적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변화가 생긴다. 어느 층위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측면에서 볼 때 동물은 공격하는 자라기보다는 달아나는 자이다. 하지만 그 도주는 또한 정복이고 창조이다. 따라서 도주선들은 영토성 안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들이 현존함을 증언해 주면서 영토성을 완전히 가로질러 간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영토성은 이차적이다. 영토성은 자신을 이용하는 저 운동들 없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113쪽
몸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내 몸은 지층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몸은 손, 발, 머리, 다리, 가슴 등등으로 견고하게 나뉘어 있으며,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그러나 또한 몸은 늘 유기체의 지층을 벗어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이 아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몸은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고, 여자이고, 백수다. 그러나 나는 또한 별이자 땅이기도 하다. 니체는 인간을 지구 위의 뾰루지라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적확한 비유일지 모른다. 내 몸은 지구 위의 뾰루지다. 하지만 그것은 종양처럼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지구로 돌아가서 새롭게 될 무엇이다. 내 몸이 다양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바로 그 좁은 시선이 바로 내 몸을 지층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층 속에 묻혀 있지만 그 안에는 또한 떨림이 존재한다. “생명은 비유기적일 때 더욱 강렬하고 더 강력한 법이다.”(같은 책, 959쪽)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흐름들이 한곳에 모여 어쩌다가 나를 태어나게 했고, 다시 그 흐름이 흩어질 때 나는 죽을 것이다. 죽음은 무無화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몸이라는 지층에 갇혀 있던 입자들이 다시 지구를 향해 흩어지게 되는 문턱일 뿐이다. 내 몸 속 분자들은 무사히(?) 달아날 것이다. 이는 ‘나’라는 개체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인간’ 종 전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종의 99.99퍼센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마이크로코스모스』, 85쪽)다고 하니, 인간 역시 반드시 멸종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참 낯선 사실들이 내게 새로운 사유를 하게 한다. 삶과 죽음, 권태나 희열을 가르는 것은 무의미한 게 아닐까? 결국 생명에게는 ‘떨림’만 있는 게 아닐까? 지구 위에서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애니메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의 한 장면.
삶이라는 말이 쉽게 진부해지는 까닭은 오직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에만 이 말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일상은 쉽게 삶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내가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전지구적, 전우주적 차원으로 사유할 수 있다면 삶이 아주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우리는 어떻게 일상을 바꿀 수 있을까? 지층 ‘속’에서만 고민해서는 당연히 출구가 없을 것이다. 현실을 떠나지 않되 시선을 더 넓고 깊게 확장시켰을 때야 뭔가가 나올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굳이 ‘지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삶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해해 보고 또 돌파해 보려는 시도. 이 우주에는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탈코드화가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이 힘을 느낄 수만 있다면 일상이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철학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일상을 떠나지 않은 채 그 ‘너머’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지층 속 떨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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