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닐 것
- 지층을 탈출하는 섬세한 전략 -
이번 글은 지난 글의 후속편이다. 저번 글에서 우리는 ‘지층’(Stratum)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내 몸과 지구의 관계, 그리고 나를 사유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낯간지러울 만큼 진부한 질문에 지구는 성심성의껏 답을 해준다. 내 몸은 지구의 분자들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지층이고, 그렇기에 나는 오롯이 나일 수 없다고. 폭풍감동이다.(ㅠㅠ) 역시 우주적 스케일은 다른 것인지, 갑자기 내 사소한 일상들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느껴지면서 저 광활한 대우주와 합일하고픈 의지가 불타오른다. 알지도 못하는 루소 아저씨의 말씀이라도 (“자연으로 돌아가, 이 녀석아!”) 가슴에 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인간의 특권 혹은 번뇌
하지만 집 밖으로 뛰쳐나가 보면 있는 것은 우거진 숲속이 아니라 차들이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도시다. 길거리에서 친구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영화관에서 액션영화를 보는 등 문명의 이기를 실컷 즐기고 나면, 우주와의 합일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싹 지워지고 우리는 다시금 우리가 정말 다른 동·식물들과 ‘같은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문화도 언어도 가지지 못한 말 못하는 짐승들은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한다. 정글에서 진흙과 뒹굴며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문명생활이 더 낫지 않은가? 인간우월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는 있지만, 머릿속에 깊게 뿌리박힌 이 고정관념은 당최 뽑힐 생각을 안 한다.(-_-;;)
이 고정관념은 나를 우월하게 만들기는커녕 거꾸로 언어의 지층에 가둬 버린다. 만일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를 이룩하는 것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나는 도무지 내가 걸치고 있는 이름표들을 떼어낼 방법이 없게 된다. 여자, 어른, 황인종, 백수, 이것들은 전부 인간-지층의 고유한 산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즉, 출구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일상에서 힘들어하는 나의 번뇌는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지층일 뿐이고, 그렇기에 특권이라 부르든 번뇌라 부르든 결국엔 하나의 얼굴을 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내 몸을 지층으로 설명했던 지난 글에서 한 스텝 더 나아가, 인간이 과연 어떤 지층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래야지만 지층을 어떻게 떠날 수 있는지 섬세한 전략 또한 짤 수 있다. 무턱대고 탈출했다간 실패할 확률은 99%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무기가 필요한데, 바로 ‘이중분절’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B-A, BA, 두 번 분절하라.”(『천 개의 고원』, 87쪽) 『천 개의 고원』에서도 골치 아프기로 소문난 이 개념을 뚫고 나가 보자!
내용과 표현 - 중앙제어시스템은 없다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 범상치 않은 이름이지만 파고들어 보면 이 녀석도 별 거 없다. 한번 말 그대로 풀어보자. ‘분절’(分節)이라는 말은 꺾임이란 뜻이다. 나의 손가락 발가락 마디, 방문에 달린 경첩, 의자다리 받침대, 그 외에 모서리와 각을 가진 물체들 모두가 ‘분절된’ 것들이다. 성층작용(=지층화)은 바로 이 분절과 다름 아니다. 고정되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치는 불안정한 흐름을 규칙에 따라 끊어내야 지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절은 항상 두 번 이루어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각각의 분절을 ‘내용’과 ‘표현’이라고 말한다. 내용이란 불안정하게 떠돌아다니는 흐름에서 질료를 뽑아내 일정한 단위를 만드는 것이고, 표현이란 그 단위들을 바탕으로 밀집된 기능적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하게 “아하~ 내용이 실체이고 표현이 형식이구나~”라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렵지도 않았다ㅠㅠ) 이게 이중분절의 핵심인데, 내용과 표현은 결코 쌍쌍개념이 아니다. 이 둘은 각각 독자적인 실체와 형식을 가진다. 생각해 보라. 분자적 단위를 찍어낼 때도 ‘통계학적 질서’는 필요하며, 기능적 구조를 추구할 때도 ‘현실화되는 최종 구조물’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내용과 표현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환원될 수는 없다. 이게 대체 왜 중요하냐고?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깨부술 무기이기 때문이다. 형식이 내용의 의미를 표현해 준다느니, 형식 밑에 숨겨져 있는 내용에서 진짜 의도를 찾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틀렸다.(-_-;)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유명한 이분법을 추방해 버린다. 내용-형식, 하부구조-상부구조, 기의-기표, 무의식-의식, 사물-말……. 이 정도면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분절이 얼마나 ‘쎈’ 개념인지 짐작이 되시리라.
벌써부터 이 글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ㅋ) 어렵군 어려워…….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무런 배경도 없이 막무가내로, 혹은 그냥 우리를 괴롭히려고 이렇게 이상한 개념을 뿅 상상해냈을 리는 없다. 개념이란 더 이상 기존의 언어로는 세계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태어나는 ‘New’언어이니, 여기에도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힘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잠시 내 몸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내가 이렇게 숨 쉬고 밥 먹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단백질들이 열심히 합성하면서 대사(代謝)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대사작용에는 수천 가지의 화학적 반응들이 필요한데, 충격적이게도 이 반응들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효소 하나하나의 차원에서 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합성하느냐 마느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 수천 가지를 모아놓고 전체 유기체의 차원에서는 놀랄 만큼 가지런한 질서를 띠며 정교한 기계처럼 “통합된 기능적 통일체”(=몸)를 표현한다. “무근거성이라는 근본적인 개념, 즉 어떤 화학적 신호가 수행하는 기능과 이 기능을 통제하는 화학적 신호의 본성 사이에는 화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자크 모노,『우연과 필연』, 궁리, 115쪽) 내용과 표현을 그대로 보여 주는 멋진 예시다. 내용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내용대로 작동하는데, 다른 층위(표현)로 건너뛰었을 때 갑자기 다른 질서가 나타나게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단백질들의 철저한 기계적 작동은 다만 내 몸이 수십 만 년의 세월 동안 반복을 통하여 지층이 되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렇다면 내 몸은 이미 ‘표현된’ 것이다. 표현이란 인간이 행하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돌멩이라고 표현할 줄 모르는 게 아니다!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층의 표현이므로, 따라서 지구상에 ‘표현하지 않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내용과 표현의 짝짓기가 너무나 정교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치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층화를 ‘신神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신앙심이 돈독한 것은 아니다.(^^) 왜? 이중분절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내용과 표현을 짝짓게 하는 것은 오직 ‘무근거성’뿐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 나의 불면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되는 것도, 나의 발언이 명예훼손이 되는 것도, 나의 나이가 푸른 꿈을 키워야 할 청소년에 매이는 것도, 나의 미소가 1시간에 4580원짜리 노동력이 되는 것에도 모두 다 근거가 없다. “그야말로 완전히 맹목적인 우연의 놀이로부터 모든 것이 다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우연과 필연』, 144쪽)
한마디로 세상 어디에도 ‘중앙제어시스템’이란 없다. 지구는 “끊임없이 그 심판을 벗어버리고 달아나고 탈지층화되고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되”(『천 개의 고원』, 86쪽)는 곳이다. 내용과 표현의 이중분절은 지층화의 현실인 동시에 탈지층화의 잠재성이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를 전제하긴 하지만, 이 둘의 다른 조직화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또한 앞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중앙시스템이 잘 갖춰지고 처음부터 대의명분이 세워진 조직화에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늘 표현의 실체이기에, 우리는 그게 바로 불변하는 구조라고 믿는다. 그러나 “구조가 지구의 마지막 말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같은 책, 88쪽) 역사적으로 혁명이 폭발한 것은 언제나 하잘것없는 소동부터였다. 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곳에 서있을 때가 허다하고, 현실은 언제나 예상했던 익숙한 결과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이 미끄러지는 힘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의 심판을 성립시키는 것은 세계를 불변하다고 바라보는 자들,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이다.
손-도구와 입-기호
인간도 이중분절된다. 돌멩이도 이중분절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으로 지구부터 인간까지, 암석에서 문자(文字)까지 한 큐에 꿴다. 세상 모든 것은 흐름 위 지층이고 지층은 언제나 내용과 표현으로 이중분절 된다는 것. 정말이지, 모든 중생(衆生)들을 존재론적 평등으로 바라보는 이 탁월한 시선은 너무 멋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이중분절 되는 것일까? 『천 개의 고원』은 이중분절되는 양상에 따라 지층군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지질학적 지층, 유기체적 지층, 인간형태의 지층) 그런데 이것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 지층이 얼마만큼의 ‘탈영토화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내용과 표현의 관계가 느슨해질수록, 즉 표현이 내용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할수록 지층에서 벗어나는 선들이 많아지게 된다.
인간사회는 세번째 지층군이다. 내용은 기술/도구, 표현은 기호/언어이다. 그런데 이 지층이 다른 지층과 다른 점은, 표현의 자율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것이다! 언어를 생각해 보라. “이 지층에 완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을 세워 올려 자신의 집게발을 다른 모든 지층들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뻗는”(같은 책, 127쪽) 언어. “열리는 것은……탈영토화의 거대한 문턱이다.”(같은 책, 123쪽) 이제야 답이 좀 풀린다. 언어와 문화는 인간의 본질로서 특권화될 무엇이 아니다. 인간-지층은 다른 지층에 비해 ‘잉여’를 많이 가지고 있고, 언어와 기술은 이 ‘잉여충만한’ 지층이 새롭게 분배한 이중분절인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가진 이 엄청난 자율성에 놀란 나머지 마치 그것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망상금지! 언어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 택한 존재방식이라는 점에서만 유일무이할 뿐이다. 손-도구와 입-기호를 가진 동물. 인간이라는 종은 탈영토화할 수 있는 엄청난 역량의 소유자다. 즉, 가장 딴 짓(뻘짓)을 하는 생물이란 뜻이다. (-_-;)
그러니 착각하지 말 것. 세상은 인간의 언어적/문화적 지층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우리는 지식(언어)을 통해 세계를 전부 붙잡을 수 없다. 거꾸로 문화나 관념이 아무런 쓸모없는 쓰레기폐기물인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속해 있는 지층뿐인 것이다!
이상해도 고독하진 않은 동물
들뢰즈와 가타리가 모노의 생각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기술적 배치와 기호적 배치를 구분하여 살고 있고, 또 언어가 세계를 다 말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절대로 처음부터 특별하게 태어난 게 아니었다.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정말로 이상한 동물이다. 손은 과거의 앞발이 탈영토화된 것이다. 땅 위를 빠르게 달리고 먹이를 낚아채던 그 발이 도구와 만나면서 가늘어지고, 길어지고, 섬세해졌다. 입은 ‘아가리’의 탈영토화이다. 원래 입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나지막한 말이 아닌 음식물과 울음소리였다. 앞으로 이런 변형이 계속되면 지금까지 99.9%의 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엔 ‘인간’이라는 종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인간이 정말로 지구 위의 뾰루지라면, 지구를 향해 열릴 수 있다면 고독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우리가 지층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지층이 너무 견고해서가 아니라 탈영토화 해놓고는 언제나 지층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정쩡한 자연주의나 환원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파고들어야 하고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배치를 알아채고 또 변형시켜야 한다. 그래서 뭘 할 수 있겠냐고? 그 실천이 미약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나 자신’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이 몸짓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지층으로 회귀하지 않는 절대적 탈영토화는 이 끊임없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중심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이니, 인간으로서 어때야 하느니 등등의 말들은 쉽게 헛돌아 버린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우월감이나 열등감과는 관계없다. 그것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견고한 한계이자 지층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인간-지층 속에서가 아니라 내가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탈지층적?!) 사건에 부딪혔을 때다. 내 속에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는 어떤 인간.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다른 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정말로 가슴이 벅차오르게 하는 것은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확신이 아닐까! 위대한 인간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인간이 되고 싶다. 그것이 진심으로 내 마음에 느껴지는 날,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서 탈주할 수 있으리라.
- 지층을 탈출하는 섬세한 전략 -
김해완(남산강학원 Q&?)
이번 글은 지난 글의 후속편이다. 저번 글에서 우리는 ‘지층’(Stratum)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내 몸과 지구의 관계, 그리고 나를 사유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낯간지러울 만큼 진부한 질문에 지구는 성심성의껏 답을 해준다. 내 몸은 지구의 분자들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지층이고, 그렇기에 나는 오롯이 나일 수 없다고. 폭풍감동이다.(ㅠㅠ) 역시 우주적 스케일은 다른 것인지, 갑자기 내 사소한 일상들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느껴지면서 저 광활한 대우주와 합일하고픈 의지가 불타오른다. 알지도 못하는 루소 아저씨의 말씀이라도 (“자연으로 돌아가, 이 녀석아!”) 가슴에 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인간의 특권 혹은 번뇌
하지만 집 밖으로 뛰쳐나가 보면 있는 것은 우거진 숲속이 아니라 차들이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도시다. 길거리에서 친구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영화관에서 액션영화를 보는 등 문명의 이기를 실컷 즐기고 나면, 우주와의 합일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싹 지워지고 우리는 다시금 우리가 정말 다른 동·식물들과 ‘같은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문화도 언어도 가지지 못한 말 못하는 짐승들은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한다. 정글에서 진흙과 뒹굴며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문명생활이 더 낫지 않은가? 인간우월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는 있지만, 머릿속에 깊게 뿌리박힌 이 고정관념은 당최 뽑힐 생각을 안 한다.(-_-;;)
이 고정관념은 나를 우월하게 만들기는커녕 거꾸로 언어의 지층에 가둬 버린다. 만일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를 이룩하는 것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나는 도무지 내가 걸치고 있는 이름표들을 떼어낼 방법이 없게 된다. 여자, 어른, 황인종, 백수, 이것들은 전부 인간-지층의 고유한 산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즉, 출구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일상에서 힘들어하는 나의 번뇌는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지층일 뿐이고, 그렇기에 특권이라 부르든 번뇌라 부르든 결국엔 하나의 얼굴을 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내 몸을 지층으로 설명했던 지난 글에서 한 스텝 더 나아가, 인간이 과연 어떤 지층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래야지만 지층을 어떻게 떠날 수 있는지 섬세한 전략 또한 짤 수 있다. 무턱대고 탈출했다간 실패할 확률은 99%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무기가 필요한데, 바로 ‘이중분절’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B-A, BA, 두 번 분절하라.”(『천 개의 고원』, 87쪽) 『천 개의 고원』에서도 골치 아프기로 소문난 이 개념을 뚫고 나가 보자!
내용과 표현 - 중앙제어시스템은 없다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 범상치 않은 이름이지만 파고들어 보면 이 녀석도 별 거 없다. 한번 말 그대로 풀어보자. ‘분절’(分節)이라는 말은 꺾임이란 뜻이다. 나의 손가락 발가락 마디, 방문에 달린 경첩, 의자다리 받침대, 그 외에 모서리와 각을 가진 물체들 모두가 ‘분절된’ 것들이다. 성층작용(=지층화)은 바로 이 분절과 다름 아니다. 고정되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치는 불안정한 흐름을 규칙에 따라 끊어내야 지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절은 항상 두 번 이루어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각각의 분절을 ‘내용’과 ‘표현’이라고 말한다. 내용이란 불안정하게 떠돌아다니는 흐름에서 질료를 뽑아내 일정한 단위를 만드는 것이고, 표현이란 그 단위들을 바탕으로 밀집된 기능적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하게 “아하~ 내용이 실체이고 표현이 형식이구나~”라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렵지도 않았다ㅠㅠ) 이게 이중분절의 핵심인데, 내용과 표현은 결코 쌍쌍개념이 아니다. 이 둘은 각각 독자적인 실체와 형식을 가진다. 생각해 보라. 분자적 단위를 찍어낼 때도 ‘통계학적 질서’는 필요하며, 기능적 구조를 추구할 때도 ‘현실화되는 최종 구조물’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내용과 표현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환원될 수는 없다. 이게 대체 왜 중요하냐고?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깨부술 무기이기 때문이다. 형식이 내용의 의미를 표현해 준다느니, 형식 밑에 숨겨져 있는 내용에서 진짜 의도를 찾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틀렸다.(-_-;)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유명한 이분법을 추방해 버린다. 내용-형식, 하부구조-상부구조, 기의-기표, 무의식-의식, 사물-말……. 이 정도면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분절이 얼마나 ‘쎈’ 개념인지 짐작이 되시리라.
벌써부터 이 글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ㅋ) 어렵군 어려워…….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무런 배경도 없이 막무가내로, 혹은 그냥 우리를 괴롭히려고 이렇게 이상한 개념을 뿅 상상해냈을 리는 없다. 개념이란 더 이상 기존의 언어로는 세계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태어나는 ‘New’언어이니, 여기에도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힘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잠시 내 몸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내가 이렇게 숨 쉬고 밥 먹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단백질들이 열심히 합성하면서 대사(代謝)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대사작용에는 수천 가지의 화학적 반응들이 필요한데, 충격적이게도 이 반응들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효소 하나하나의 차원에서 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합성하느냐 마느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 수천 가지를 모아놓고 전체 유기체의 차원에서는 놀랄 만큼 가지런한 질서를 띠며 정교한 기계처럼 “통합된 기능적 통일체”(=몸)를 표현한다. “무근거성이라는 근본적인 개념, 즉 어떤 화학적 신호가 수행하는 기능과 이 기능을 통제하는 화학적 신호의 본성 사이에는 화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자크 모노,『우연과 필연』, 궁리, 115쪽) 내용과 표현을 그대로 보여 주는 멋진 예시다. 내용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내용대로 작동하는데, 다른 층위(표현)로 건너뛰었을 때 갑자기 다른 질서가 나타나게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단백질들의 철저한 기계적 작동은 다만 내 몸이 수십 만 년의 세월 동안 반복을 통하여 지층이 되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우리는 한 지층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95쪽
그렇다면 내 몸은 이미 ‘표현된’ 것이다. 표현이란 인간이 행하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돌멩이라고 표현할 줄 모르는 게 아니다!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층의 표현이므로, 따라서 지구상에 ‘표현하지 않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 모든 지층은 신의 심판이기 때문에 동무로가 식물, 서양란과 말벌뿐 아니라 바위나 심지어 강 그리고 지구에서 지층화된 모든 것이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표현한다. (『천 개의 고원』, 93쪽)
이 내용과 표현의 짝짓기가 너무나 정교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치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층화를 ‘신神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신앙심이 돈독한 것은 아니다.(^^) 왜? 이중분절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내용과 표현을 짝짓게 하는 것은 오직 ‘무근거성’뿐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 나의 불면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되는 것도, 나의 발언이 명예훼손이 되는 것도, 나의 나이가 푸른 꿈을 키워야 할 청소년에 매이는 것도, 나의 미소가 1시간에 4580원짜리 노동력이 되는 것에도 모두 다 근거가 없다. “그야말로 완전히 맹목적인 우연의 놀이로부터 모든 것이 다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우연과 필연』, 144쪽)
한마디로 세상 어디에도 ‘중앙제어시스템’이란 없다. 지구는 “끊임없이 그 심판을 벗어버리고 달아나고 탈지층화되고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되”(『천 개의 고원』, 86쪽)는 곳이다. 내용과 표현의 이중분절은 지층화의 현실인 동시에 탈지층화의 잠재성이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를 전제하긴 하지만, 이 둘의 다른 조직화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또한 앞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중앙시스템이 잘 갖춰지고 처음부터 대의명분이 세워진 조직화에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늘 표현의 실체이기에, 우리는 그게 바로 불변하는 구조라고 믿는다. 그러나 “구조가 지구의 마지막 말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같은 책, 88쪽) 역사적으로 혁명이 폭발한 것은 언제나 하잘것없는 소동부터였다. 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곳에 서있을 때가 허다하고, 현실은 언제나 예상했던 익숙한 결과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이 미끄러지는 힘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의 심판을 성립시키는 것은 세계를 불변하다고 바라보는 자들,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이다.
손-도구와 입-기호
인간도 이중분절된다. 돌멩이도 이중분절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으로 지구부터 인간까지, 암석에서 문자(文字)까지 한 큐에 꿴다. 세상 모든 것은 흐름 위 지층이고 지층은 언제나 내용과 표현으로 이중분절 된다는 것. 정말이지, 모든 중생(衆生)들을 존재론적 평등으로 바라보는 이 탁월한 시선은 너무 멋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이중분절 되는 것일까? 『천 개의 고원』은 이중분절되는 양상에 따라 지층군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지질학적 지층, 유기체적 지층, 인간형태의 지층) 그런데 이것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 지층이 얼마만큼의 ‘탈영토화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내용과 표현의 관계가 느슨해질수록, 즉 표현이 내용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할수록 지층에서 벗어나는 선들이 많아지게 된다.
"물고기는 왜 그렇게 목이 마른거니?" "나도 몰라. 난 물고기가 아니라구!"
인간사회는 세번째 지층군이다. 내용은 기술/도구, 표현은 기호/언어이다. 그런데 이 지층이 다른 지층과 다른 점은, 표현의 자율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것이다! 언어를 생각해 보라. “이 지층에 완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을 세워 올려 자신의 집게발을 다른 모든 지층들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뻗는”(같은 책, 127쪽) 언어. “열리는 것은……탈영토화의 거대한 문턱이다.”(같은 책, 123쪽) 이제야 답이 좀 풀린다. 언어와 문화는 인간의 본질로서 특권화될 무엇이 아니다. 인간-지층은 다른 지층에 비해 ‘잉여’를 많이 가지고 있고, 언어와 기술은 이 ‘잉여충만한’ 지층이 새롭게 분배한 이중분절인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가진 이 엄청난 자율성에 놀란 나머지 마치 그것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망상금지! 언어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 택한 존재방식이라는 점에서만 유일무이할 뿐이다. 손-도구와 입-기호를 가진 동물. 인간이라는 종은 탈영토화할 수 있는 엄청난 역량의 소유자다. 즉, 가장 딴 짓(뻘짓)을 하는 생물이란 뜻이다. (-_-;)
그러니 착각하지 말 것. 세상은 인간의 언어적/문화적 지층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우리는 지식(언어)을 통해 세계를 전부 붙잡을 수 없다. 거꾸로 문화나 관념이 아무런 쓸모없는 쓰레기폐기물인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속해 있는 지층뿐인 것이다!
우리는 의미화하지도 의미화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층화된다. (같은 책, 134쪽)
이상해도 고독하진 않은 동물
인간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자신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마치 집시처럼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명계와 관념(사상)들의 왕국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존재이며, 가슴을 찢어 놓는 이러한 이원론에 의해 고통 받는 동시에 풍요로워지는 존재……다. (『우연과 필연』, 245~255쪽)
들뢰즈와 가타리가 모노의 생각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기술적 배치와 기호적 배치를 구분하여 살고 있고, 또 언어가 세계를 다 말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절대로 처음부터 특별하게 태어난 게 아니었다.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정말로 이상한 동물이다. 손은 과거의 앞발이 탈영토화된 것이다. 땅 위를 빠르게 달리고 먹이를 낚아채던 그 발이 도구와 만나면서 가늘어지고, 길어지고, 섬세해졌다. 입은 ‘아가리’의 탈영토화이다. 원래 입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나지막한 말이 아닌 음식물과 울음소리였다. 앞으로 이런 변형이 계속되면 지금까지 99.9%의 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엔 ‘인간’이라는 종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인간이 정말로 지구 위의 뾰루지라면, 지구를 향해 열릴 수 있다면 고독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우리가 지층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지층이 너무 견고해서가 아니라 탈영토화 해놓고는 언제나 지층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정쩡한 자연주의나 환원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파고들어야 하고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배치를 알아채고 또 변형시켜야 한다. 그래서 뭘 할 수 있겠냐고? 그 실천이 미약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나 자신’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이 몸짓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지층으로 회귀하지 않는 절대적 탈영토화는 이 끊임없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탈영토화를 완전히 긍정적인 역량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111쪽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중심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이니, 인간으로서 어때야 하느니 등등의 말들은 쉽게 헛돌아 버린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우월감이나 열등감과는 관계없다. 그것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견고한 한계이자 지층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인간-지층 속에서가 아니라 내가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탈지층적?!) 사건에 부딪혔을 때다. 내 속에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는 어떤 인간.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다른 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정말로 가슴이 벅차오르게 하는 것은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확신이 아닐까! 위대한 인간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인간이 되고 싶다. 그것이 진심으로 내 마음에 느껴지는 날,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서 탈주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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