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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삶, 나의 글, 리좀

현실정치와 또 다른 정치

by 북드라망 2012. 6. 5.
가장 ‘정치적인’ 곳
- 미시정치와 내 안의 파시즘-

김해완(남산강학원 Q&?)

클릭, 정치라인(線)

주민등록번호 13자리 하사받은 지 어연 스무 해. 드디어 18대 대통령을 뽑는 신성한(?) 투표권을 가질 자격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요새 신문을 볼 때마다 큰 혼란에 빠진다. 정치인 이름도 잘 모르고, 정치적 발언의 어디까지를 믿고 또 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NL이니 PD니 하는 단어부터가 외국어인지라 머리 긁적이다가 급기야는 친구들과 공부에 들어갔다. (경기동부연합이 뭐임? 아니 근데 왜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거야?? 몰라...) 보다시피 우리는 현실정치에 미숙하고 또 무식하다. 정녕 젊은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는 잔소리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가(ㅠㅠ). 철 지난 유행어 “공부하세요”가 갑자기 가슴에 박힌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나를 억압하는 주체가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지난 5년 동안 ‘아주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분노가 한 곳으로 집중되기에는 내 삶을 규제하는 것들이 너무나 사방 군데에 펼쳐져 있다. 집, 학교, 병원, 사회적 시선…. 심지어 이 억압은 고정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가족은 내게 둘도 없는 든든한 지원병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나를 가장 억압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이게 다 MB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절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천 개의 고원』, 397쪽) 절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intercept가 아니라 segment, 즉 선분을 뜻한다. 시작점과 끝점이 정해져 있는 선분(단절된 선)은 끝도 없이 뻗어나갈 줄만 아는 선line과 대비된다. 저자들이 세계를 (분열)분석할 때 사용하는 개념적 도구는 정치적 계급이나 경제적 이론이 아니라 바로 이 선(線)이다. 여기에는 이 세계를 대하는 저자들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회’가 따로 있고 ‘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우리가 점이 아닌 선이어야 하는 까닭은 존재란 고정된 상태에서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개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늘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와중’이며 그 과정에서 차단당하기도 하고 다른 선들과 뒤엉키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라는 것은 절편화된 온갖 선분들이 견고하게 와꾸를 짜고 있는 것을 말한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정해진 선분(루트)를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이 수많은 절편들은 중앙집중화에 반대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한 점에서 공명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할 것이다.^^)

물론 현실정치에 대한 나의 무식함은 퇴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그 이전과 똑같이 편협해질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말마따나 내가 곧 선이라면, 나를 구성하는 선분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라인은 언제 어디서나 새롭게 발견된다. 혹은, 만들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진보? 보수? 공산주의? 파시즘? 나를 구성하는 선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미시정치 - 너 자신의 욕망을 알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거시정치와 미시정치라는 두 가지 관점을 고수한다. 이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시정치가 견고한 절편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제도에서 벌어지는 반면, 미시정치는 유연한 절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네의 일상적인 태도·지각·몸짓·인지·반응 안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 둘이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나누어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회나 개인이라도 이 두 종류의 절편성을 동시에 가로지르게 된다. (저자들은 ‘견고한 절편/유연한 절편’이라는 이항구도 대신 ‘절편/양자’라는 두 가지의 운동양상을 선호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굳이 미시정치를 말하고 있나? 자칫했다간 ‘미시정치’라는 개념을 단순히 국소적인 정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저자들이 이 개념을 통해 포착하려는 것은 풀뿌리 자치주의 이런 게 아니다(-_-).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욕망”이다. 정치와 욕망? 낯설다면 낯설다. 우리는 추상적인 가치는 거대담론에 맡겨버리고 나의 개인적인 욕망은 정신분석학에 맡겨버리는 데에 익숙하니까.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말로 끈덕지게 반복, 반복, 또 반복하는 것이 바로 이 이분법적 사고를 멈춰달라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장은 설령 이론적으로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해도 죽어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시정치는 바로 이 틀(제도) 위로 실질적인 욕망을 흐르게 함으로써 사회에 생기(生氣)를 불어넣고, 역으로 거시정치는 우리의 욕망에까지 침투했을 때 그 진정한 기능을 발휘한다. 우리가 느끼는 권력의 중심은 바로 이 두 영역 사이의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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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절대 하기 싫은 거 안 한다.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지만 토끼 같은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혹은 부모님이 내게 거시는 기대와 투자비가 너무 비싸서 직장이나 학교를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나 스스로에게 당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바로 내 욕망이지, 무언가에 억압당해서 억지로 하는 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거꾸로 내 욕망이 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실정이다. 등록금반값투쟁을 보자. 거기에는 천만원씩 착취해가는 대학당국과 오백만원이라도 내면서 대학에 남아있으려는 우리들의 모습이 동시에 섞여 있다.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스펙과 자격증에 대해서도 동경한다. 대학이 근본적으로 뿌리 뽑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닌가. 우리가 대학을 욕망하는 이상, 대학이 아무리 부패하고 만신창이가 되어도 어쨌든 계속 유지될 것이다. “믿음과 욕망은 모든 사회의 토대이다.”(417쪽)

좋은 정치이건 나쁜 정치이건 정치와 정치적 판단들은 항상 그램분자적이지만, 정치를 “행하는” 것은 분자적인 것이자 분자적인 것에 대한 평가이다. (421쪽)

미시정치, 우리에게는 이것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영역이 존재한다. 정치는 두 번 말해져야 한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은 지층과 도주선 사이, 그램분자적 절편(거시정치)과 분자적 양자(미시정치)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진동이기 때문! 결국엔 이 ‘두 번’을 어느 지점에서 식별해내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일일테다. 권력의 중심은 이 사이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권력은 마냥 대단해보이지만 사실은 절대적인 파워를 가진 게 아니라 선과 흐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대적인 전환지점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만일 두 영역 사이의 간극이 커져서 흐름(양자)이 권력이 마련해놓은 절편을 넘어서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무장해제되어 버릴 것이다. 아무도 그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내면화하지 않는데 권력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권력의 철저한 냉혹함과 허망함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430쪽)

70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미시정치’라는 것을 고민하게 했던 계기는 따로 있다. 70년 전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제2차세계대전 중에 히틀러가 벌였던 유대인종 말살 프로젝트는 전 유럽인들에게 벼락과도 같은 충격을 선사했다. 그들은 나치의 행군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다. 파시즘이란 과연 히틀러가 특허낸 개인발명품인가? 이 사태가 바로 우리의 욕망이 아닌가?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 그 다음 세대인 우리의 들선생과 가선생까지도 이 질문은 피해갈 수 없었다.

욕망은 왜 스스로 억압되기를 바라는가,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바랄 수 있는가? 이처럼 포괄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미시파시즘밖에는 없다. 확실히 군중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군중들은 일종의 마조히스트적인 히스테리에 빠져 억압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군중들은 이데올로기적 속임수에 기만당하는 것도 아니다. … 욕망은 결코 미분화된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라 정교한 몽타주에서, 고도의 상호작용을 수반한 엔지니어링에서 결과되는 것이다. (409쪽)

파시즘은 미시정치를 논하지 않고서는 본질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도 독일국민을 속이거나 억압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자발적으로 열광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우슈비츠 사태를 인간은 원래 악마와 같다는 서양식 성악설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욕망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바로 배치에서다. 내적인 본성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배치물이 배치해주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 파시즘은 “도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바꾸는 출구”였다.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의지, 그리하여 이 세계를 모두 파멸시키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길 잃은 전쟁기계였다. “나치들은 자신들은 사라질 테지만 자신들의 사업은 온갖 방식으로 유럽, 세계, 태양계 등에서 다시 시작될 거라고 믿었다.…[그들은]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과하는 죽음을 원했…다.”(437쪽) 

왜 인간은 이런 식의 배치에 빠지는 것인가?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호퍼는 아주 간명하고 빛나는 통찰로 일축한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게 실행된 현실부정이다. “무엇이 좌절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바로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자각이다. 그들의 가장 큰 욕망은 그런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유일한 구원은 자기를 거부하고…어떤 신성한 조직의 품 안에서 새 인생을 찾는 것일 뿐이다.” “이상한 일은 현재를 받아들이며 거기에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사람들이 정작 현재를 지킬 역량은 가장 딸린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그러니까 결국 파시즘이란 현실로부터 가장 도피하고 싶은 자들이 스스로를 내던지는 검은 구멍이다. 지층을 파괴하고 기관 없는 신체를 부숴버림으로써 뽑아낼 수 있는 최악의 도주선.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보여주는 아우슈비츠에는 독일인과 유대인죄수들이 극과 극처럼 대비된다. 희망을 맹신하는 자들과 모든 희망을 거세당한 자들. 하지만 양태만 다를 뿐, 결국 이 두 극단이 경험하는 좌절감은 같은 것이다.

미시파시즘의 배치가 만들어지는 한, 그곳이 어디이든, 누구에 의해서든, 70년 전 사건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생지옥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우리 역시 100%의 희망과 100%의 비관 속에서 종잡을 수 없이 살고 있다. 거시정치는 통치기술에 따라 우리들의 욕망을 ‘엔지니어링’한다. 현재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서 불안전성으로 치달아야 하는 역설 속에 던져져있다.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 안전하게 편승하기 위해서는 저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하지만(그래서 대학은 평생의무교육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 등록금을 천문학적 액수로 올리는 것이 용인되는(그래서 대학은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부담이다) 이 ‘불안함.’ 개인의 욕망이 요동칠수록 역으로 제도권은 굳건해진다. 그러다가 이 불안한 게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지면 우리는 저 파시즘이 그러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20세기가 아우슈비츠였다면 21세기는 쇼핑몰, 집단린치, 사이비종교, 약자에 대한 모든 무관심이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해리 스턴버그, <파시즘>
_ 파시즘은 괴물이다. 이 괴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보지 않을 뿐.


들뢰즈와 가타리는 ‘너의 그 하찮고 속세적인 욕망만 바꾸면 된다’ 와 같이 나이브한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하찮은 욕망’이란 말부터가 이미 틀렸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 “고도의 상호작용을 수반한 엔지니어링”을, 우리가 인식하고 감각하고 추구하는 모든 방식들을 지탱하고 있는 이 거대한 사회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주체보다 먼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특이점을 보인다. 배치(Arrangement)란 구조(Structure)와 다르게 ‘열린 장’이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선을 그을 때 배치는 바뀔 것이다. 파시즘의 배치가 있다면 기관 없는 신체의 배치도 있다. 왜 아우슈비츠는 그렇게 충격적인가. 그 생지옥이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논리적인 설계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고안해내어 가동시킨 배치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다. 가장 정치적인 현장으로.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가장 확실한 통치수단과 자신의 정치와 군사 전략의 정당화를 발견한 것은 결국 일상성의 공포와 일상성의 환경의 공포 속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까지 간다. … 다른 선들의 모든 위험은 바로 이 위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439~440)


삶, 기억하고 말하고 쓰기

저번 글에서 일상 속에 흐르는 우리의 욕망은 시시하지 않다는 글을 썼다. 그 말을 정정하겠다. 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몹시 중요하고 또 소중하다. 인간이 현실을 떠나고자 했을 때 어떤 파국이 펼쳐지는지 우리는 레비를 통해 보았다. 이 아우슈비츠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시리게 할 것 같다. 살아남아 살아가는 게 수치라고 했던 자. 딴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수치심을 함께 느끼지 않겠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속 좁게 살면 벌 받을지도 모른다-_-;)

혁명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나는 이 말을 감히 쓸 수가 없다. 혁명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개처럼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는 이 시대, 혁명이라는 말마저도 돈으로 바꿔버리는 이곳 배치 때문이다. 시대적 사명 대신 소비적 사명을 끌어안고 태어난 우리들 아닌가(^^). 하지만 우리들의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의 언어가 아닌 ‘혁명’이라는 말을 일부러 짊어지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거. 최근에 나는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말하고 글쓰는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불과 30년 먼저 태어난 우리 부모님 세대와도 공감하지 못할 만큼 다른 신체성을 가졌다. 우리 더군다나 아우슈비츠를 ‘공감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좁은 세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현재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기 위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수용소 밖의 삶이 아름다웠고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며 지금 우리가 사라지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이것이 인간인가』, 252쪽) 레비가 아는 이 세계를 우리는 모른다. 모르고 싶으면 모르기가 너무나 쉬운 시대다.

이것도 정치가 아닐까? 공부하는 사람이 왜 노동절에 시위하지 않느냐고 따졌던 누군가도, MB 욕하는 것보다 어려운 건 내 욕망을 바꾸는 거라고 한탄했던 나의 동학도, 모두 ‘정치’를 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정치를 분석하는 것은 내가 지금 어느 좌표 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허허벌판에 백지상태로 내가 내던져진 게 아니라면, 나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고 또 욕망하게 하는 선분들이 미리부터 짜여져 있던 것이라면,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로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현실정치가 오히려 일부분이고 정치 자체는 모든 곳에 있는 게 아닐까? 길 위, 트위터, 대학입시, 쇼핑몰 나의 일상, 우리들의 기억….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사회학자가 쓴 책이 아니라 인디언 멸망사를 읽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예민해지게 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진보사관의 논리보다, 모든 이념적 이해관계를 떠나 있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덤덤한 말투가 ‘과거의 문제가 바로 현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단박에 이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라는 말은 여전히 내게 요원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를 민감하게 반응하고 직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기득권층이나 권력을 잡으려 애쓰는 코스 위에서만 유효한 말이 아니다. 사각지대에서 작동하고 있는 선분들을 드러내는 작업은 바로 여기가 가장 정치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5년마다 투표하는 게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12월에도 이 마음을 놓지 말아야겠다. 모든 걸 다 걸고 믿었다가는 나중에 더 실망해버리면 어쩌나(^^). 정치공부는 계속 된다, 쭈욱~



천 개의 고원 - 10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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