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패스워드(Password)
미스터리
십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미스터리가 있었다. 나는 흔히 진보주의자(?)라고 명명되는 어른들 속에서 자랐고, 정치색은 몰라도 ‘교육의 진보’에만큼은 모두가 열의를 불태웠던 특이한 학교를 다녔다. 보통의 친구들이 누리기 힘든 행운에 당첨된 셈이다. 학교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부러워한다. (그러고는 왜 그만뒀냐고 묻지!) 하지만 정작 내가 고민했던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안에서 내 삶은 별로 진보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던 것이다. 갖출 거 다 갖춰 놓고 도대체 왜. 미스터리다. 훌륭한 교과서와 진실한 선생님들 밑에서 나는 청소년에게 ‘좋은 말’들은 엄청 많이 들었다. 아무도 내게 명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보람 대신 무기력에서 허우적댔다. 혹자는 나보고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다고도 했는데(-_-), 짜증이야 났지만 사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나 스스로를 자조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나와서 내가 충격을 먹었던 것은 엉뚱한 지점에서였다. 그건 우리 학교가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밖에서는 학교에서만큼이나 ‘좋은 말들’이 떠돌아다녔고 내가 느끼는 그 무기력함 역시 여전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현상일까? 이번 글은 이 미스터리를 따라가 본다.
“소통”은 없다 - 복종시키거나 복종하거나
첫 장면은 도발적이다. 교실풍경. 그곳은 푸릇푸릇한 새싹들을 키우는 지혜들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신체가 훈육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하고 있다. 수업, 그것은 이미 제도권 상에서 쓰이고 있는 ‘기호체계’를 고스란히 내 신체에 각인시키라는 일방적인 명령이라고. 정말로 그럴까? 여기서 우리가 직관해야 할 것은 학교의 폭력성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다. 저 장면에서는 희한하게도 사랑의 매가 아니라 언어가 그 도구로 쓰이고 있다. 언어가 감추고 있는 권력의 저 꿈틀거림.
평소에 우리가 언어를 떠올리는 이미지란, 인간 사이에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순수한 매개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중립적일까? 우리는 정말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애인에게 “자기야 사랑해♥”라고 문자를 날릴 때 우리는 “I LOVE YOU”라는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 문자는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말이 된다. ‘미안하니까 화 풀어’라는 사과문이라든지, 실제로는 ‘이따 집에 오면 죽었어^^’라는 반어법이라든지. 똑같은 한마디에 서로 다른 명령이 실린다. 어색한 친구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꺼내는 모든 횡설수설은 어색함을 쫓아보내려는 나의 명령이다.
『천 개의 고원』의 기본 전제는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는 것이다. 언어의 성격은 ‘전달’에 있지 않고 흘러 다니는 힘들을 ‘붙들어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틀을 만들고(흐름을 절단해서 방향성을 부여), 상대방이 거기에 따라오기를 강요한다. 가벼운 몇 마디조차도 우리는 상대가 내 말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것을 따르던지 거부하던지 액션을 취한다. 대화란 말을 통해서 실제적인 힘이 오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언어는 이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천 개의 고원』, 148쪽)
눈을 돌려서 세상을 보자. 나에게 쏟아지는 어마무지한 ‘말’들! 이 말들은 나에게 일정한 회로를 돌도록 끌고 간다. TV 홈쇼핑 방송에서 “현명한 주부님들을 위한 칼이에요”라는 멘트는 결국 “이것을 사”라는 명령어다. 페이스북에서 자꾸만 날아오는 소식메일은 “페이스북에 접속해”라는 명령어다. 학교의 시간표와 가정통신문과 교과서는 학교의 권력장치에 복종하라는 암묵적 명령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테스트에서 보여 주는 분석결과는 “너는 이런 놈이야”라고 단정짓는 명령어다. 갑자기 온 세상이 명령어로 다가온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웠었나. 쉴 새 없이 떠들면서 돌아다닌 것은 나의 정체성과 나의 욕망에까지 ‘명령들’을 기입하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단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래된 환상을 없애야 한다. 이 세상에 우리가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소통’은 없다. 소통. 만약 흰 백지 위에서 잡음 없이 오가는 깨끗한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환상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언어는 늘 오해의 온상지였다. 말이 우리의 뜻을 단 한 번이라도 투명하게 전달해 준 적이 있었나? 하지만 이것은 말의 한계가 아니라 본질이다. 뒤집어 보면, 우리들은 소통하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싶어하며 의견이 크게 엇갈리더라도 대결하려고 하지, 아무것도 만들어 내거나 해결할 수 없는 저런 식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명령한다는 것은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 세계에 대해 쉴 새 없이 힘을 행사한다. 또한 거꾸로 우리는 세계로부터 쉴 새 없이 힘을 행사받고 있다.
그러므로 ‘좋은 말’은 따로 있지 않다. 세상에는 힘을 전달하는 명령어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인권을 존중하는 어휘를 선택하더라도, 그 아무리 내게 호의를 품었다 하더라도, 모든 말들은 나에게 ‘명령’으로 작동한다. 말의 의미는 내용 속에서 찾을 게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실제로’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를 꿰뚫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미스터리의 실마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
펜이 칼보다 더 센 이유
그런데 도대체 언어가 이렇게 힘이 센 이유는 무엇일까? 총은 쏘면 바로 죽일 수 있지만 말은 그렇지 못하다. 글 역시 고작해야 흰 종이 위의 까만 잉크 흔적일 뿐이다. 언어에 비밀주문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언어가 늘 구체적인 상황(배치) 속에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이란 그게 말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상황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생각해 보라. 장난감 총을 들고 놀이터에 가서 “꼼짝 마, 죽여 버린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는 바보취급을 당할 것이다.(-_-;) 그런데 그 똑같은 말이 다른 배치로 진입했을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장소가 놀이터가 아니라 비행기이고 손에 진짜 총칼이 있다면, 그의 말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아주 살벌한 협박이 된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 순간, 비행기는 감옥이 되고 승객들은 죄수가 되는 것이다.
가끔 개그소재로 쓰이기도 하는 이런 예시들은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언어는 ‘비물체적 변형’을 행한다. 오직 말 한마디로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 놀랍지 않은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언어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서로가 서로에게로 갈마들면서 개입한다. (그래야지만 비물체적 변형이 가능하다.^^) 비물질적 변형은 늘 물질적 변형을 동반한다. 판사에게 ‘죄인’으로 선고된 사람은 감옥으로 끌려가고 강도가 “꼼짝 마”를 외치는 순간 모두가 움직이지 못한다. 지난 총선에서 김용민에게 욕쟁이 꼬리표가 붙은 후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같은 이치다. 욕쟁이라는 말의 의미는 ‘김용민=욕쟁이’라고 사전적으로(;;) 짝지어주는 것에 있는 데 아니라 그가 실제 총선에서 떨어진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진면목이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언어의 기능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펜이 칼보다 더 힘이 셀 수 있는 이유다. 칼은 우리의 몸을 찌를 수 있다. 하지만 말은 순간적으로 판세 전체를 바꿔 버린다. 칼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으로. 그러니 이 구체적인 정황들을 다 제거한 후 말만 똑 떼놓고는 ‘여기에 비밀이 어디 있어?’ 하며 분석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배치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심판’ 앞에서
학교에서 내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명령어는 바로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였다. 그 모든 좋은 말들이 결국 이 한 가지 명령어를 곱게 포장한 것이었다. 어떤 그럴듯한 말을 선택해도 결국엔 전공, 대학, 직업의 나열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결과가 돌아왔다. 나의 자유는 그 안에서만 존재하리라!
왜 나는 이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무기력함을 느꼈을까? 그것이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명령어는 심판이다. 학교의 문턱을 넘는 순간 사회적 언어는 나에게 비물체적 변형을 가한다. 여자, 학생, 지식인, 88만원 세대……. 이름표들!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확고한 테두리를 가진 형상(정체성)으로 붙박이가 된다. 이 이름표들은 내가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라’고 명령하는 배치일 뿐이다. 하지만 지배적 힘은 우리가 정지해 있기를 (죽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용과 표현이 원래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인 양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 순간 나는 나에게 붙어 있는 수많은 꼬리표들이 곧 ‘나’라고 믿게 된다. 이렇게 명령어란 작은 ‘사형선고’다. 그것은 말해짐과 동시에 경계선을 그려놓은 채 넘어가면 죽는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갈 때 일종의 죽음을 맞이한다. 바로 정상인으로서의 죽음이다.
이 게임을 피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끼기 위해 언어를 배워야만 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형선고’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명령어 앞에서 우리는 ‘Yes or No’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우리를 변형시키고 일을 시키는 “언표행위의 배치물”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이 배치물은 나에게 가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의 목소리 속에 우글거리는 다른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나의 말에는 부모님의 말, 내 옛 학교의 말, 연구실의 말, 기타 등등의 말들이 섞여있다. “배치물은 횡설수설인 것이다.”(같은 책, 164쪽) 여기에 바로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목소리 속에서 ‘다른 말’을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명령어가 아닌 것이 없다. 사실 세상이 친절하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거나 정중하게 나의 의사를 물어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저자들의 말대로 애초에 “물음이란 없”었고. 우리는 오직 “대답에 대해서만 대답할 뿐이”니까.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도주해야 할 이유도 명백하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 그 자체를 폐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접 ‘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이 구도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령어가 우리에게 비물체적 변형을 가한다면 거꾸로 우리 스스로 명령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명령어 밑에는 패스워드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언표가 힘이 있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명령어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을 이 세계에 명령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들로 우글거리고, 우리는 그것들 속으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십대 때의 나에서 한 발짝 나아간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되어라”라는 명령어를 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의 길은 내가 걸어갈 때만 나타난다. 나의 말은 나로부터 나올 때만 의미 있다(남의 말은 중요치 않다는 그 식상한 말이 의미 있으려면 이렇게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ㅋ). 좋은 말/많은 말 대신 진짜로 삶의 화답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패스워드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힘들긴 해도 괴롭지는 않다. 어떤 말을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무기력함과 갈증은 이렇게 우리가 직접 화답했을 때만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패스워드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김해완(남산강학원 Q&?)
미스터리
십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미스터리가 있었다. 나는 흔히 진보주의자(?)라고 명명되는 어른들 속에서 자랐고, 정치색은 몰라도 ‘교육의 진보’에만큼은 모두가 열의를 불태웠던 특이한 학교를 다녔다. 보통의 친구들이 누리기 힘든 행운에 당첨된 셈이다. 학교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부러워한다. (그러고는 왜 그만뒀냐고 묻지!) 하지만 정작 내가 고민했던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안에서 내 삶은 별로 진보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던 것이다. 갖출 거 다 갖춰 놓고 도대체 왜. 미스터리다. 훌륭한 교과서와 진실한 선생님들 밑에서 나는 청소년에게 ‘좋은 말’들은 엄청 많이 들었다. 아무도 내게 명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보람 대신 무기력에서 허우적댔다. 혹자는 나보고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다고도 했는데(-_-), 짜증이야 났지만 사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나 스스로를 자조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나와서 내가 충격을 먹었던 것은 엉뚱한 지점에서였다. 그건 우리 학교가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밖에서는 학교에서만큼이나 ‘좋은 말들’이 떠돌아다녔고 내가 느끼는 그 무기력함 역시 여전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현상일까? 이번 글은 이 미스터리를 따라가 본다.
“소통”은 없다 - 복종시키거나 복종하거나
여교사가 학생에게 질문할 때 정보를 얻거나 하지는 않는다. 문법규칙이나 계산 규칙을 가르칠 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기호를 부과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시한다. …… 의무교육 기계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에게 문법이 갖고 있는 모든 이원적 토대(남성형-여성형, 단수-복수, 실사-동사, 언표의 주체-언표행위의 주체 등)와 더불어 기호계(記號系)의 좌표를 부과한다.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는 명령어다. (『천 개의 고원』,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147쪽, 강조는 인용자)
첫 장면은 도발적이다. 교실풍경. 그곳은 푸릇푸릇한 새싹들을 키우는 지혜들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신체가 훈육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하고 있다. 수업, 그것은 이미 제도권 상에서 쓰이고 있는 ‘기호체계’를 고스란히 내 신체에 각인시키라는 일방적인 명령이라고. 정말로 그럴까? 여기서 우리가 직관해야 할 것은 학교의 폭력성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다. 저 장면에서는 희한하게도 사랑의 매가 아니라 언어가 그 도구로 쓰이고 있다. 언어가 감추고 있는 권력의 저 꿈틀거림.
평소에 우리가 언어를 떠올리는 이미지란, 인간 사이에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순수한 매개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중립적일까? 우리는 정말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애인에게 “자기야 사랑해♥”라고 문자를 날릴 때 우리는 “I LOVE YOU”라는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 문자는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말이 된다. ‘미안하니까 화 풀어’라는 사과문이라든지, 실제로는 ‘이따 집에 오면 죽었어^^’라는 반어법이라든지. 똑같은 한마디에 서로 다른 명령이 실린다. 어색한 친구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꺼내는 모든 횡설수설은 어색함을 쫓아보내려는 나의 명령이다.
『천 개의 고원』의 기본 전제는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는 것이다. 언어의 성격은 ‘전달’에 있지 않고 흘러 다니는 힘들을 ‘붙들어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틀을 만들고(흐름을 절단해서 방향성을 부여), 상대방이 거기에 따라오기를 강요한다. 가벼운 몇 마디조차도 우리는 상대가 내 말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것을 따르던지 거부하던지 액션을 취한다. 대화란 말을 통해서 실제적인 힘이 오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언어는 이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천 개의 고원』, 148쪽)
눈을 돌려서 세상을 보자. 나에게 쏟아지는 어마무지한 ‘말’들! 이 말들은 나에게 일정한 회로를 돌도록 끌고 간다. TV 홈쇼핑 방송에서 “현명한 주부님들을 위한 칼이에요”라는 멘트는 결국 “이것을 사”라는 명령어다. 페이스북에서 자꾸만 날아오는 소식메일은 “페이스북에 접속해”라는 명령어다. 학교의 시간표와 가정통신문과 교과서는 학교의 권력장치에 복종하라는 암묵적 명령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테스트에서 보여 주는 분석결과는 “너는 이런 놈이야”라고 단정짓는 명령어다. 갑자기 온 세상이 명령어로 다가온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웠었나. 쉴 새 없이 떠들면서 돌아다닌 것은 나의 정체성과 나의 욕망에까지 ‘명령들’을 기입하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단정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 (같은 책, 147쪽)
여기서 우리는 오래된 환상을 없애야 한다. 이 세상에 우리가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소통’은 없다. 소통. 만약 흰 백지 위에서 잡음 없이 오가는 깨끗한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환상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언어는 늘 오해의 온상지였다. 말이 우리의 뜻을 단 한 번이라도 투명하게 전달해 준 적이 있었나? 하지만 이것은 말의 한계가 아니라 본질이다. 뒤집어 보면, 우리들은 소통하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싶어하며 의견이 크게 엇갈리더라도 대결하려고 하지, 아무것도 만들어 내거나 해결할 수 없는 저런 식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명령한다는 것은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 세계에 대해 쉴 새 없이 힘을 행사한다. 또한 거꾸로 우리는 세계로부터 쉴 새 없이 힘을 행사받고 있다.
그러므로 ‘좋은 말’은 따로 있지 않다. 세상에는 힘을 전달하는 명령어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인권을 존중하는 어휘를 선택하더라도, 그 아무리 내게 호의를 품었다 하더라도, 모든 말들은 나에게 ‘명령’으로 작동한다. 말의 의미는 내용 속에서 찾을 게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실제로’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를 꿰뚫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미스터리의 실마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
펜이 칼보다 더 센 이유
그런데 도대체 언어가 이렇게 힘이 센 이유는 무엇일까? 총은 쏘면 바로 죽일 수 있지만 말은 그렇지 못하다. 글 역시 고작해야 흰 종이 위의 까만 잉크 흔적일 뿐이다. 언어에 비밀주문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언어가 늘 구체적인 상황(배치) 속에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이란 그게 말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상황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생각해 보라. 장난감 총을 들고 놀이터에 가서 “꼼짝 마, 죽여 버린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는 바보취급을 당할 것이다.(-_-;) 그런데 그 똑같은 말이 다른 배치로 진입했을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장소가 놀이터가 아니라 비행기이고 손에 진짜 총칼이 있다면, 그의 말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아주 살벌한 협박이 된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 순간, 비행기는 감옥이 되고 승객들은 죄수가 되는 것이다.
가끔 개그소재로 쓰이기도 하는 이런 예시들은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언어는 ‘비물체적 변형’을 행한다. 오직 말 한마디로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 놀랍지 않은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언어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서로가 서로에게로 갈마들면서 개입한다. (그래야지만 비물체적 변형이 가능하다.^^) 비물질적 변형은 늘 물질적 변형을 동반한다. 판사에게 ‘죄인’으로 선고된 사람은 감옥으로 끌려가고 강도가 “꼼짝 마”를 외치는 순간 모두가 움직이지 못한다. 지난 총선에서 김용민에게 욕쟁이 꼬리표가 붙은 후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같은 이치다. 욕쟁이라는 말의 의미는 ‘김용민=욕쟁이’라고 사전적으로(;;) 짝지어주는 것에 있는 데 아니라 그가 실제 총선에서 떨어진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진면목이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언어의 기능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웃음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게 바로 펜이 칼보다 더 힘이 셀 수 있는 이유다. 칼은 우리의 몸을 찌를 수 있다. 하지만 말은 순간적으로 판세 전체를 바꿔 버린다. 칼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으로. 그러니 이 구체적인 정황들을 다 제거한 후 말만 똑 떼놓고는 ‘여기에 비밀이 어디 있어?’ 하며 분석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배치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심판’ 앞에서
학교에서 내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명령어는 바로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였다. 그 모든 좋은 말들이 결국 이 한 가지 명령어를 곱게 포장한 것이었다. 어떤 그럴듯한 말을 선택해도 결국엔 전공, 대학, 직업의 나열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결과가 돌아왔다. 나의 자유는 그 안에서만 존재하리라!
왜 나는 이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무기력함을 느꼈을까? 그것이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명령어는 심판이다. 학교의 문턱을 넘는 순간 사회적 언어는 나에게 비물체적 변형을 가한다. 여자, 학생, 지식인, 88만원 세대……. 이름표들!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확고한 테두리를 가진 형상(정체성)으로 붙박이가 된다. 이 이름표들은 내가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라’고 명령하는 배치일 뿐이다. 하지만 지배적 힘은 우리가 정지해 있기를 (죽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용과 표현이 원래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인 양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 순간 나는 나에게 붙어 있는 수많은 꼬리표들이 곧 ‘나’라고 믿게 된다. 이렇게 명령어란 작은 ‘사형선고’다. 그것은 말해짐과 동시에 경계선을 그려놓은 채 넘어가면 죽는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갈 때 일종의 죽음을 맞이한다. 바로 정상인으로서의 죽음이다.
이 게임을 피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끼기 위해 언어를 배워야만 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형선고’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물음이란 없으며 우리들은 대답에 대해서만 대답할 뿐이다. 이미 물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대답(심문, 경연대회, 국민투표 등)과 다른 대답으로부터 오는 물음이 대립된다. 사람들은 명령어에서 명령어를 끌어낸다. (같은 책, 212쪽)
그런데 이 명령어 앞에서 우리는 ‘Yes or No’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우리를 변형시키고 일을 시키는 “언표행위의 배치물”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이 배치물은 나에게 가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의 목소리 속에 우글거리는 다른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나의 말에는 부모님의 말, 내 옛 학교의 말, 연구실의 말, 기타 등등의 말들이 섞여있다. “배치물은 횡설수설인 것이다.”(같은 책, 164쪽) 여기에 바로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목소리 속에서 ‘다른 말’을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명령어가 아닌 것이 없다. 사실 세상이 친절하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거나 정중하게 나의 의사를 물어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저자들의 말대로 애초에 “물음이란 없”었고. 우리는 오직 “대답에 대해서만 대답할 뿐이”니까.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도주해야 할 이유도 명백하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 그 자체를 폐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접 ‘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이 구도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령어가 우리에게 비물체적 변형을 가한다면 거꾸로 우리 스스로 명령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명령어 밑에는 패스워드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언표가 힘이 있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명령어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을 이 세계에 명령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들로 우글거리고, 우리는 그것들 속으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명령어 아래에는 패스워드가 있다. (같은 책, 212쪽)
십대 때의 나에서 한 발짝 나아간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되어라”라는 명령어를 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의 길은 내가 걸어갈 때만 나타난다. 나의 말은 나로부터 나올 때만 의미 있다(남의 말은 중요치 않다는 그 식상한 말이 의미 있으려면 이렇게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ㅋ). 좋은 말/많은 말 대신 진짜로 삶의 화답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패스워드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힘들긴 해도 괴롭지는 않다. 어떤 말을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무기력함과 갈증은 이렇게 우리가 직접 화답했을 때만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패스워드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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